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뜰밖 Jun 20. 2020

할머니가 남긴 50년된 씨간장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항아리에서 발견된 '영롱한 유산'

39살 딸 이야기


친정엄마는 집에 올 때마다 양손이 가득하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반찬통에는 파, 마늘, 들기름이 기본으로 버무려진 다양한 나물 반찬이 정갈하게 담겼다. 엄마의 손길로 물에 헹궈지고, 데쳐지고, 버무려진 반찬들이 사위와 딸, 어린 두 손주의 입에 들어가는 게 삶의 낙인 사람처럼. 엄마는 그렇게 반찬통을 애주 단지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엄마, 주말에 어디 갔는데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아?”


한참만에 통화가 됐다.


“이모들이랑 평창에 갔다 왔지. 강원도의 산속 깊이 들어가서 싸리순, 다래순, 고추순 뜯었지. 취나물이랑 두릅도 뜯었다. 봄만 되면 내가 가슴앓이를 하잖니. 엄마가 해준 산나물이 뜯고 싶고, 먹고 싶고, 느끼고 싶어서. 엄마가 남기고 간 씨간장으로 간을 하고 들기름에 깨소금을 넣어서 이모들이랑 맛있게 무쳐 먹었다.”


인천에 사는 친정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휴대전화를 통해 엄마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엄마의 엄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7년 동안 치매를 앓으셨는데, 몇 년간 요양원 생활을 하셨다. 요양원에 들어가시기 전에는 치매 증상으로 집 밖을 나오면 길을 잃으셨다. 할머니는 종종걸음으로 밭이나 들로 나가 냉이, 달래, 소리쟁이, 돌미나리, 돌나물 등을 캤는데, 할머니가 원해서라기보다 평생 육 남매를 먹여온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았다. 풀물이 든 할머니의 손톱은 흙과 풀의 내음을 기억했다. 저 멀리 밭에서 홀로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캐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였다. 한 소쿠리 뜯은 나물을 든 할머니를 경찰이 발견하면 그나마 운이 좋았다.  


“엄마, 그래서 이모들이랑 나물만 실컷 캐고 온 거야? 좀 쉬고 놀고 오지. 거기까지 가서 나물을 뜯고 데치고, 또 자식새끼들 나눠줄 나물까지 데쳐온 거야?”

“말도 마라, 얘~ 데쳐서 된장에도 무치고, 할머니가 만든 고추장에도 무치니까 맛있더라고. 전라도 사람은 물엿에 찹쌀가루로 죽을 쒀서 고추장을 만들지만, 경기도는 물엿 대신 질금가루 물을 만들어서 졸이는 거야. 거기다가 띄운 보리쌀을 넣고 고추장을 담그면, 얼마나 구수하고 담백한지. 꽁보리밥에 들기름을 넣어서 고추장에 비벼먹으면 너무 맛있어. 다들 비벼 먹느라 정신이 없었어.”


봄나물을 뜯으며 엄마의 채취를 느껴보고 싶었던 자매들은 휴대전화 사진 속에서 그야말로 소녀처럼 웃고 있었다. 나이는 모두 환갑 언저리였다.  




63살 딸 이야기


서울에 사는 딸과 통화를 하고, 씻으려는데 온 몸이 쑤신다. 평생 나물을 캤던 엄마가 그리워 언니들이랑 평창에 다녀왔는데, 환갑을 넘기니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런데도 나물을 좋아하는 자식새끼들을 먹일 나물을 지인의 집에서 넓은 가마솥에 장작불까지 피워 데쳐왔으니 마음이 이내 넉넉하다. 아직도 자식들의 입에 넣어줄 게 있어서 어찌나 감사한지.


엄마는 93살까지 살았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그 해 여름, 씨간장을 발견했다. 엄마 집 앞마당에 있던 장 항아리들을 언니들이랑 비워냈는데, 항아리 바닥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씨간장을 발견했다. 1946년생인 큰언니가 8살 무렵부터 엄마가 경기도 안성 난실리에 살면서 간장이랑 된장을 담갔다고 했는데. 그러니 엄마는 내가 태어난 무렵부터 이 항아리에 간장과 된장을 해마다 담갔다. 반세기를 버텨온 씨간장 한 움큼을 손바닥에 올렸다. 투명하고 영롱한  엄마의 맑은 눈이 생각났다.

