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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중년의 꿈

꿈의 빛


중년의 나이에도 꿈은 새로이 만들어지기도, 그러다 금세 시들해져 버리기도, 아주 가끔은 활활 타오르기도 한다. 내 10대 즈음에 가졌던 꿈보다는 무지무지하게 현실적이면서도 20대에 품었던 그것에 비하면 거의 영양실조 수준에 가깝지만, 꿈을 늘 있다. 어쩌면 반드시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초조함이 찾아올 때면 중년의 꿈은 쉽사리 잊히기 때문에 더더욱 중년의 그 꿈의 가치는 크기만 하다.


국내 대기업에서 IT서비스 기획 업무를 해를 거듭하여 맡아 오면서 생긴 꿈 하나. IT서비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을 무대로 서비스 기획과 서비스 디자인 프로페셔널로서의 경험을 가지는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흥분되고 멋진 일이다. 하지만, 처음 꿈을 꾸던 당시 이미 40대 후반으로 접어들던 내 나이나,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영어 실력, 뒤늦게 입문해서 보잘것없는 전문성,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무하다시피 했던 소프트웨어 지식... 머릿속엔 내가 이 꿈에 도전을 할 수 없는 이유들로 들어차있었다.


후~ 그렇게 중년의 내 꿈은 빛을 바래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여느 다른 꿈들처럼.



가슴속의 출렁임


후배들에 대한 '코칭'이나 혹은 작게는 '조언'이라는 과대 포장으로, 내 꿈에 대해선 눈길을 주지 않아도 되는, 그건 너무 이기적이다라거나 어른스럽지 못한 일인 양, 또 한 해 두 해를 흘러 보낸다. '그래도 난 절대 "꼰대"는 아니'라는 위장술은 애저녁에 이미 실패한 줄도 모른 채, 그렇게 '한국의 중년'이라는 통계적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뜻이 맞았던 옛 후배 하나가 어느 날 찾아와 내 추천서가 필요하단다.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미국으로 이직을 하고 싶어서라며 미국 영주권(Green Card) 자격을 얻기 위해 미 이민국 특별 프로그램에 지원한단다. 심사에 필요한 서류 중에, 미국 이민국이 정의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추천서가 필수라면서.


그 후배는 잔소리와 같았던 한 꼰대의 몇 년 전의 공허한 꿈 얘기를 흘려듣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렇게 실천에 옮기는 중이었다. 미국 이직에 도전하기 위해 이런 이민 제도를 스스로 찾아 도전하는 후배의 모습은 너무도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이 모습을 본 내 가슴에 묘한 출렁임이 일었다.



벗어나자.


미국에서의 석사 학위, 영국에서 주재원으로서의 조직 관리 경험과 그 기간 동안 틈틈이 짬을 내어 마친 MBA가 있었지만, 미국에서 IT서비스 기획 전문가로서의 직업 활동은 내겐 그저 지금은 잊힌 치기 어린 공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연차가 쌓여가면서 조직관리자로서 대부분의 업무시간을 보내고 있던 내겐, 미국 기업들에 '나 한 번 써보시오.'라고 말할 자신이 우선 없었다.


더욱이, 그 무렵 주변의 동기들이나 가까운 선후배들은 조직장으로서의 역할마저도 내려놓기 시작할 정도로 이미 꽉 찬 경력에 같은 분야에서 뭔가를 새로이 시작하기가 막막한 생각마저 들 때였고, 나중에 직장을 관둔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소주잔을 넘쳐흘러 내 일상을 서서히 잠식해 가고 있을 즈음이다. '그나마 난 역할도 분명하고 할 일이 많아서 다행이지. 애들 공부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 버티는 거야.'라며 소위 '버티는 미덕'을 기리고 칭송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버틴다고?  너무 무의미하진 않나?', '아이들 공부가 끝난 그다음엔?', '평생 새로운 도전을 하며 살겠노라 다짐했던 것 같은데, 나를 속인다는 게 이런 것이었나?', 한 달에 한두 번 즈음 스물 거리던 이런 생각들이 시간이 갈수록, 해가 바뀔수록 잦아진다. 매주, 심지어 지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



행동하기 위한 변명거리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살면서 간신히 터득한 내 삶에 대한 통찰이라고는, '인생은 도전'이라는 단순한 등식밖엔 없었고, 그 익숙한 곳에서의 '버팀'의 끝이 무엇일지 이미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시들어가던 꿈의 불씨는 이미 신선한 산소로 가득한 바람이라도 맞은 듯 다시 빛나기 시작했고, 그것마저 지나쳐 버리기 전에 그 불씨를 살려 줄 장작이 필요했다. 이 늦깎이 도전을 지지해 줄 그럴듯한 변명거리 같은 것들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적으로 영주권도 마련하고 취업까지 성공해서 미국으로 떠난 그 후배와 연락이 닿았는데, 때마침 내 귓가를 울린 후배의 한 마디.


"형님은 이 프로그램에 지원 안 하실 이유가 없죠. 그 정도면 경력도 충분하신 데다, 아이들 졸업 후에 비자 걱정 없이 취업하면 되는 건데요?"


첫 번째 이유라고 들어준 것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예의 바른 후배가 선배 듣기 좋으라고 해 준 말일테지만, 두 번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아이들에겐 선택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꼭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주권자라면 잡(Job) 여건 때문에 한국으로 어쩔 수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진 않을 테니 말이다. 미국경기도 흐름을 타긴 마찬가지일 테고, 늘 호경기여서 영주권 없는 유학생들이나 취준생들에게 비자까지 해결해 주며 일하자고 한다면야 이상적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영주권 없이는 불리한 상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기


내가 잘하는 것 중에 하나는 행동하기다. 물론, 이 때문에 대부분 실천에 옮기기 전에 필요한 준비나, 치밀함이 못 미쳐 실패를 통해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서야 배움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치밀함이나 연산능력이 좋아질 리 없으니 실천하는 천성이야말로 다행인 셈이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해지자 더욱 분명해졌다. 아내의 동의를 얻어 곧바로 영주권 지원 프로세스를 진행해 줄 변호사에게 연락을 했다. 후배의 프로그램 지원을 도우며 알게 된 변호사인데, 내 연락을 받고는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 들어와 있으니 한 번 만나잔다. 한 달여 후 계약은 이루어졌고, 미국 이직 프로젝트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젠 되돌아가기도 어려워진 거다. 이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말하는 백가지도 넘는 이유를 여전히 안고 있었지만,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내 상상 속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 즉, 위대하기 그지없는 그들 속의 '나'를 그리면 그릴수록 나를 주눅 들게 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 보단 나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나 자신에겐 다른 것들 보다 더 나은 것들이 분명 있었고, 충분히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들, 그것들이 나를 특징 지워주는 자질이자 의지가 맞다면 지금의 수준으로 모든 걸 예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부딪쳐 보지 않고선 그게 어떤 정도인지 가늠이 어렵고, 부족하다한들 부딪쳐 보지 않고선 더 다듬고 만들어갈 방법도 없으니.


완벽하진 않더라도 영어로 소통할 줄 아는 것, 나름 흔치 않은 글로벌 경험, 내가 이 잡(Job)을 좋아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아내와 가족의 지지.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의 의지. 모든 게 무의미하게 낭비되어선 안되지 않겠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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