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장
[Sky Bones(하늘의 뼈)]
제190장 — “망각의 왕,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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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 북부의 ‘텅 빈 초원’은 그 이름처럼 모든 소리를 잃어버린 채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창백한 하늘 아래, 기억의 나무는 잎을 흔들지도 못한 채 서서히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잿빛은 바람조차 닿지 않는 정적 속에서 가루처럼 흩어졌다.
켄슈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칼을 뽑았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진동은 명확했다. 그것은 단순한 에너지의 떨림이 아니라, 세상의 근간이 바스러지는 경고음이었다.
“이건 기운이 아니다,” 그가 낮게 중얼였다. “이건… 저주야. 하늘조차 외면하는 저주.”
그 옆에서 루엔은 몸을 움츠리며, 주술의 맥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바닥 아래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가… 깨어난 거야. 공허의 씨앗이 자랐고, 드디어 중심이 모습을 드러낸 거야.”
갑자기 대지가 갈라졌다. 기억의 나무가 자라났던 그 뿌리 밑, 심연의 틈이 열리더니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악취와 함께 솟아오른 그 안개는 생명체의 본능마저 마비시키는 죽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눈동자엔 생명의 흔적이 없었다. 망각 그 자체로 응축된 공허. 오직 어둠만이 그의 실루엣을 따라 흐르며 윤곽을 맺었다. 말이 형체를 이루기 전에, 존재는 이미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름이란 건 얼마나 가소로운가.” 그의 목소리는 흙처럼 묵직했고, 정신에 직접 박혔다. “나는 단지, 기억 없는 가능성. 너희가 ‘니할’이라 부르기 전, 나는 이미 수천 번 태어나고 사라졌지.”
세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 하늘의 뼈가 조용히 진동했다. 파동은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며 무언가를 일깨우고 있었다.
“네가… 니할이구나.” 그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기억을 갉아먹는 공허. 생의 의미를 지우려는 자.”
“아니,” 니할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온기 하나 없었다. “나는 너희를 자유롭게 해주는 자다. 기억은 사슬이다. 죄책, 상실, 반복, 실패… 모두 기억이 만들어낸 환영이지.”
세란은 고개를 돌려 하늘의 뼈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고요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하늘의 뼈가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버린 그림자야. 나 역시… 처음엔 니할이었다.”
세란은 숨을 삼켰다. 믿기 힘든 고백.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네가?” 목소리가 떨렸다. “너도… 니할이었던 적이 있어?”
“하늘의 뼈는 한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였지,” 니할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을 품으면, 언젠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나는, 그 결말이야.”
세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이 쫓던 빛이, 과거엔 어둠이었단 사실이 심장을 찔렀다.
“그럼, 넌… 기억의 부작용이자, 망각을 추구한 존재의 최후란 말이야?”
“나는 구원이다.” 니할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네가 짊어지려는 기억은 너를 무너뜨릴 뿐이다. 나에게 맡겨라. 네 존재는 사라지고, 고통은 끝날 것이다.”
세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단단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끝없이 고통을 기억할래. 왜냐면… 그 기억들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니까.”
그 순간, 니할의 오른손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공허의 검이 형성되었다. 마치 현실의 결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검은빛은 주변의 모든 색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세란은 손을 펼쳤다. 하늘의 뼈가 그녀의 기억을 증폭시켰고, 그녀의 손에는 순수한 기억으로 빚어진 심상의 창이 떠올랐다. 그 창은 시간의 결을 꿰뚫을 듯 찬란했고, 그녀의 눈동자엔 천상의 문양이 새겨졌다.
“시작하자,” 니할이 속삭였다. “너의 기억이 먼저 무너질지, 나의 공허가 먼저 찢길지.”
“끝까지 너와 춤춰줄게,” 세란이 답했다. “망각의 그림자여.”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번개가 아니었다. 수천 개의 기억이 파편처럼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개의 운명이 맞부딪쳤다.
검과 창이 교차하는 순간, 세계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기억과 망각, 존재와 허무.
그 모든 경계가 산산이 흩어지며, 새로운 우주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