큰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창에서 들이쉬었던 공기를 기억하며 수다를 떨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간장이 없을 때 엄마가 더 그립네. 너는 안 그러니? 우리 또래는 간장에 대한 그리움이 늘 있어. 늘 엄마가 담가준 걸 맘대로 퍼서 먹다가, 주택 살면서 아파트로 오니까 장도 못 담그고. 주는 사람도 없고. 마트에서 사는 건 싫고.”


맞장구를 쳤다.

“언니, 기억해? 엄마는 간장 담그는 날 목욕재계부터 하고 그랬잖아.”


엄마에게 간장은 늘 귀했다. 해마다 담그는 간장은 남아돌았지만,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줘도 절대 파는 일은 없었다. 엄마의 밥상에서 간장은 늘 대접을 받았는데, 항상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마다 간이 다 달라서였다. 엄마의 간장은 사계절과 다양한 재료를 만나면서 음식 속에 버무려졌다. 겨울 내에 말려놓은 고춧잎과 무말랭이는 봄이 되면 끓인 간장물에 투하돼 새로운 반찬으로 재탄생했다. 끓인 간장물을 식혀 설탕과 파, 마늘, 들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묻히면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김장을 담글 때 엄마는 무를 소금에 절이고, 고추씨를 넣어 여름까지 저장해뒀다. 여름에 밥맛이 없을 때 시원한 물에 얼음 동동 띄워서 풋고추랑 파를 송송 썰어 넣어 먹으면 톡 쏘는 맛이 입안을 감쌌다. 입 안 한가득 퍼지는 짭짜름한 그 맛은 어떤 음식과도 바꿀 수 없는 밥도둑 그 자체였다. 목젖을 축이며 시원하게 내려가는 맛은 삶의 시름을 식혀줬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가을걷이를 할 무렵, 엄마는 어김없이 콩 타작을 해놓고 메주를 쒔다. 한 두어 됫박의 메주를 따로 떠 시루에 앉혀 따뜻한 아랫목에 일주일간 두꺼운 이불을 덮어 띄우면 구수한 청국장이 됐다.


“언니, 화롯불에 청국장 끓여놓고 늦게 퇴근하는 나를 기다려준 엄마를 아직도 못 잊어. 엄마 청국장은 왜 그렇게 맛있는지.”


엄마는 오직 김치와 청국장만 넣어 찌개를 끓였다. 화롯불에 양은냄비를 올려놓고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집에 와 화롯불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을 한 입 떠서 보리밥이랑 먹었는데 그게 얼마나 구수하고 맛있는지. 근데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불러서 엄마한테 미안했다. 겨울에는 세숫대야 하나로 온 가족이 돌아가며 세수를 할 만큼 물이 귀하고 가난했으니까.


“청국장은 겨울 식량이었잖아. 밥이 다 없어질 때까지 화롯불에서 청국장이 끓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엄마의 사랑이야. 찌개가 식을까 봐 불을 모아가면서 나를 기다린 엄마….”


엄마가 떠나면서 엄마가 쓰던 간장과 된장, 고추장 항아리도 같이 치워졌다. 엄마가 50년 동안 묵혔던 씨간장은 육 남매가 나눠 가져 갔다. 보석처럼 정제된 소금을 햇빛에 잘 말려 프라이팬에 수분을 말리고 절구에 곱게 빻았다. 김을 살짝 구워서 곱게 빻은 소금에 들기름을 넣어 재워먹으면 엄마 맛이 났다. 정성껏 잘라서 그 김에 흰쌀밥을 싸서 들꽃 같은 손주들 입에 넣어주면 내 손에서 우리 엄마 향이 났다. 평생 자식새끼들 입에 손이 닳도록 먹였던 엄마의 손. 엄마가 그리워 나물을 캤는데 그 시간이 쌓여 내 손톱 끝에 풀물이 들었을까.

4살 된 손주의 함박웃음 입가에 씨간장이 묻었다. 50년 동안 이어져온 내 엄마의 사랑이 묻은 소금. 이 소금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리.  



글 보나

일러스트 이유리



작가의 이전글 “여기까지만 나의 가족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