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새벽, 안동 ~ 낙단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 여행에서는 몸은 매일의 격정적인 노동(?)에 늘 지쳐있지만, 아침엔 일찍 잠에서 깬다. 여행에 대한 흥분 때문인지 단지 새로운 잠자리 때문인지 알 순 없지만, 덕분에 오늘 아침 만큼은 기대했던 하회마을의 일출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커버사진: 물안개 자욱한 하회마을 입구
하회마을을 에워싸듯 흐르는 낙동강 때문인지, 아침 물안개가 자욱했다. 하회마을의 기와와 초가지붕 위에 내려진 빛의 연출을 상상했던 내겐 뜻하지 않은 횡재다. 아침식사도 잊은 채, 자전거로 마을 전체에 깃들어있는 '수연'의 모습을 둘러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감나무집"을 나선다. 집 주인께선 아직 깨어나지 않으신 듯하다. 자전거를 타고 기와담 사이 골목들을 유유히 흐르니, 고글앞에 작은 물방울들이 뽀얗게 내려 앉는다.
촉촉한 마을 나들이에 이어, 곧 바로 병산서원을 향했다. 오래 전 (15년도 더 지난 듯 하다), 병산서원에서 잠을 자는 행운을 얻은 적이 있는데, 그 다음날 아침 서원 중정에 앉아 "만대루(낙동강을 바라 볼 수 있는 입구쪽의 누마루 건물)"의 기둥들 사이로 보이는 물안개와 어우러진 병풍 같은 산과 강의 실루엣에 한참 동안이나 시선을 빼앗긴 적이 있다. 얼마나 깊은 인상과 감동을 얻었던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직까지도 늘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인력이다.
고강도 라이딩에 생명과도 같은 아침식사조차 거르고, 그 병산서원을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에 전조등과 후미등을 모두 켜고 안개 속을 달려 나간다.
이런~! 망했다.
병산서원은 건축적으로도 우리나라 서원건축을 대표하지만, 가장 깊은 산중에 위치하며 접근성이 좋지 않은 서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깜빡할게 따로 있지, 15년 전 버스를 타고 비포장 자갈길을 4킬로미터나 들어갔던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로드바이크는 이런 길을 달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끌고 가기엔 너무 멀고 우회로는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산길이다. 로드바이크를 타고나서야 길의 포장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그 이전에 기억된 사물들에 대에서는 그런 분류 로직이 적용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ㅠㅠ 너무 아쉽고, 이제야 제 정신이 드는지 배가 무척 고팠다.
어쩌겠는가? 주변에 인적도 없으니 안동댐으로 직행~. 댐 근처에서 늦은 식사라도 하기로 했다.
아침 물안개가 젖어든 곳은 하회마을 뿐만이 아니었다. 안개속에서 서서히 빛과 함께 깨어나는 안동댐으로 가는 라이딩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길가 풀숲은 생명력으로 충만했고, 호수와도 같은 낙동강은 하늘 빛과 구름을 그대로 안은 채, 하늘과 하나 되어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흐르는 물안개만이 이 둘을 구분해 줄 뿐이다. 도로 위를 달릴 때 느껴지는 바람과 강한 아침 향기는 내 몸 안의 찌꺼기 마저 정화시켜주는 것 만 같았다.
가슴마저 벅차 오르기 시작한다. 어디를 가나 길은 길이고 같은 공간이겠지만, 저 마다의 결정적 순간을 품을 때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짧은 '안동의 순간'을 오늘 아침에 내가 사로 잡는 행운을 누린다.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물안개가 걷히고, 따뜻한 햇빛을 머리 위로 느끼기 시작 할 무렵, 안동시로 들어가기 전 두 개의 고개길을 연이어 만난다. 그 중, 안동에 가까운 '백호고개'는 거친 호흡과 허벅지 근육의 통증을 넘어, 어지럼증까지 유발했다. 아침식사를 거른데다, 3일 째 이어지는 라이딩의 영향이다. 가파른 안동댐을 올라야하고, 다시 돌아와야 할 길인데, 오늘은 아침나절에 힘을 다 써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아침 식사가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라이딩은 계속된다.
백호고개는 아침부터 내게서 온갖 험담이란 험담은 다 듣고서야 나를 보내 주었다. 평소에 욕설은 안하는데 ^^ 지금은 너무 힘든 나머지 ㅅㅍ ㅅㅍ 했다. 이거라도 해야 다리를 움직 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백호고개로 부터 풀려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안동시와 안동댐이 가까이 있음을 알리는 여러 문명의 장치들이 눈에 들어온다.
인증센터 옆 아름다운 월영교와 그 아래 낙동강 감상도 잠시, 식사 전에 안동댐까지 다녀오기 위해 길을 재촉한다.
저 곳을 올라야한다. 최대한 힘을 내야겠기에, 비상용으로 준비해온 에너지젤을 물과 함께 흡입 후, 약기운?(^^)이 퍼질 때를 잠시 휴식을 취한다. 허벅지까지 어서어서 퍼져라~ 만화 주인공 같은 나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
안동댐...
