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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밖 Jul 05. 2020

견딜 수 있는 시간들

목적 없이 탄 2000번 버스

2층 버스가 타고 싶다던 4살 서진이를 위해 40살 아빠와 39살 엄마, 7살 형이 함께 집 가까이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아침, 점심 두 끼를 먹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어찌나 잘 가는지, 고대하던 2층 버스를 타러 나온 시간은 유감스럽게도 낮잠 시간과 맞물렸다. 유모차에 앉은 서진이는 2층 버스가 언제 오나, 한참을 기다리는데 눈이 자꾸 감긴다. 통통한 팔목에는 형의 공룡 시계가 채워져 있고, 코를 덮는 마스크 안 입 속에는 울금 엿을 오물오물.


결혼이란 걸 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결은. 내가 소유하고 소비해온 삶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성과 중심적이고, 효율 중심적이고, 경제적이고, 의미 있어야 하는 자본주의의 산물과 맞닿은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 반대의 삶으로 넘어온 느낌이다. 잠을 자는 것조차 의미 있어야 했던 젊은 날의 습성을 모조리 빼앗겼다고 해야 할까. 지금은 비록 ‘한 줌의 잠이라도 잘 수 있다면’으로 바뀌었지만,


하루 종일 놀아놓고선, (하루 종일 난 너희들을 위해 살았는데) 한 시간도 논 적 없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계속 내가 내일 출근해서 해야 할 일을 떠올린다. 지금 여기에도, 내일 거기에도 있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다시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현대병에 걸린 나를 아이들이 치유해주고 있음을 느낀다. 놀이터 한 구석에 앉아 내일 일을 걱정하는 엄마를 모래 놀이터로 잡아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시간을 내려놓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허무의 순간이라 이름 붙이며 살아왔다. 내가 아닌, 타인을 끌어안고 보듬고, 심지어 너와 같은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일에서 내가 확장되고, 늘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나로밖에 살지 못해 나 밖에 담지 못하는 그릇이 될 때 그것보다 허무한 일이 있을까?  아이들은 매 순간- 저 건너 저편의 것을 알려준다.


2층 버스 타고 싶다고 했잖아. 근데 자면 어떡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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