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잊힌 이름들 (5편)
6장: 잊힌 이름들 (5편)
"페레타… 기억해라. 네가 누구인지를."
천둥 같은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순간 페레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듯 깨어났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이마를 짚었다.
기억들이 떠올랐다.
오래전, 그녀는 단순한 봄의 여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길을 잃은 영혼들에게 마지막 안식을 주던 존재였다. 지하세계에서 하데스와 함께하면서도, 때로는 지상으로 올라와 이승과 저승의 문을 여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녀를 단순히 ‘봄의 여신’으로만 부르며, 그녀의 다른 이름을 잊어갈 때, 그녀 스스로도 그 역할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숲 속의 붉은 눈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우리를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이름을 기억하는가?"
페레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자신이 버려두었던 이름을 입술로 조용히 불렀다.
"데스포이나(Despoina)."
그 순간, 숲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일순간 흔들렸다.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 이름을 기억할 줄이야."
그는 손에 들린 검은 수정을 움켜쥐고 힘을 불어넣었다. 다시금 검은 안개가 요동치며, 붉은 눈의 자들을 조여 왔다.
"너는 봄의 여신이야. 생명을 주는 자지. 죽음의 문을 여는 역할은 네 것이 아니었다!"
페레타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
"생명과 죽음은 하나야. 하나를 부정한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사라지는 게 아니야."
그녀는 두 손을 펼쳤다. 손끝에서 빛이 피어나며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봄의 기운이 아니었다.
빛과 어둠, 두 가지 힘이 그녀의 손에서 함께 피어났다.
"나는 봄의 여신이자, 죽음의 문지기야."
검은 망토의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그 힘을 다시 깨운다면, 신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페레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들이 나를 잊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 순간, 그녀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연기가 그녀를 감싸려 했지만, 그녀의 빛이 모든 것을 밀어냈다.
페레타는 붉은 눈의 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희의 길을 열어 줄게."
붉은 눈들이 떨리는 듯했다.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 네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있다면, 너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그녀는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댔다. 부드러운 빛이 퍼지며, 마치 보이지 않는 문이 열리는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순간, 붉은 눈들이 하나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검은 망토의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멈춰라!"
그는 다시 한번 검은 수정을 들어 올렸지만, 이번에는 빛이 더욱 강해졌다. 페레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너희의 시대는 끝났어."
검은 안개가 점점 희미해졌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신들은 네 선택을 두고 보지 않을 거다."
그는 남아 있는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붉은 눈의 자들이 모두 빛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 페레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래전 그녀가 닫았던 문을, 다시 열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봄의 여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봄과 어둠을 함께 품은, 새로운 균형의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