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장
[Sky Bones(하늘의 뼈)]
제96장 - 기억 전염자와 고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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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중력권에서 탈출한 건 정오였다. 태양풍이 부서지듯 튕겨나가던 순간, 세란은 ‘엘리’가 남긴 기억 코어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들었다.
우주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지만,
그의 귀엔 고래의 노래처럼 무언가 울려 퍼졌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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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어-릴의 개봉
도슨과 크리에는 세란을 둘러싸고 있었다.
세란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기억 코어를 양손으로 감쌌다. 그것은 육체적 접속 없이도 뇌파로 정보를 전달하는 유기-양자 구조였다.
“잠깐 기다려.” 크리에가 손을 뻗었다.
“너 혼자 열면 위험해. 지금 넌 감정이 불안정해.”
“내가 봐야 해.” 세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야. 그걸 내가 모른다면, 다시는 ‘인류’를 위해 싸울 수 없어.”
띠익—
기억 코어가 열리자, 주변 공간에 미세한 전자기 진동이 퍼졌다. 동시에, 주변 중력이 0.3% 일시적 왜곡을 일으켰고,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부유했다.
그리고 영상이 시작되었다.
엘리가 마지막 순간 직접 남긴 감정기록 영상이었다.
> “세란… 내가 여기까지 와서야 깨달은 건,
우리 모두의 기억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각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주입’된 이야기라는 거야.
하메즈는 틀렸어. 기억은 선택될 수 없어.
그건 자라나는 생물이고, 감염되고, 또 스스로를 정화하는 존재야.”
> “내가 남기는 이 데이터, ‘하늘의 뼈’에서 너는 진짜 의식의 고래를 만나게 될 거야.
그 고래는… 전 인류의 무의식이 맺어낸 거울이야.
우리가 정말 누구였는지 알려줄 거야.”
엘리의 영상은 사라졌지만,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세란의 뇌리에 남았다.
그녀는 떠나기 직전, 눈물을 닦으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그 따뜻함이, 감염된 기억의 바다 속에서도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마지막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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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억 전염자
영상이 끝난 직후, 도슨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호 탐지. 감염 주파수와 일치하는 파장이 반응 중. 지금 우리가 엘리의 기억에 접속하는 동안... 역으로 누군가 우리를 탐색하고 있어.”
“기억 전염자다.” 크리에가 속삭였다.
“아그노스. 정확히는 그 잔재. 그는 의식을 통해 퍼진다. 이 신호는 생각만 해도 감염되는 기억. 자가번식하는 의식 그 자체야.”
도슨은 즉각적으로 디아스포라 전신방에 쉴드를 쳤다.
하지만 세란의 정신은 이미 접속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기억을 통해 '고래'와 접촉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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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래의 노래
빛이 사라진 심연.
시간조차 멈춘 그 틈에서, 세란은 존재하지 않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 위를 유영하는, 하나의 형체.
고래.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는 의식으로 만들어진 생물, 전 인류의 기억이 투사된 환영이었다.
그 고래가 울었다.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라, 세란의 내면 깊은 곳에 스며드는 울음.
그는 순간 모든 기억을 체험했다.
· 고대 지구, 바벨 탑이 무너질 때 울던 아이의 눈
· 화성 개척 1세대, 고열병으로 죽은 어머니의 마지막 숨
· 거대한 우주항에서 잃어버린 연인의 뒷모습
· 그리고… ‘엘리’라는 이름이 처음 생긴 날의 떨림까지
세란은 무릎 꿇고 울었다.
그 울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종(種)의 회상이었다.
고래는 마침내 말을 걸었다.
> “너희는 잊으려 했지만, 나는 기억한다.
나는 증오도 사랑도 담고 있는 무한한 그릇.
나는 전염자가 아니다.
나는...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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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염과 자각
세란이 눈을 떴을 때, 코어-릴은 식어 있었다.
그는 엘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은 병이 아니라, 항체다.
감염은 파괴가 아니라, 통합의 과정이었다.
지금까지 인류는 기억을 분리하고,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의식의 뿌리인 ‘고래’는 반란을 준비했다.
도슨이 묻는다.
“... 넌 뭘 봤지?”
세란은 조용히 말했다.
“해답을 봤어.
그건 우리가 싸워야 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이야.”
그는 시계를 바라봤다.
그리고 결정했다.
“우린 다시 ‘하늘의 뼈’로 간다. 이번엔 무기로가 아니라… ‘기억’으로 싸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