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빛과 제국의 그림자
일본의 1만 엔 지폐 속 인물, 근대 일본을 설계한 최고의 지성. 그러나 우리에게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라는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조선의 개화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 그는 왜 한 세기가 넘도록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지식인’으로 남아 있었을까? 그가 남긴 사상의 빛과 그림자를 추적하는 것은 100여 년 전 과거를 넘어, 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봉건적 신분제가 공고하던 시대에 하급 무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승려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삶은 다른 길로 향했습니다. 엄격한 문벌제도 속에서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그는, 19세에 봉건 질서를 탈피하고자 서양의 학문인 ‘난학(蘭學)’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서양 방문 경험은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도 영향을 준 『서양사정』을 비롯해 , 『학문의 권유』, 『문명론지개략』 등 그의 저서들은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되며 일본 사회에 ‘문명개화’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대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창간하는 등, 명실상부 메이지 시대 일본 개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후쿠자와 사상의 출발점은 ‘천부인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의 권유』 서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며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냉철하게 보았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무지하다면, 정부의 압제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명제, ‘한 몸의 독립이 한 나라의 독립(一身の獨立が 一國の獨立)’이 탄생합니다. 국민 개개인이 정신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국가의 평등도 없다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그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문학보다 인간 생활과 밀접한 ‘실학(實學)’을 우선시한 이유입니다.
그의 문명론은 더욱 체계적이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발전 단계를 ‘야만-반개-문명’의 3단계로 구분하고, 당시 일본을 서양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선 ‘반개’ 국가로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문명화의 가장 큰 장애물로 유교의 관념으로 인한 ‘권력의 편중’ 현상을 지목하며, 이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쿠자와의 사상은 바다 건너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조선의 개화파들은 일본을 모델로 삼아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고, ‘문명개화론’의 선두주자인 후쿠자와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조선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건너왔고, 신문 『한성순보』가 창간되었으며, 근대적 회사 설립과 도로 정비가 추진되었습니다.
그의 관여는 1884년 갑신정변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보수파를 몰아내고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정변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전제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 고통받는 인민을 위한 길이라는 ‘문명’의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꿈꾼 조선의 미래는 일본의 국익을 위한 ‘보호국화’였다는 점에서 그의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개화파 인사들이 무참히 처형당하자 후쿠자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조선관은 급격히 얼어붙었고, 조선을 ‘야만’의 나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5년, 그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탈아론(脫亞論)」이 발표됩니다. 아시아, 특히 청과 조선을 버리고 일본은 서양 제국과 길을 함께해야 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자의 생각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편입시키려는 침략의 논리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후쿠자와의 사상은 분명 이중적이고, 봉건의 질서를 깨고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외친 계몽의 선구자였지만, 그 논리를 타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제국주의의 비호자이기도 했다. 100여 년 전 한 지식인의 사상이 오늘날 일본 우익의 역사관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면서도 씁쓸합니다. 하지만 그를 제국주의자라고 비판만 하는 것으로 모든 논의를 끝낼 수는 없다. 서양에 맞서 한·중·일이 함께해야 한다는 그의 초창기 ‘아시아주의’는, 비록 변질되었지만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도 맥이 닿아있다는 평가도 있다. EU, ASEAN 등 지역공동체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오늘날에 , 100년 전 한 지식인의 고민이 동북아의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힌트를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