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품격 필사(이용재 저)
형용모순의 국물과 조미료 논쟁, 맛내기의 멘탈리티
평양냉면의 육수도 만만치 않다. 정확하게는 ‘국물’이다. 육수와 국물은 다른 개념이다. 대개 전자가 후자의 바탕역할을 한다. 달리 말해 육수를 그냥 먹지 않는다. 뼈나 고기 등을 우린 바탕에 맛을 더해 국물이나 소스를 만든다. 영어에서도 둘을 구분한다. 각각 stock(육수)과 broth(국물)이다. 게다가 한식에서도 최종 완성된 음식을 국물이라 일컫는다. 육개장이든, 설렁탕이든 마찬가지다. 따라서 냉면도 ‘국물’이 맞다. 다만 뜨거운 국물과 사뭇 다르다. 그야말로 온도차가 크다. 뜨겁게, 정확하게는 따뜻하게 먹는 국물에 비해 한층 더 만들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젤라틴과 감칠맛 때문이다. 일반적인, 즉 높은 온도의 국물 음식을 생각해보자. 사골이나 도가니 같은 뼈나 연결 조직을 바탕으로 삼고 양지 등 기름기 적은 살코기로 표정을 불어넣는다. 아니면 갈비처럼 운동을 많이 하는 부위를 골라 뼈와 살을 한꺼번에 끓인다. 공통분무는 콜라겐이다. 콜라겐은 단백질의 일종으로 연골, 껍질 등 연결 조직에 많다. 우려낸 국물이 식으면 묵처럼 엉겨 붙는 경우가 있다. 콜라겐이 젤라틴으로 분해된 뒤 굳은 것인데, 국물 온도가 높으면 특유의 진득한 감촉을 준다. 주로 돼지 껍질, 광어 서더리, 닭발도 젤라틴의 원천이다. 젤라틴 없이 국물은 얄팍하고 심심해진다.
국물의 질감과 감촉에 영향을 미치는 젤라틴은 70도의 온도에서 콜라겐에서 젤라틴으로 분해된다. 하지만 냉면은 이름처럼 차갑게 먹는 음식이고 대개 10도를 훨씬 밑돈다. 젤라틴과 더불어 국물에 두터움을 입히는 지방 또한 포기해야 한다. 동물성 재료를 우리지만 진하거나 무겁거나 영겨 붙어서는 안 된다. 맑고 가벼운 고기국물이라니, 형용모순에 가깝다. 동물성 재료를 우려내는 통상적 목적인 두터움과 진득함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다. 좋게 말해 맑고 가볍지, 얄팍하다는 의미다. 굳이 고기를 우려 이런 국물을 얻어야 할까.
북한에선 평양냉면에 쓰는 고기 국물을 ‘맹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소의 뼈와 힘줄, 허파, 콩팥, 천엽 등의 내장을 고는데 국물이 너무 맑기 때문이다. 결국 동치미 국물로 맛이나 깊이를 보충한다.
다시 말해 고기 국물만으로는 쉽지 않고, 무엇인가 보태야 한다. 하지만 동치미를 늘 담가 쓸 수는 없다. 좀 더 현대적인 수단도 존재할 법이다. 갈등의 틈새를 조미료가 파고든다. 흔히 MSG라 일컫는 화학조미료 일체와 뉴슈가(사카린5%+포도당95%) 등 설탕(자당) 외의 감리료다. 전자는 두께를, 후자는 여운을 보강한다. 재료와 온도의 바탕에 두 조미료가 가세해 흔히 ‘닝닝함’이라 표현하는 평양냉면 국물 특유의 맛이 완성된다. 얄팍한 고기의 고소함 뒤로 감칠맛과 여운 긴 단맛이 뭉근하게 올라오는 국물이다.
조미료를 꼭 써야먄 할까. 존재만으로 반감을 품을 수 있다. 평양냉면은 흔치도 또 싸지도 않은 음식이다. 만인에게 공포의 대상인 접두어가 붙은 ‘화학조미료’다. 무해하다고 아무리 의학적 근거를 들이밀어도 여전히 두려워한다. 그런 이들에게 공덕동의 무삼면옥을 권한다. 조미료, 설탕, 색소의 세 가지를 쓰지 않는대서 무삼(無三)이다. 국물에 쓰인 삶은 표고버섯 고맹이 무삼의 철학과 그 구현방식을 시사한다. 버섯은 글루탐산 함유량이 높아 감칠맛의 대표 재료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학적 공정(정확하게는 발효)을 거쳐 농축한 감칠맛에 비하면 훨씬 미약하다. 심리적 요소는 맛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무삼면옥의 냉면 국물도 비슷하다. 조미료를 안 썼다니 타락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맛보리라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마무런 맛이 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맹물’같다. 먹는 내내 조미료 생각을지울 수 없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썼더라면 훨씬 맛있지 않을까?
조미료와 감미료를 지나치게 쓰는 몇몇 평양냉면집보다, 아예 의도적으로 배제하려는 무삼면옥이 가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미료를 잘 쓴 국물에 비하면 음식으로서 완성도는 떨어진다. 철학이나 시도가 결과를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
화학조미료를 향한 반감, 맛의 결벽주의를 시험하기 위한 리스터스지, 조미료의 완벽한 부재를 선호한다면, 그로 인한 맛의 부재 또한 감당할 수 있을까? 제대로 쓰는, 맹목적으로의지하지 않는 경우라면 조미료의 존재는 의식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선택지는 ‘맹물’밖에 남지 않는다.
