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 아이리스 -> 폴 게티 -> 리처드 마이어 -> 게티센터
1.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
많은 뛰어난? 예술가가 그렇겠지만 살아생전에 그 가치를 인정받기보다는 사후에 그의 작품들이 높게 인정받기 마련이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일부 투자자들은 나이 든 현존하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사 모으기도 한다. 살아생전에 작품으로 부와 명성을 모두 갖은 예술가라면 피카소를 빼놓을 수 없다. 반면에 고흐는 그와 너무나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살아생전에 너무 어렵게 지냈고 그의 작품을 알아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실 많다는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1년에 150점도 그렸다고 하니 다 작은 다 작인 듯하다. 이는 피카소와 비슷하지만 피카소는 그 살아생전에 그의 작품을 인정받아 부유한 삶을 살았다. 그나마 미술 상이던 동생 테오가 그의 작품을 알아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테오도 후에 고흐의 작품이 이토록 높게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본디 목사가 되기 위했으나 신학교에 떨어지고 전도사 사역을 위해 교육을 받았으나 이도 변변치 못했다. 어쩌면 그의 고집스럽고 불같은 성격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는 이러한 실패를 통해 화가의 길로 방향을 새로 잡았고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반대급부로 종교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고 목사였던 아버지 하고도 많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과격한 성격은 어딜가지 못했고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부적응자로 인식되었다. 그 예로 고흐는 매춘부 출신인 크리스틴과 동거를 하였는데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에 매독 환자였다. 모두가 그녀와 헤어지라 했고 끝내 헤어졌지만 순수한? 고흐는 이에 대해 큰 양심을 가책을 받고 고통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아픔은 예술로 승화되기 마련인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이 이어진다.
이후 인상파와 일본의 판화를 접합으로서 그리고 대도시 파리를 떠나 태양이 풍부한 아를로 이주한 다음 예술을 꽃을 피운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갱과 함께 지내였으나 역시나 그의 성격으로 인해 고갱과 헤어지고 그 여파로 정신발작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 사건이 고갱과 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것이다(물론 이에 대한 여러 설이 있고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고갱과의 불화설이다). 사실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리 알려져 있으니 그렇다고 안다. 이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그의 성격이 독선적이고 고집적이고 외골수에 불 같은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 인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이기에 이러한 작품에 몰두하고 이러한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하튼 이러한 그의 행태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이때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많은 정물을 그렸는데 이때 그려진 작품 중에 하나가 바로 ‘아이리스’다.
2. 고흐의 ‘아이리스'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예술품에 적정 가격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1987년 소더비 경매에서 그의 작품이 호주의 사업가이자 컬렉터인 앨런 본드 Alan Bond 5,39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의 돈의 가치로 환산하면 1,300억 정도라고 한다. 앨런 본드는 호주 사업가로 처음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이후 맥주 등 여러 사업을 통하여 큰 부를 이루게 된다. 아이리스를 구매한 동일 연도인 1987년에 1B 달러를 들여 호주 방송사도 인수하게 된다. 하지만 끝내 아이리스는 소유하지 못하게 되고 1990년에 미국의 게티 미술관이 매입하게 된다. 여하튼 이후 앨런은 1992년 부도를 맞고 사기 협의로 7년 형을 받기도 한다. 여하튼 앨런도 끝이 좋은 사나이는 아니다.
범인이 보기에는 1,000억 이상이면 서울에서 괜찮은 빌딩을 하고 대대손손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돈인데 이를 예술품에 투자하는 것을 보면 게티나 앨런이나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듯하다. 그런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그런 훌륭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가로세로 1미터도 안 되는 그림에 1,000억 이상의 가치를 지불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쉽게 이해는 가지 않는다. 정말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에 가치를 메긴 것인지 또는 이 또한 부유층의 투자 수단인지 잘 모르겠다. Priceless 즉 ‘값이 없다.’라는 단어가 very very expensive와 유사하게 쓰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매우 주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하지만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파는 쪽과 사는 쪽이 합의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관적 평가는 거래를 통해서 객관화가 되는 것 일터인데 역시나 이해가 되는 영역은 아닌 듯하다.
