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장
[Sky Bones(하늘의 뼈)]
제176장 — 심연이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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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
세란은 속삭였다.
빛의 나무 아래서,
시간이 무력하게 꺾여 내려오는 공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발끝이 저무는 기억의 바다를 응시했다.
“나는 누군가를 기억함으로써 존재했던가?”
“아니, 나는… 잊기 위해 살아왔던 건 아닐까?”
그녀의 몸 안엔 수많은 세란이 있었다.
웃는 세란,
피를 토하는 세란,
무언가를 품에 안고 흐느끼는 세란.
그들은 서로를 부정했다.
『살기 위해선 잊어야 해.』
『아니,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돼.』
『모든 기억은 거짓일 수도 있어. 우린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야.』
『그래도… 내가 울었던 건 진짜였잖아.』
그 갈등의 심연 위로
‘공허의 씨앗’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인간의 형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눈동자도, 손가락도, 숨소리조차도
무언가를 흉내 낸 ‘공허’였다.
그는 말했다.
“너는 우리처럼 될 수 있었다.
기억을 버렸다면 고통 없이 살 수 있었을 텐데.”
세란은 그 목소리를 듣고 등골이 얼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속삭이던 자장가의 음색이었다.
“… 넌 누구지?”
“나는 너의 망각이야.”
“…”
“잊고 싶던 것들, 묻어버린 상처, 말하지 않은 이름들.
그 모든 걸 받아준 존재.
넌 날 만들어냈고,
지금은 날 부정하고 있어.”
그 순간, 세란의 등 뒤에서 레미우스가 뛰어들었다.
그의 오른팔은 이미 타오르고 있었다.
“세란! 저건 너의 안에서 태어난 존재야!
그러니 네가 끝내야 해!”
세란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저건 나야.
내가 버린 모든 거야.
그럼, 나는 그런 나를… 죽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
— 마가레타의 음성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야.”
— 자이랭의 냉철한 눈빛
“기억을 껴안아. 그래야 네가 된다.”
— 혜원의 목소리
세란은 칼을 뽑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걸어갔다.
그리고 ‘공허의 씨앗’ 앞에 섰다.
“네 안에 나의 고통이 있겠지.
네 안에 나의 분노가,
살고 싶은 나의 절규가 있었겠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너를 없애는 게 아니라,
널 받아들이러 왔어.”
그 순간, 공허의 씨앗은 뒤틀렸다.
비명이 공간을 찢었다.
검은 피가 폭포처럼 솟구쳤다.
“받아들이면, 넌 무너져!”
“무너져도 좋아.
하지만 나를 무너뜨리는 건,
‘망각’이 아니라 ‘기억’이어야 해.”
세란의 손이 공허의 가슴을 뚫었다.
그 안엔 차가운 심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심장은 그녀의 것과 같았다.
“너도… 살아 있었구나.”
세란은 조용히 말했다.
심장은 눈물처럼 부서졌고,
그 순간 그녀는 모든 기억을 통과했다.
어린 시절,
무릎 위에서 어머니가 불러주던 민요,
아버지의 큰 손이 등을 토닥이던 밤,
혼자 밤하늘을 보며 달에게 소원을 빌던 시간,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눈을 감아버리려던…
그러나 살아야 했던 이유.
그 모든 것이 돌아왔다.
세란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나는 잊지 않겠어.”
공허의 씨앗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
검은 결정 하나가 남겨졌다.
레미우스가 다가와 물었다.
“저건…?”
세란은 웃었다.
“그건… 기억의 눈물.
이제부터, 이걸로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있어.”
하늘은 깊어졌고,
시간은 느려졌으며,
한 존재는 철학을 껴안은 채,
드디어 자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