가성비와 서민음식 논란
약하디 약한 메밀을 때론 음식점에서 직접 즉석 제분해, 주문과 동시에 면을 뽑아낸다. 그리고 차와포를 뗀, 그래서 운신의 폭이 좁은 형용모순적 맑은 고개 국물에 말아낸다 한마디로 평양냉면은 기술적이고 어려운 음식이다. 또한 양도 많다. 평양냉면 전문점에서는 대개 200~250g의 면을 낸다. 피자 한 판의 반죽(도우)과 비슷한 양이다. 성인이 포만감을 느낄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좋아하는 정서적 인증 장치까지 추가로 따라붙는다. 족보로 상징되는 정통성과 그에 딸려 오는 스토리텔링이다. 이북과 연관이 있어야 진짜 평양냉면이라 여긴다. 실향민이나 탈북자를 믿고, 대물림의 미덕도 높이 산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정서적 인증 장치다.
이런 평양냉면이 매 여름마다 매체에 두들겨 맞는다. 비싸단다. 냉면을 가제로 서민 음식이라 분류하고는, 만 원이 넘어가니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어 문제란다. 한국적 음식과 제반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형적 또는 추상적인 요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맛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비단 평양냉면만 당하지 않는다. 웬만한 음식이라면 한 번씩은 겪어보았다 외국 태생음식으로는 커피가 단골손님이다. 네 자릿수 가격으로 팔리는 커피지만 원두 단가는 고작 두 자릿수라는 내용의 기사가 흔하다.
‘외식비(또는 음식값)=재료비’라는 단순한 등식에 욱여넣고 선정적으로 단언한다. ‘보통 재료비가 음식값의 30%를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음식 한 그릇을 포함한 식사라는 총체적 경험을 완성하는 데 나머지 70%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의미지, 재료가 음식값의 고작 30%를 차지하므로 더 싸게 팔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한편 소비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부화뇌동해 화답한다. ‘가성비’, 즉 가격 대비 성능비를 음식의 유일한 미덕으로 여긴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 ‘싸고 양 많은 음식’을 뜻한다. 이런 음식을 두고 ‘착하다’고 말한다. 착하다는 형용사가 오남용되다 못해 악해졌다. 착한 건 이제 악이다.
음식의 가격은 재료 비용의 총합일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여러 유, 무형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사회 간접자본, 즉 가스나 전기 사용료로부터 우리나라, 특히 서울의 너무나도 막대한 부동산 비용도 있다. 임대료 말이다. 집기 등은 물론 서비스 같은 항목까지 아울러야 한 잔의 가격을 산출할 수 있다.
물론 맛내기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단순하게 보면 기술 같지만 그보다 더 넓고 더 추상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능력이다. 메밀 가루에 물을 더 해 반죽하고 고기를 찬물에 담가 화로에 올려놓은 등의 기본적인 작업에, 음식이 최소한의 형식과 얼개를 갖추도록 만드는 이의 역량이 더해진다. 완성도와 취향의 이분법에서 전자에 속하는 영역이다. 육수의 간을 봐 양념을 조정하거나, 계절이나 온습도에 따라 면 반죽의 물이나 가루 비율을 조절하는 능력이다. 습관적, 물리적, 기계적이라기보다 감각적이고, 종종 매뉴얼화가 쉽지 않은 추상적 영역이다. 단가 위주의 음식 관련 기사는 이 모두를 깡그리 무시한다. 맛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음식을 논한다. 음식값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식의 특성상 제대로 된 접객은 아예 헤아리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서민 음식의 정의 또한 마찬가지다. 싸면 무조건 서민음식인가?
물론 가격을 활용한 서민 음식의 범주를 정당화할 수는 있다. 경제적 여건에 무리를 주지 않는 것을 긍정적이라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면의 특징을 감안하면 냉면이 서민 음식에 포함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물론 ‘서민 음식’은 뒤집어보면 위험한 발상이다. 건드려선 안 될 음식이라 족쇄를 채우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족쇄는 가격이다. 부주가 가격을 강제해 질 추구와 다양성의 기회를 막는다. 냉면을 비롯한 칼국수와 순대와 만두, 짜장면 같은 음식은 언제나 싸야만 한다. 별 이유 엇다. 서민 음식이니까. 음식의 가격과 수준, 그에 대한 기대를 설정하는 논리가 완전히 뒤집혔다. 5000원짜리 짜장면이 존재한다면 2만원짜리 짜장면도있을 수있다. 또 그 두 지점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시도가 짜장면의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가격에 따라 음식의 수준은 어떻게 달라질까? 고급 재료를 쓸 수도, 비싼 그릇에 낼 수도 있다. 짜장면의 원조라는 작장면의 명인을 중국에서 초빙해 새로운 맛을 선보일 수도 있다. 바로 음식 문화의 다양성이다. 하지만 서민 음식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이런 수직적 움직임을 막는다. 모든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다. 굳이 짜장면의 예를 들었지만 냉면, 평양냉면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족쇄는 역시 정서다. ‘어머니의 손맛’과 거의 마찬가지인 정서적인 위상을 차지하므로 ‘서민 음식’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다수의 선택에 손가락을 들이대 분노를 사봐야 좋을 게 없긴 하다. 하지만 오히려 서민 음식에 변화가 더 필요하다. 가격의 족쇄에 묶여 오르는 물가에도 가격을 올리지 못해 상대적으로 질이 나빠지거나, 전통이라 믿는 습관 때문에 구태르 ㄹ되풀이하며 개선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비단 짜장면뿐 아니라 한국식 중식 전체가 서민 음식이라는 개념의 희생양이다. 서민 음식의 범주에서 싸게 배 채우는 음식으로 인식되면서 짬뽕이나 짜장 모두 미리 끓여놓는, 생기 잃은 음식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비판하면 다수의 먹을거리에 손가락질을 한다고 더 큰 비난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