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투명한 문장을 지우는 손
33. 투명한 문장을 지우는 손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문장이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내 손끝에서 그것들이 시작된다.
붓을 든 듯,
혹은 지우개를 쥔 듯,
투명한 글자들이 서서히 나타난다.
그 글자들은 현실을 아른거리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지우면
그 즉시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내가 지우는 것은
기억의 흔적이었고,
또다시 되살릴 수 없음을 알기에
그 속에서 점점 더
내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투명한 문장이란,
그 자체로 공허한 존재,
하나의 존재를 지우고
다른 존재를 남기는 방식으로만
형태를 갖는다.
하지만 손끝이 닿을 때마다,
그 안에 깃든 메시지가
새로워진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또 다른 문장을 지우고
새로운 투명한 문장이
내 손길을 기다린다.
.
.
.
종이 위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투명한 글씨가,
잉크 없는 말들이,
바람처럼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여기 있어, 너를 위해 쓰였지만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아."
그 문장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말해지지 않아 더 진실했고, 보이지 않아 더 선명했다.
어떤 손이 있었다.
그 손은 문장을 적기도 전에 지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가
말보다 침묵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듯이.
나는 조용히,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 사라진 단어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 하나는 ‘용서’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단어는 이름조차 없었다.
그것을 우리는 '플릭시아의 언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