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장갑

by FortelinaAurea Lee레아

제4편. 하얀 장갑


전시 오프닝 날, 갤러리 안은 은은한 재즈 음악과 와인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신작 회화와 조각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고, 사람들은 검은 옷차림으로 와인을 들고 작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입구 옆에서 하얀 장갑을 끼고 와인을 따르고 있던 이는 아르바이트생 지호였다.


지호는 검은 베스트와 나비넥타이를 매고, 손에는 갤러리 측이 지급한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었다.

와인을 따르고 잔을 닦는 일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그가 사실은 갤러리 벽에 걸린 작품들과 같은 작가라는 사실을.


지호의 손은 평소에 거칠고 상처투성이였다.

철근을 구부리고 못을 박으며, 버려진 자재를 주워 설치미술을 만들던 손.

그 손이 오늘은 와인병을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감사합니다” 하고 잔을 받아가며 웃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손등에 남은 굳은살과 흉터를 보지 않았다.

그 손은 예술의 증거였으나, 오늘은 단순한 서비스 인력의 흔적으로만 존재했다.


“아르바이트생, 잔 좀 더 채워주세요.”

관람객 중 한 명이 건넨 말에 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따랐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벽에 걸린 작품보다 내가 쓴 하루 일당이 더 싸구려라니.’


오프닝이 무르익어 갈 즈음, 한 무리의 손님이 와인을 들고 작품을 논했다.

“이 설치작품, 참 대담하네. 산업 폐자재를 이렇게 쓸 생각을 하다니.”

“작가가 누구라고요? 이름이… 지호?”


순간, 하얀 장갑 낀 지호의 손이 멈췄다.

그들은 방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시장 구석, 아무도 잘 보지 않는 코너에 설치되어 있었다.

철근, 낡은 창문틀, 그리고 조명등 파편을 모아 만든 구조물.

그 작품의 라벨에는 분명 ‘작가명: 박지호’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작가 박지호’가 아니라, ‘알바생 박지호’였다.


잠시 뒤, 한 관람객이 와인 리필을 받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근데 이 와인 따르는 청년도 이름이 지호네. 작가랑 동명이인인가 봐요.”


그 순간 옆에 있던 큐레이터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이름이 같을 뿐이에요. 작가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지호의 눈가가 떨렸다.

그는 손에 든 와인병을 내려놓고, 하얀 장갑을 벗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제가, 그 작가입니다.”

짧은 한 마디가 공기 속에 떨어졌다.

순간, 전시장 안의 음악이 멎은 듯 고요해졌다.


지호는 작품 옆에 서서, 장갑 낀 손을 바라보았다.

“저는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런 조각을 만듭니다.

오늘은 오프닝 알바로 와서 와인을 따르고 있었죠.

저에게 예술은 돈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동시에 돈 없이는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도록비, 대관료, 광고비… 저는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제 작품은 이 구석에, 저처럼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제 손은 진짜입니다.

이 흉터와 굳은살은, 제 작품의 설명문보다 더 정확한 스테이트먼트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한 노부인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젊은이, 장갑을 벗으니 작품이 더 잘 보이네.”


또 다른 관람객이 중얼거렸다.

“저 손이야말로 진짜 예술이네.”


사람들은 작품보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호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작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프닝이 끝난 뒤, 그는 다시 장갑을 끼고 와인을 치웠다.

알바비는 고작 몇 만 원.

그러나 그날 이후, 그의 작품 앞에는 작은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당신의 손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설치입니다.”


그 쪽지는 누가 붙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값비싼 와인 한 병보다 더 큰 위로였다.


지호는 장갑을 벗고, 작품 옆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이 장갑이 아니라, 내 손 자체로 살아남겠다.”


— 끝 (제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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