3. 폴 게티(Jean Paul Getty, 1892 - 1976)
“부자가 되려면 매일 아침 일어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십시오. 그리고 돈 버는 사업 아이템을 찾으십시오.” 미국 아니 세계 최초로 빌리언에어가 되고 죽을 때까지 부자 세계 랭킹 1위를 고수한 이의 어록 치고는 너무 뻔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회사에서도 주야장천 기획만 하는 조직(대기업)과 일단 실행을 하는 조직(스타트업)의 차이는 요즘과 같은 현대 기업들을 보고 있노라면 반세기 전에 죽었던 폴 게티의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폴 게티는 세계 최고의 부자로도 알려져 있지만 또한 구두쇠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실화가 바로 손자의 납치 사건인데, 당시 워낙 화제가 되었던 사건으로 이를 배경으로 2017년에 ‘All the money’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화에 따르면(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했겠지만) 폴 게티는 5명의 아내가 있었고 이를 통해 총 19명의 손자가 있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이탈리아 마피아로부터 납치가 됐고 그 마피아는 당시 1,700만 달러를 요구한다. 하지만 게티는 인터뷰에서 그 마피아에서 단돈 1원 한 푼 줄 수 없다고 한다. 영화상의 표현은 ‘Nothing’이다. 물론 그 이유는 마피아에게 돈을 지불하면 나머지 18명의 손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해가 되고 역시나 세계 최고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싶었으나, 영화상에서는 그러한 이유보다는 돈에 대한 집착으로 그 비용을 지불치 않은 것으로 그려지며, 끝내 손자의 잘린 귀가 배달되고 나서야 돈을 지불하게 되며 그 비용 또한 마약에 쩔은 아들에게 빌려주는 조건으로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손자나 가족에게는 그렇게 인색하게 굴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술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수많은 작품들 사서 모았으며, 이 또한 역시 절세를 위해 신탁 방식으로 매입하게 되어 사후 가족들에게 상속이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그가 소장한 많은 작품들을 무료에 가깝게 감상할 수 있다. 그는 살아생전에 게티 혈통을 잇는 게티 왕조를 꿈꿨지만 자식 교육에 실패하여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영화상에서는 그가 죽을 때 그가 매입한 그림 한 점을 안고 쓸쓸하게 죽어간다. 그리고 그의 죽음 또한 그림에 설치된 보안 벨이 울려 알려지게 된다. 5번의 결혼 끝에 많은 자식과 손자들을 두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의 곁을 지키지 못했고 수족같이 부리던 비서 또한 그가 죽을 때 그의 곁에는 없었다.
4. 리처드 마이어
아직 현존하는 작가이다. 건축상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프리츠커 상을 받았고 흰색을 건축물에 많이 사용한다고 하여 ‘백색의 건축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대표적인 작품으로 LA 게티센터와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네덜란드 헤이그 시청 등이 있다고는 하나 개인적으로는 한국 강릉에 있는 씨마크 호텔을 디자인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씨마크 호텔은 고 정주영 회장이 아끼던 경포대 현대호텔을 재건축한 것으로 현재는 현대중공업 소유로 되어 있다. 한참 조선업이 어려울 때 블라디보스토크와 울산 등 여러 현대 호텔들을 PE인 한앤컴퍼니에 패키지로 매각할 때도 경포대 호텔 즉 씨마크 호텔의 소유권만은 넘기지 않을 정도로 그 호텔에 대한 현대가의 애착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정도로 애착을 갖는 건물이기에 설계사를 선정할 때 돈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경쟁력 있는 건축가들을 검토했을 것이고, 그 결과로 마지막에 선정된 이가 바로 리처드 마이어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을 직접 가본 것이 게티센터랑 씨마크호텔에 불과하지만 하드웨어상으로 봤을 때 깔끔한 돈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게 만든 건축물이라고 생각된다. 딱 봐도 시쳇말로 돈을 처발처발해서 만든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씨마크 호텔이 오픈되고 마케팅으로 사용한 단어가 바로 7성급 호텔이라는 것이다. 물론 7성급 호텔은 한국 호텔 등급체계에는 있지 않은 용어이다. 돈을 그만큼 들였기에 비싼 값으로 영업하여 높은 수익을 얻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실상은 적자 사업장에 그나마 계열사 지원을 통해 연명하는 호텔로 알고 있다. 물론 그 호텔이 있음으로 해서 경포대가 업그레이드되고 평창 올림픽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귀빈을 맞는 장소로 활용되어 국위선양? 의 효과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업적 마인드로 보기에는 올바른 투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현대가에서 본 건물을 신축할 때는 경제적 손익뿐 아니라 부차적인 효과도 충분히 고려됐을 것이고 그때 따라 설계사와 비용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결정만이 작품?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도 삼성을 비롯한 국내 재벌가는 어마어마한 돈을 예술품 수집에 쓰고 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보면 재벌가 여성의 놀이터로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 아니냐 라는 비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재벌이 있기에 국내의 문화재가 국외로 반출되는 것을 막고 또한 해외의 유명 작품들을 국내에서 공유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건축물을 그 실질적 용도에서 벗어나 하나의 공유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할 때 이에 대해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은 꼭 비판적으로 볼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덧. 최근 강릉시에서 강릉에 미술관을 짓는데 리처드마이어에게 설계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제 그의 나이가 87세에 다 달았다. 이제 그만 그를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아직도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라는 우상에 기댈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든이 넘은 노인이 국내 정치판에 재소환되어 여러 논쟁을 일으리키는 것을 볼 때 노욕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새로운 정치인을 발굴할 필요가 있듯이 건축도 만찬 가지가 아닐까 싶다. 유명한 건축가가 있기 전에 이를 알아보는 똑똑한 발주처가 우선이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