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달빛의 기억
제9장: 달빛의 기억
이안은 소녀와 나란히 서서 돌다리 아래로 흐르는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계속해서 요동치는 낯선 감정은 그에게 혼란과 동시에 희미한 따스함을 안겨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당신과 처음 만난 것 같은데… 낯설지가 않아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요."
소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그래요. 이상하죠? 마치 잊어버린 기억의 조각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에요."
그들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함께 강물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물 위에 부서지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안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제 이름은… 서… 서하예요."
이안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이상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서'라는 글자가 그의 기억 속 어딘가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지막이 그 이름을 반복했다.
"서하… 서연…"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서연이라뇨? 그건 제 이름이 아니에요."
이안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갑자기 떠오른 이름이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익숙해서요."
서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이름도 참 예쁘네요. 어쩌면 그 이름이 당신과 중요한 인연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이안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다. 그는 자신이 왜 서연이라는 이름에 끌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이안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머릿속에서 서하와의 대화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방 안에 앉아 불을 끄고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서연… 너는 누구였을까? 왜 난 너를 기억할 수 없을까?"
그는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손끝에서 사라지는 연기처럼 불분명했다. 다만, 그는 서하와의 만남이 우연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연결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 뒤, 이안은 서하를 다시 만나기 위해 돌다리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 옆에 앉았다.
"서하 씨."
그는 부드럽게 불렀다.
서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저를 기다리셨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몰라요. 하지만 당신을 만나면 제 마음속 빈자리가 채워질 것 같았어요. 이상하게도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누구였는지 조금씩 기억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안은 그녀의 말을 듣고 놀랐다. 서하 역시 자신처럼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기억을 찾아봐요. 분명 우리가 서로에게 남겨진 단서가 있을 거예요."
그들은 그날 밤 강변을 따라 걸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하는 자신이 몇 달 전 눈을 떴을 때부터의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전의 모든 것은 희미한 안갯속에 감춰져 있었다. 이안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기억 속에도 빈칸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만 그 빈칸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달빛이 두 사람의 길을 밝히며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서하는 이안의 손을 꼭 쥐며 속삭였다.
"혹시 우리가 과거에 만났던 적이 있는 걸까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우연이 아닐 거예요."
그 순간, 서하는 이안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 함께 그 이유를 찾아봐요. 과거가 어떻게 되었든, 지금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날 밤, 그들은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빈 기억을 채우며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달빛 아래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운명의 조각들은 다시금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은 점차 시간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로 이어질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