그 정상에 오르자, 시원한 감동이 밀려 들었다. 팔당, 충주 몇몇 댐을 보긴 했지만 안동댐은 그 스케일과 경치가 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댐 관리실에서는 댐을 가로지르는 길 개방시간 30분 전에 도착한 나를 위해 문을 일찍 열어 주셨다.
이리저리 댐을 구경하고, 이제는 댐 건너편 입구 관리실에 혼자 계신 분과 몇 마디 댐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허기진 배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내려가는 길을 여쭤보고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신나는 다운힐 라이딩을 위래 자전거에 다시 올랐다.
배고픔을 달래기라도 하듯 시원한 다운힐 라이딩으로 단숨에 내려와 버렸다. 이른 휴일 아침에 숙제를 다 끝내버린 의기양양한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여유롭게 식사할 곳을 찾는다. 문제는 아직도 이른 시간이란거다. 10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가게가 아직 문을 열기 전이거나 요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맘씨 좋은 가게 사장님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상황~ ^^
역시나, 친절한 사장님을 만나 평소보다 일찍 문을 연 식당에 홀로 자리를 차지한 후 내 생에 최고로 맛있는 메기 매운탕을 맛 본다. 쫄깃한 메기 살점을 삼킬 때 마다 체력 걱정은 조금씩 사라져 가는 듯 했다. 백호고개야 기다려~ ! ㅎㅎ
이제 부터는 다소 지루한 라이딩이다.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안동으로 오기 위해 어제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달렸던 길을 되돌아가 다시 상주 상풍교까지 가야한다. 마음 속엔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는 유혹이 잠시 일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자전거를 끌었으면 끌었지 '동력'의 힘은 빌지 않는 원칙을 갖기로 했다. No 자동차 No 기차! ^^
지도를 살피며 조금 꾀를 내어보기로 했다. 정식 자전거도로는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굽이굽이 긴 반면, 국도는 자동차들과 함께 달려야하는 다소의 불편함과 위험이 있지만, 빠르고 노면이 로드바이크엔 최적의 컨디션을 제공한다. 시골 길이어서 차량 양이 적은 점도 떠올리며, 지도 위의 916 국도를 낙점 후, 최대한 빨리 달려 남쪽길로 오르기로 한다. 다시한번 "달려라, 하니" ㅎㅎ
힘들다. 허리통증이 시작되는 시간도 하루하루 빨라지는데 3일째인 오늘은 2시경부터 통증과 함께 피곤함이 찾아온다. 이제 전체 여정의 절반을 왔을 뿐인데, 체력이 떨어진 느낌이 크다.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완주를 위해 현명한 체력 분배가 필요한 시점.
916국도를 타기로 한 것은 잘 한 결정이었다. 올 때는 없었던 긴 고개길들이 힘들게 했지만, 시간을 크게 줄여줬다. 뜨거운 낮이 되니 길 바닥에 죽은 양서류들이 제법 눈에 많이 띈다. 우리나라에 뱀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이제, 상주상풍교를 돌아 상주보가 있는 남쪽으로 향한다.
상주보에 못 미쳐, 상주상풍교와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경천대로 향하는 언덕길은 어이가 없다. 자전거를 전혀 모르는 분이 만드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클릿(페달과 발을 고정시키는 장치)을 이용해 페달을 힘껏 당기고 밟으며 온 몸의 체중과 엑스트라 근육 힘을 더 써보지만, 경사가 완만해 지는 지점으로 부터 1~2미터 남겨두고 내 자전거는 절벽에 가까운 경사길에 서 버린다. 묶여있는 발을 제때에 떼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는데, 다행히 난간을 붙잡고 낙차는 면했다. 자전거이던 나이던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던 상황을 운 좋게 모면한다. 긍정정으로 보면, 예측 불허라 재밌다. ㅎㅎ
상주부터의 낙동강은 확연히 그 느낌과 지역환경이 다르다. 남한강이나 안동지역의 낙동강 보다 훨씬 물의 양이나 강폭이 크며, 강변도 산이나 바위로 바로 이어지지 않고 드넓은 평야다. 산은 저 멀리 실루엣으로 보여질 만큼 강의 스케일이 크다. 그 스케일은 라이더들의 움직임과 스피드를 지루함으로 압도한다. 음악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번 장거리 싱글 라이딩이 어렵게 느껴지는 때이다.
낙단보는 낙동강 자전거길에서 드물게 음식점과 숙소(무인텔)가 모여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조금더 힘을 내어 야간라이딩을 해서라도 칠곡보까지 내려가려했지만, 아침에 겪었던 피로감을 또 맛보긴 어려워 이곳 낙단보에 조금 일찍 쉴 자리를 잡는다.
땀에 찌든 져지와 패딩팬츠를 손빨래로 첫 세탁을 하고,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내일과 모레는 남부 낙동강의 사대천왕이라 불리우는 다람재, 무심사(사찰) 임도, 박진고개, 영아지마을 임도를 앞두고 있다. 살짝 긴장은 되지만, '이화령보다 더 할까'라며 자문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켜본다. ㅎㅎ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오늘 아침 안동의 기억으로 아직도 팽팽한 두 다리를 진정시켜보지만, 내일은 여러모로 이번 여행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 든다. ㅠ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