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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호텔

호텔로 읽는 대한민국 권력의 역사

by 길준

서론 (Prologue): 권력은 호텔에 머문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결정들은 푸른 기와집, 청와대에서만 내려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서울 도심의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때로는 은밀한 커피숍에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해방 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호텔은 최고 권력자들의 임시 집무실이자, 막후 협상의 무대였으며, 때로는 권력의 흥망성쇠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대통령과 호텔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대한민국 권력의 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1부: 건국의 무대, 조선호텔과 반도호텔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이승만 박사의 첫 행선지는 경무대가 아닌 소공동 조선호텔이었다. 당시 서울 최고의 서양식 시설을 갖춰 미군정의 총애를 받던 이곳은 그의 귀국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호텔 3층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그는 미군정 최고 실세 존 R. 하지 중장은 물론, 김구, 김규식 등 국내 유력 정치인들을 잇달아 만나며 빠르게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 받은 검은색 캐딜락 플리트우드 세단을 타고 조선호텔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구름같이 모여든 인파에게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이기붕에게 권력의 심장은 반도호텔(現 롯데호텔 서울)이었다. 특히 그가 개인 집무실처럼 사용한 '809호'는 자유당 정권의 '소(小) 경무대'로 불렸다. 3.15 부정선거와 같은 정권의 명운을 건 계획들이 바로 이 밀실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공식적인 회의록은 중앙청에 남았지만, 진짜 역사는 반도호텔 809호실에서 쓰이고 있었다. 이 '호텔 정치'의 심장부는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성과 함께 멈춰 섰다. 박정희 소장이 이끈 쿠데타 세력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총리 장면이 머물던 반도호텔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급습 소식에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맨발로 담을 넘은 장면 총리의 일화는, 한 시대의 허망한 종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2부: 개발 시대의 상징, 워커힐과 타워호텔


박정희 시대의 호텔은 '국가 발전'이라는 목표 아래 세워진 거대한 기념비였다. 그는 주한미군들이 휴가 때마다 막대한 달러를 들고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우리 땅에 그들을 위한 위락단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워커힐 호텔이다. 이곳은 단순한 휴양지를 넘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의 무대가 되었고, 파격적인 무대 공연 '워커힐 쇼'는 당시 한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호텔 자체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 산업이자, 외교의 도구였던 셈이다.


1967년, 독특한 원통형 외관으로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타워호텔(現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개관식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공화당 의장 등 '3 공화국'의 실세들은 이곳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유신 헌법과 같은 중대사를 논했다. 이 시대의 호텔은 권력자들의 사교 공간이자,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이 선포되는 국가 프로젝트의 전초기지였다.


3부: 격동의 시대, 신군부와 문민정부의 '호텔 정치'


민주화의 격동기에도 호텔은 권력의 비밀스러운 산실이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서울플라자호텔(現 더 플라자 호텔)에 사실상의 본부를 차리고 민주정의당 창당 작업을 진행했다. 군복을 막 벗은 이들이 호텔방에 모여 국가의 미래를 재단하던 이곳의 풍경은, 군부 권위주의 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영삼(YS) 정부 시절, '소통령'이라 불린 아들 김현철은 롯데호텔 신관 3264호 스위트룸을 개인 사무실처럼 사용했다. 하룻밤 숙박비가 93만 원에 달했던 이 방을 'YS와 신격호 회장의 친분'을 명분으로 거의 무료로 사용하며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은 '문민정부'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남겼다. 한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 관장이 워커힐 호텔을 소유한 SK가(家)와 혼인한 것은, 정치권력과 재벌 자본이 호텔을 매개로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부: 현대의 풍경, 변화하는 권력의 공간


21세기에 들어서며 호텔의 역할은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변모했다.

김대중 (DJ):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서울 힐튼호텔의 한 객실에서 이뤄진 '담판'에서 시작됐다. 김대중과 김종필(JP) 후보는 이곳에서 단일화라는 극적인 합의를 이뤄내며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노무현: 권위주의 타파를 내세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의도적으로 '호텔 정치'와 거리를 뒀다. 그의 주요 정치적 순간들은 호텔의 밀실이 아닌, 광화문 광장이나 청와대 녹지원처럼 대중과 직접 호흡하는 열린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이명박 (MB): 당선인 시절, 그는 롯데호텔 31층을 집무실로 삼아 '소(小) 청와대'를 꾸렸다. 그의 최측근 그룹 '6인회'가 이곳에 모여 차기 정부의 밑그림을 그렸고, 기자들은 내각 인선 특종을 위해 호텔 로비를 밤낮으로 지켰다. CEO 출신 대통령다운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호텔 활용법이었다.


박근혜: 그의 '호텔 사랑'은 '불통'과 '폐쇄'의 상징으로 남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 1년간 리츠칼튼 호텔 등지를 109회나 이용하며 가진 비공개 회동은 "밀실 정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특히 영국 순방 중 호텔 변기 교체를 요구했다는 일화는 '변기 공주'라는 조롱 섞인 별명과 함께, 그의 권위적이고 대중과 괴리된 소통 방식을 드러내는 사례가 되었다.


문재인: 문재인 정부에서 호텔은 국내 정치 무대보다 국제 외교 무대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각국 정상급 인사들을 호텔과 리조트에 초청해 만찬을 열며 '소프트 외교'를 펼친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의 밀실 정치와는 다른, 투명한 의전과 소통의 공간으로 호텔을 활용했다.


윤석열: 용산 시대를 연 윤석열 대통령에게 호텔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청와대 영빈관이 사라지면서, 신라호텔 영빈관이 국빈 만찬 등 최고 수준의 국가 행사를 치르는 핵심 장소로 떠올랐다. 취임식 만찬을 시작으로,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의 회동이 호텔에서 열리며, 호텔은 이제 '바깥의 청와대'를 넘어 '공식적인 국정 무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결론 (Epilogue): 호텔의 샹들리에, 역사를 알고 있다


해방기의 베이스캠프에서 개발 시대의 상징으로, 막후 정치의 밀실을 거쳐 현대 외교의 무대에 이르기까지 호텔은 한국 정치의 가장 내밀한 순간들을 묵묵히 지켜봐 왔다.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모습은 변했지만, 호텔이 여전히 권력의 중요한 공간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호텔의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대한민국의 가장 솔직한 역사가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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