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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한 Jun 10. 2019

괴물

봉준호와 계급 갈등

괴물에 맞서는 약자들의 이야기


그대들은 한강변에서 괴물의 피를 얼굴에 뒤집어쓴 채 이렇게 외치는 노랑머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현서야! 현서야!"


한강 변두리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노랑머리의 가족에게 위기가 닥쳤다. 딸 현서가 괴물에게 납치된 것이다. 그들은 현서를 구하기 위해 괴물과 사투를 벌이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사투는 국가 권력과 벌어진다.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가 위험에 처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생명을 구해주어야 할 소방관은 별 다른 설명도 없이 그들을 병원에 가두고, 민중의 지팡이 경찰관은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에 아이를 구할 수 없다'는 헛소리만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결국 아이를 구하러 가는 것은 노랑머리의 가족, 사회적 약자다. 힘없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약자가 권력집단과 대립하여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구조다.


괴물과 마주한 힘없는 사람들


주변에 괴물을 직접 마주하지 않은 자들이 더 많았으므로, 노랑머리는 조소를 일으켰다. 정신과 치료받던 분이죠? 경찰관이 말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충격을 받아서… 우리가 이해해야지. 의사가 말했다. 노랑머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 말 좀 끊지 마, 내 말 좀 들어줘 제발. 내 딸이 아직 원효대교 밑에 있다고. 이 개새끼들아.


누가 괴물을 만들었는가? 포름 알데히드를 한강에 풀라고 지시한 외국인 박사인가? 그의 지시에 따른 한국인 연구원인가? 혹은 그 모든 환경을 제공한 한강인가? 한강에서는 거의 매일 자살이 일어난다. 자연으로써 한강은 그 어떤 가치도 대변하지 않지만,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한강은 대한민국 경제 압축 성장을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에 사용된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특수성과 관련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그러면 누가 괴물을 만들었는가?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괴물을 만들었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괴물을 만든 자들이다."


하지만 권력은 괴물에 맞서기보다 약자와 맞선다. 아이를 구하려는 약자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한다. 괴물과 맞서는 것보다 그게 더 편리하니까.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불합리에 대해서는 "네가 권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작 괴물에 맞서는 것은 힘없는 사람들이다. 노숙자는 소주병을 내리치며 말한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나." 그리고는 아이를 구하러 간다. 약자만이 약자를 보듬어 나간다.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나누어 먹을 파이가 충분히 크지 못한 문제인가? 파이가 커지면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게 될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자본의 소유와 계급의 탄생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capital)에서부터 비롯된다. 자본이란 무엇인가? 돈인가? 금인가? 주식인가? 토지인가? 모두 자본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주식과 토지는 자본으로 볼 수 있지만 돈과 금은 자본으로 보기 어렵다. 자본은 생산수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일해본 경험이 있는가? 일해본 경험이 있다면 한 번쯤 의아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이만큼의 돈을 주는 것인지 혹은 이것이 적절한 대가인지.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적절한 대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의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가치의 대부분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가져갔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것을 정당화해주기에 단연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생산수단은 무엇일까? 생산수단은 생산을 위해 필요한 물질적, 비인간적 요소이다. 노동 대상 및 노동 수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노동력과 결합되어 생산물을 낳는다. 노동력이란 노동자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생산력이란 반드시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신발 공장에서 만들어진 신발에 신발끈을 끼우는 일을 맡은 노동자이다. 이때 공장은 생산수단이다. 생산수단인 공장은 신발을 만드는 기계(노동 수단)와 신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노동 대상)로 구성된다. 당신은 열심히 신발끈을 끼워 월급 200만 원을 받는다. 공장에는 당신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 9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더 많은 임금을 받거나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없다고 가정해보자. 공장은 평균적으로 한 달에 5000만 원의 매출을 기록한다. 공장의 시설을 운영하는데 1000만 원, 재료를 구입하는데 1000만 원이 쓰였다. 또 노동자의 임금을 지불하는데 2000만 원이 쓰였다. 남은 건 1000만 원이다. 공장의 주인은 공장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일하지 않고도 당신이 5개월을 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취한다. 무언가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노동력은 신체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생산수단은 특정 사람들에게만 편중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은 자본가이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분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서 착취한 이득을 이용하여 제도를 구축한다. 제도는 자본가의 이익을 정당화한다.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보호한다. 그리고 생산수단은 다시 자본가를 위한 제도를 공고히 한다. 노동자는 끊임없이 착취당한다. 끝없는 악순환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힘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금지하고 공산주의를 도입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실패했다. 역사적으로 실패한 제도를 도입하자고 하는 헛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외에도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니까 민주적으로 접근해보자.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는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사람과 정당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용해야 한다. 힘없는 사람을 위해 돕는 사람에게 권력을 주어야 한다. 약자를 위해 때로는 자신을 위협하는 권력에 맞설 줄 아는 사람에게 권력을 주어야 한다. 자기 밥그릇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힘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권력을 사용할 자격이 있다. 그래야만 근본적으로 불합리한 제도를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은 권력에 비굴하게 굴복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자본가들에 의해 세뇌당해서 그들의 이익을 지지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알려야 한다. 우리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당신도 모르게 착취당하고 있다고.





참고자료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진우 역,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02.

프리드리히 니체, 안성찬·홍사현 역,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책세상, 2005.

김소연, <한국 SF 영화에 나타난 계급 연구 - <괴물>, <설국열차>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영상대학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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