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눈 마주친 아이에게 인사해 주세요

너무 소박해서 너무 의아한

by 계절 부자


네 살 아이를 키우는 여동생이 최근 공동육아 어린이집으로 옮겼다. 기존에 다니던 집 가까운 어린이집 선생님이 한몫을 했다. 아이가 많고 효율이 중요한 어린이집의 선생님이 응당 하게 되는 그런 말들이었는데, 동생이 거기에 크게 반응했고 조카는 뒷산이 있는 어린이집으로 옮겼다.


“언니, 여기 애들은 검정 옷을 많이 입고 바깥놀이 활동을 많이 해서 애들 얼굴이 탔어! 옷도 활동하기 편안한 옷으로만 입히고. 그전 어린이집 선생님은 옷도 예쁘게 입히라고 했거든. 애가 어린이집 들어갈 때 맨날 신발장 앞에 서서 애들 구두 구경하고 그랬잖아.”


동생이 보내온, 흙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말 그대로 흙에 누워 뒹굴고 있는 사진이었다. 조카의 표정은 한껏 즐거워 보였다. 고구마철에 종이 고구마를 캐지 않아도 되는, 뭔가 진짜 같은 삶이랄까.


동생은 어린이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런 문구가 있다고 했다.


“처음 눈 마주친 아이에게 인사해 주세요.”


내 새끼 찾느라 바쁜 부모의 눈이 저 문구를 읽으면 잠시 멈칫할 것 같았다. 너무 소박해서 오히려 의아하게 들리는 저 문구는 내 갇힌 세계관을 조금 열어주었다. 타인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같은 무게로 소중할 수는 없겠으나 최소한 그 공간에 함께 머무는 동안에는 친절한 타인이 되어줄 수 있지 않겠냐는. 내 아이만 찾는 여유 없는 일상에 들어오는 한 줌의 햇빛 같은 문장이었다.


우리 일상이 어차피 작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진다면, 내 자식이 아닌 다른 아이에게 전하는 따뜻한 눈빛 하나야말로 그 일상의 온도를 높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사실 시골에 와서 알게 된 건 또 있다. 아파트 생활이 익숙한 이들이 공동주택에서 살 때 몸에 밴 생활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골에 와서도 앞뒤 현관문을 꽉꽉 닫아놓고, 고층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는 거다.


우리가 처음 이곳으로 터전을 옮겼을 때, 아래층에 사는 남자아이가 내복 차림으로 놀러 와 둘째에게

“우리 개구리 잡으러 갈래?”

했을 때 나는 거의 환호할 뻔했다. 시간 약속도 없이, 그것도 내복 차림으로 와서 같이 놀자니. 누군가에게는 조금 불편하고 예의 없게 느껴지는 삶의 태도일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대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면 좀 의아하게 받아들여지는, 고도의 산업화가 일상에도 불어닥쳤으므로 나는 이런 투박하고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여 소통하는 일이 많이 그리웠나 보다.


챗지피티는 우리를 향해 항상 열려 있으므로 내가 원하기만 하면 원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몸이 있는 타인은 이제 더 이질적이고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전화보다도 카카오톡이 편한 시절에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일상 밖의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처음 눈 마주친 아이에게 인사해 주세요.”


이 문장으로 나는 아침마다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더 따뜻해지기로 결심했다. 부스스한 얼굴로 엄마 품에서 못 벗어나 다른 누군가에게 인사할 여유가 없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웃어주는 일의 위대함을, 나 혼자 조용히 깨달았다.


이곳 순창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블루베리를 키우고 식당 일을 하는 선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냉이 캐러 갈 건데 갈래요?”

“네! 너무 좋아요!”


그리고 나는 냉이 한 소쿠리를 넉넉히 캐왔다. 냉이도 잘 모르면서 냉이 캐러 온 거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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