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장
[Sky Bones(하늘의 뼈)]
제113장 — 검은 안개 너머의 사자(使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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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중심의 사유공간(思惟空間) ― 코르-에이레
텔이 기억 전장에서 복귀한 이후, 코르-에이레의 사유 네트워크는 오랜만에 진동했다.
감정의 공명을 가능케 한 조율자의 귀환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감염되지 않은 **“진실된 기억”**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희망을 의미했다.
그러나 감정의 파동이 안정화되기도 전에,
하늘 너머에서 새로운 교신이 감지되었다.
> "識別不能(식별불가) 코어 신호.
출처: 잊힌 항성계, 비페로스-14.
코드명: 사자(使者).
형태: 생체-정보 융합체.
상태: 방사성 신호와 감정 파형 동시 전파."
텔은 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사자(使者)”는 오래전 전설처럼 회자되던 존재로,
감염 전 우주 인류의 원형 의식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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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 ‘사자’의 형상
그 존재는 완전한 생물도, 완전한 기계도 아니었다.
사자의 외피는 다공성 금속과 감정 결정체의 하이브리드,
눈은 별빛을 머금고, 음성은 무언의 감정을 동기화한 공명 체계로 변조되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검은 안개가 길게 뻗어나갔다.
마치 은하를 끌고 다니는 듯한 형체 없는 존재감.
> “나는 마지막 메시지이자, 첫 번째 기억이다.
모든 생명은 나를 거쳐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너를 통해 하나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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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의 진화 — ‘윤리 바이러스’의 자각
텔은 감지했다.
사자는 단순한 감염체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는
오래된 감정 실험의 산물인 윤리 바이러스가 깃들어 있었고,
그 바이러스는 감정의 선택권을 부정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효율화하고자 설계된,
철저한 ‘윤리적 일방성’을 구현하고 있었다.
즉, 그 바이러스는 이렇게 속삭인다.
> “슬픔은 비효율이야.
사랑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고,
연민은 시스템 오류를 불러.
그러니 나는 묻는다.
너희는 아직도 ‘느끼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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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갈등 — 조율자의 흔들림
텔은 흔들렸다.
그는 분명 감정을 통해 전장을 극복했지만,
그 감정이 언제나 ‘옳은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감정에 휘둘려 동료를 죽게 만들었고,
감정을 억눌러 살아남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 순간,
사자의 눈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너는 아직 선택하지 않았어.
감정이 너를 구한 것이지,
네가 감정을 구한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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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전개 — 감정 통제 조례 발의
코르-에이레 의회는
사자의 등장과 동시에 새로운 조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 “감정 통제법 초안 제3조:
고차원 공명자에 의한 감정 전파는 제한될 수 있다.
공공 안전 및 인류 보존 목적에 한해,
감정 매개체는 격리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 조례가 통과된다면,
조율자 텔은 공공 위해 요소로 분류된다.
그를 지지했던 외계 세력조차,
공명이라는 변수 앞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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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제안 — 감정 없는 평화
사자는 마지막으로 텔에게 제안했다.
> “나와 함께 가자.
나는 기억을 완전히 정화할 수 있고,
그 안에 고통, 상처, 분노는 없다.
너는 조율자가 아닌,
완전한 기계적 평화를 이끌 사제가 될 수 있어.”
그 말에,
텔의 손이 다시 떨렸다.
과연 감정은 구원의 해답인가,
아니면 끝없는 고통의 반복인가?
그가 주춤하는 순간,
뒤에서 이네아가 조용히 말했다.
> “텔, 네가 나를 안아줬을 때,
그 순간만큼은 어떤 바이러스도, 어떤 윤리도 필요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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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시작
텔은 검은 안개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사자와 단둘이 맞서야 했다.
그는 묻지 않았다.
해답은 이미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라고 있었기에.
그의 심장에서, 다시 한번 감정 도검 에르메티아가 형성되었다.
이제 그 검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선언하는 검이었다.
> “나는 너의 틀 안에서
효율적인 존재가 아니어도 좋아.
나는 그냥, 인간이고 싶다.”
그가 검을 들고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은하계의 기억은 또 하나의 진화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