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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밖 May 29. 2024

바나나 우유와 고무줄 바지


지운이 엄마는 흰 먼지가 붙은 고무줄 바지를 입고,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봄 햇살이 손톱에 부딪히자, 오늘 아침에 막 손톱 위에 바르고 나온 매니큐어의 봉숭아 빛이 반짝거린다. 탑코트를 바를 걸 그랬나. 그래도 지운이 엄마는 반짝거림이 만족스럽다. 색이 주는 향연이랄까, 위안이랄까. ‘내가 매니큐어를 포기 못하는 이유지...’ 하며, 바나나 우유를 쭉 들이켰다. 바나나 우유를 감싸고 있는 손가락이 만족스러워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온다. 


지운이 엄마 경선씨는 아파트 상가로 곧장 향했다. 부동산이 즐비한 상가마다 월세와 매매, 전세 정보들이 가득하다. A4용지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흐트러짐 없이 붙여져 있다. 24평에 20억 원을 호가하는 이 동네는 서울 강남구의 대치동. 부산과 대구에서도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면 월세를 얻어 산다는 한국의 사교육 1번지다. 부동산 앞에는 아기자기한 다육식물들이 저마다 볕을 쬐이고 있다. 변기에 심어 놓은 식물 화분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머문다. 상식적인 것을 뒤집는 창의성은 이렇게 길 가는 사람도 잠시 멈춰 서서 웃게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머문다. 경선씨는 몽땅 부동산, 24시 부동산, 신세계 부동산을 지난다. 


“당근!”


바나나 우유를 다 마시고, 빈 통을 버릴 곳을 찾고 있는데 휴대전화에서 당근 알림이 울렸다. 경선씨는 무표정으로 당근앱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기요, 오늘 제가 오후 4시에는 시간이 안 될 거 같은데요. 혹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오전은 어떠신가요? 그때는 남편이 있어서 제가 외출이 가능합니다. 빨간 우산 쓰고 나갈게요.”

경선씨는 당근마켓에 몽클레어 바람막이 잠바가 8만 7000원에 올라왔길래, 얼른 거래를 잡았다. 당근마켓에도 아이들 명품 옷이 종종 올라오곤 하는데, 가격이나 옷 상태가 괜찮다 싶으면 경쟁이 붙기 마련이다. 지난달에는 거의 새 상품 상태로 폴로 경량잠바가 올라왔는데 늦게 확인한 바람에 경쟁에 밀려, 5000원을 더 주겠다고 하니 예약자를 경선씨로 바꿔줬다. 결국 경쟁자들을 제치고 아이의 봄 잠바를 얻어내니, 엄마로서 손톱만 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당근마켓에 올라오는 중고품들은 대부분 가격제안 불가이지만, 더 올려 받는 가격제안을 마다할 사람은 없기에. 


몽클레어 바람막이 잠바가 올라온 곳은 영등포구 신림동. 이곳 대치동에서 가기에 교통편이 썩 좋지는 않으나, 환절기에 지운이의 바람막이 잠바가 필요해 구매를 결정했다. 

경선씨는 영등포구 신길동에 오래 살았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다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왔다. 당시 서울 영등포구는 서울 같지가 않았다. 지방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살다 온 경선씨에게 큰 이질감을 줄 만한 곳은 못 되었다. 도로가 넓고, 매연이 많고, 무거운 짐을 들고 영등포역을 오가는 나이 든 사람들과 군인들이 많은 느낌, 그 정도였다. 전학 온 학교도 영등포역과 가까웠는데 학교를 가려면 기차가 달리는 기찻길 위 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 밑에는 5, 6학년 오빠와 언니들이 담배를 피우는데 그중 몇몇은 아이들 돈을 삥 뜯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경선씨는 소문으로만 듣던 질 안 좋은 언니와 오빠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꼭 만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 다리 위를 건널 때마다 걸음이 빨라졌다. 


경선씨는 스스로 자신을 촌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촌년이라는 말은 촌을 벗어난 이들이 촌에 사는 사람을 향해서 쓰는 말이었기에, 경선씨도 촌을 떠나고 나서야 그 말을 처음 들었다. 그것도 명절에 만난 수원에 사는 고모로부터. 고모는 사업이 망해서 컨테이너로 된 집에서 살았는데, 진주에서 살다 올라온 조카를 보고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촌년! 얼른 촌년티를 벗어야지.”

촌년과 촌년티의 의미를 잘 몰랐던 초등학교 4학년 경선이는 그저 무표정하게 그 말을 들었다. 단지 자주 만나지 않아 친근감이 전혀 없던 고모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던 기억만 남았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으므로 그런 말들의 뜻을 눈치 빠르게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전학 온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용모검사라는 걸 했다. 턱이 주걱처럼 튀어나온 목소리 얇고 서울말 쓰는 담임 선생님은 대뜸 “이번 주에 목욕 안 한 사람 손 들어.”라고 말했다. 용모 검사라는 것이 특별할 게 없었다. 선생님은 긴 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두 손을 가지런히 펴서 손톱을 깎았는지를 검사했다. 손톱에 때가 꼈거나 길면 어김없이 회초리가 손등을 내리쳤다.  


경선 씨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진주에서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머리카락에서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주에서 살 때는 이가 있는 줄 모르고 살았는데,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 머리카락에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서 옮아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 당시만 해도 이, 석케 같은 충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경선씨 엄마는 서울에 오자마자 큰 이모의 가게 일을 도와주러 동대문시장에 단체복을 팔러 갔고, 그때마다 경기도 안성에 사는 외할머니가 경선씨와 경선씨 동생을 돌봐주러 서울 집에 올라왔다.

“할머니, 나 머리에 이랑 석케가 있는데, 오늘 학교에서 검사했어. 할머니, 이 잘 죽여? 완벽하게 다 죽여줄 수 있어?”   

집에는 ‘참빗’이라는 게 있었다. 이 빗이 언제 어떻게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랫동안 머리카락에 있는 이를 잡아왔다는 증거물이었다. 

“할머니랑 오늘 목욕탕에 가자.”

“할머니, 목욕탕에 가서 씻으면 이가 다 없어져?” 

어린 경선씨는 재차 확인했고, 할머니는 외손녀를 다독이며 안심시켰다. 

할머니와 목욕탕에 갔다. 목욕 과정은 엄마랑 갈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머리를 감을 때 조금 더 아팠던 것만 빼면. 목욕탕에 다녀온 후 할머니는 난데없이 신문지를 바닥에 펼쳐놓고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라고 했다. 단발이었던 경선씨의 머리카락이 물구나무서기를 하듯 거꾸로 솟았다. 할머니는 참빗으로 머리카락을 샅샅이 빗어 내려갔다. 경선씨는 웃음이 쿡쿡 터져 나왔다. 할머니가 왼쪽 머리카락을 빗으면 이들이 오른쪽으로 냅다 기어가고, 오른쪽 머리카락을 빗으면 왼쪽으로 피하는 것 같이 머릿속이 번갈아가며 근질거렸다. 참빗을 피하지 못한 이들이 신문지 위로 툭툭 떨어졌고, 경선이는 더 이상 머리카락 안이 예전처럼 간지럽지 않았다. 그 후로 참빗은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했고, 찾을 일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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