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성문 너머의 약속
제8장: 성문 너머의 약속
서연과 이안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성문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다. 문은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새겨진 고대 언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선택한 자만이 이 문을 열 수 있다."
이안은 성문에 다가가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이 닿자 금속 문이 미세하게 떨리며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조용히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야, 서연. 이 문은 너를 기다리고 있어. 네가 선택한 길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줄 거야."
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조심스레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서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문이 그녀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선택… 내게 남겨진 길을 믿어야겠지."
그녀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그러자 문은 천천히 열리며 강렬한 빛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그들 앞에는 거대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기둥마다 황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신전 중앙에는 물 위에 떠 있는 둥근 수정 구슬이 있었다. 그 구슬은 은은한 빛을 발하며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이게… 시간의 중심인가?"
이안은 수정 구슬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서연은 구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공기가 흔들리며 신전 안에 하나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과 닮았으나, 온몸이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서연, 이안. 드디어 너희가 여기까지 왔구나."
그 존재는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은 낯선 존재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왜 우리가 이곳으로 오게 된 거죠?"
그 존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시간과 운명의 수호자다. 너희가 선택한 길이 이곳으로 너희를 이끌었다. 이제 너희는 세상의 균형을 되돌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수호자는 손을 들어 수정 구슬을 가리켰다.
"이 구슬은 세상의 시간과 운명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의 틈새가 열리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서연, 너는 구슬과 연결되어 이 틈새를 봉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서연은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희생이라니… 어떤 희생을 말하는 거죠?"
수호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구슬과 연결되는 순간, 너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또한, 네가 살아온 흔적은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세상의 균형은 회복될 것이다."
서연은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살아온 모든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그럼 이안은요? 그는 저를 기억할 수 있나요?"
수호자는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너의 존재가 지워지면, 이안조차 너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안의 시간은 너의 선택 덕분에 온전히 이어질 것이다."
이안은 수호자의 말을 듣자마자 서연의 손을 잡았다.
"서연, 네가 그 선택을 할 필요는 없어. 우리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서연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 지었다.
"이안,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은 더 큰 혼란에 빠질 거야. 네가 내 곁에 없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이 선택을 해야 해."
이안은 서연의 눈을 바라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결심이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나도 네가 사라지지 않도록 끝까지 기억할 방법을 찾겠어. 네가 날 잊어도, 내가 널 찾아낼 거야."
서연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속을 믿을게, 이안."
서연은 수정 구슬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손을 뻗자 구슬은 더욱 강하게 빛나며 그녀의 손끝을 감쌌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서연은 눈을 감고 속삭였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세상을 지킬 수 있다면 괜찮아."
구슬은 점점 더 밝게 빛나더니, 서연의 모습이 빛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빛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서연아! 절대 널 잊지 않을 거야! 내가 반드시 널 찾을 거야!"
이안의 외침이 신전 안에 메아리쳤다.
구슬이 서연의 몸을 완전히 삼키자 신전은 고요해졌다. 수정 구슬은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아갔고, 신전 안에는 이안 혼자만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무릎을 꿇으며 속삭였다.
"도대체 누구였지? 왜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거지…?"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세상은 혼란에서 벗어나 평화를 되찾았고, 시간의 균형은 온전해졌다. 그러나 서연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날, 이안은 우연히 숲길을 걷다가 낯익은 돌다리를 발견했다. 다리 위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고, 그녀는 달빛을 받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이안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는 다가가 소녀에게 물었다.
"혹시… 우리가 만난 적 있나요?"
소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들은 그렇게 또다시 서로의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잃어버린 시간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