내가 오늘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1988년 5월
"현아, 아침밥 먹자"
"엄마. 밥 먹을 시간 없어. 지금 학교에 가도 지각이란 말이야"
"그래도 한 술 뜨지 그러냐"
"저 가요"
"현아, 도시락 가져가야지"
오늘 못 먹은 밥은 평생 못 먹는다
학창 시절 아침밥을 못 먹고 학교에 등교할 때, 어머니가 자주 하셨던 말이다. 그 당시에는 끼니를 거르는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에 하신 말로만 알았다.
'아침밥을 못 먹어서 배고프면 2교시 끝나고 도시락 먹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오늘 하루에 충실하자는 의미였다. 어머니 인생에 깊은 철학이 담긴 말이다.
# 2014년 8월
"어..... 어.... 어................"
누군가가 뒤에서 내 머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몸이 으스스 떨렸다. 컴퓨터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자동 종료된 것처럼 내 머리가 자동 종료된 것이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총을 맞고 슬로모션으로 쓰러지는 장면처럼, 내가 앉아있는 의자가 슬로모션으로 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외마디 소리를 외친 채, 난 의식을 잃었다. 순식간에 벌이진 일이었다. 그 뒤로 의식을 찾은 건 달리는 911 엠블란스 안이었다. 교수님이 내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교수님께 괜찮다는 얘기를 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내 인생은 뇌종양 수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수술 이전에는 평범하게 사는 대한민국 남자의 모습이었다. 첫 사회생활은 소규모 회사에서 막내로 시작했다. 회사 규모가 작다 보니 허드렛일도 하고 급여도 적었다. 급여가 서너 달 밀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신 막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광고 비전공자라는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에 시스템이 갖추어진 광고 회사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내가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매월 급여받고 일도 배우니 회사에 감사했다. 월화수 목금금 금. 저녁 9시가 빠른 퇴근이고 새벽에 퇴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기획서를 보내야 할 경우에는 철야작업을 했다. 체력에 자신 있었다. 밤 12시가 낮 12시처럼 활기찼다. 1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았다.
열심히 하니 보상도 따랐다. 연봉도 오르고 대기업 계열 광고 회사로 이직하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광고인들이 모여있는 곳은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잘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내 모습이 작게 보인다. 불안한 마음에'무언가를 배워볼까?'라는 학습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내 업무 이력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도 있었고, 대학 비전공 이력을 가리려는 숨은 뜻도 있었다. 회사 업무와 학업을 병행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팀장님 배려로 수업이 있는 금요일에는 한 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었지만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주 과제가 있었고 수업 직전에야 비로소 과제 제출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과제를 못 한적도 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업무와 학업 둘 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대학원에는 해외연수 과정이 있다. LA 소재 대학의 디지털 비즈니스 과정이었다. 첫날 수업이 끝나갈 때쯤 난 갑자기 쓰러졌고, 미국 병원에서 MRI 결과 뇌종양 소견이 나왔다. 한국에서 정밀검사 후 수술을 했다. 9시간 수술. 수술 때 종양의 조직검사 결과 뇌종양 3기 판정. 이후 28회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탈모 현상과 체중감소.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뇌종양은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존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선포식이자, 내 삶의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나 자신의 변화다
내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건강에 대한 자만심과 만성 스트레스에 방치한 나 스스로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신체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도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고기 대신 야채를, 흰밥 대신 현미밥 위주로 먹는다. 회식에는 술 대신 물을 마신다. 걷기, 자전거와 같은 유산소 운동을 하고, 명상, 뇌체조와 같은 브레인 트레이닝을 한다. 내 건강이 곧 우리 가족의 행복임을 알았다. 죽음의 문턱에 가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이 변하니 가정생활에서, 직장에서, 인간관계에서 변화가 있었다.
결혼 10년 만에 제 2의 신혼인 듯 부부 사이가 애틋해졌고, 어머니와 단 둘이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어머니와 아내, 세 자녀 3대가 같이 사는 우리 집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현재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 집 이름은 "따로家치"이다. 6인 가족이 한 공간에서 개인의 독립적 공간이 보장되는 '따로' 있을 수도 있고, 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같이' 있을 수도 있는 집이기를 바라는 의미다.
다시 복직한 회사, 휴직 이전보다 더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직장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없으니 덜 받으려고 노력하고, 동료에게도 스트레스 관리법을 조언한다. 내 책상은 마치 작은 수목원처럼 선인장과 화초들로 꾸몄다. 체력증진 프로그램, 요가 수업, 해피 컨설팅, 쿠킹 클래스 등 임직원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에 최대한 참여하려 노력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내가 오늘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뇌종양 수술 이후 병실에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만약 오늘 죽는다면? 우리 어머니는? 아내는? 아이들은? 어쩌지? 어떡하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자, 앞으로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살다가는 암이 재발되거나 또 다른 시련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목숨을 담보로 베팅하고 싶지는 않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 빅터 프랭클은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딱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라고 말했다. 내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려고 노력했다. 변화된 생각, 눈물, 시련, 웃음, 행복, 사랑을 이 글에 담았다. 내 경험을 세상과 공유하고 싶다.
내 변화된 삶을 통해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을 당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겠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오늘 하루 충실하게 살고,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에 충실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고 약속하고 싶다. 이 글을.읽을 당신과 말이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당신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