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씨마크 호텔과 LA 게티센터를 다녀와서...
프랑스 남부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 정원에서, 한 고독한 예술가가 절박한 심정으로 붓을 놀렸다. 그의 눈에 비친 보랏빛 아이리스는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혼돈에 빠진 정신을 붙잡으려는 필사적인 의지이자, 고통 속에서도 기어코 피워내고야 마는 생명의 찬란함이었다. 이 보랏빛 불꽃은 훗날 한 세기를 넘어, 태평양 건너 로스앤젤레스의 눈부신 언덕 위,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채에 영원히 안착하게 된다.
이 그림의 이름은 ‘아이리스(Irises)’.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이 그림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한 이는 석유왕 폴 게티다. 고독한 천재의 손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이, 세상 가장 부유했지만 역시 고독했던 한 남자의 손을 거쳐, 마침내 모두의 유산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예술과 자본,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 대한 거대한 서사를 들려준다.
살아생전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피카소와 달리,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지독한 가난과 몰이해로 점철되었다. 목사를 꿈꿨으나 좌절했고, 불같은 성정 탓에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했다. 유일한 이해자였던 동생 테오의 지원에 기대어 1년에 150점이 넘는 작품을 쏟아냈지만, 그의 뜨거운 열정을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의 예술이 만개한 것은 태양의 도시 아를에서였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폴 고갱과의 격렬한 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은 그의 위태로운 정신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아이리스’는 바로 그곳에서 탄생했다. 병적인 발작의 공포 속에서 그는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눈앞의 자연에 몰두했다. 그렇게 그려진 ‘아이리스’의 역동적인 붓 터치와 강렬한 색채에는, 광기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투쟁과 생에 대한 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약 100년 뒤, 이 절박한 아름다움을 자신의 왕국으로 들일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세계 최초의 억만장자이자 죽을 때까지 세계 최고 부자의 자리를 지킨 석유왕, 폴 게티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라"는 그의 성공 비결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는 그 평범함을 비범하게 실천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지만 그는 부의 크기만큼이나 지독한 구두쇠로도 악명이 높았다. 1973년, 이탈리아 마피아에게 손자가 납치되었을 때, 그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All the money'에서는 'Nothing'으로 표현된다. 다른 손주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영화는 그의 돈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여준다. 결국 손자의 잘린 귀가 배달되고 나서야 몸값을 지불했는데, 그마저도 아들에게 연 4%의 이자로 ‘빌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가족에게까지 이토록 인색했던 그가 유일하게 돈을 아끼지 않은 대상이 바로 예술품이었다. 그는 자신의 혈통을 잇는 ‘게티 왕조’를 꿈꿨지만 자식 농사에 실패했고, 어쩌면 영원히 변치 않는 예술품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는 쓸쓸한 말년을 자신이 수집한 수많은 걸작에 둘러싸여 보냈고, 죽는 순간 그의 곁을 지킨 것은 가족이 아닌, 그림 도난을 막기 위해 설치된 보안 경보기였다.
폴 게티가 남긴 막대한 유산과 예술품들은 그의 이름을 딴 거대한 미술관, ‘게티 센터’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경합했고, 최종적으로 선택된 인물은 ‘백색의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였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마이어는 눈부신 흰색과 빛을 활용하여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건축가다. 그는 LA 언덕 위에 이탈리아산 트래버틴 대리석으로 현대판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했다. 게티 센터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하나의 도시를 설계하는 것과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시쳇말로 ‘돈을 아끼지 않고 만든’ 이 건축물은, 그 자체로 폴 게티의 부와 야망을 상징하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이러한 막대한 투자는 사업적 관점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한국 강릉의 씨마크 호텔 역시, ‘7성급’이라는 마케팅 용어에 걸맞은 엄청난 건축비를 들였지만 운영 적자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물이 들어섬으로써 그 지역의 격이 높아지고, 중요한 국제 행사를 치르는 문화적 자산이 되는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폴 게티는 절세를 위해 신탁 방식으로 예술품을 매입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그의 위대한 컬렉션을 무료로 감상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재벌가의 예술품 수집이 때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막대한 자본이 있었기에 한 나라의 문화유산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세계적인 걸작들을 국내에서 향유할 기회가 생기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게티 센터의 심장부에는, 1987년 당시 최고가인 5,390만 달러에 낙찰되었던 고흐의 ‘아이리스’가 고요히 걸려 있다. 한때 호주의 사업가 앨런 본드의 손에 들어갔으나 그의 파산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던 이 그림은, 수많은 욕망의 손을 거쳐 마침내 영원한 안식처를 찾은 것이다.
정신병원의 한구석에서 고독한 천재가 피워낸 보랏빛 꽃. 이를 소유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했던 고독한 부호. 그리고 그의 유산을 담아낼 눈부신 백색의 성을 빚어낸 건축가.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아이리스’ 한 점을 통해 장대하게 이어진다. 결국, 한 인간의 지독한 고통과 또 다른 인간의 지독한 고독이 만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 모두를 위한 위대한 예술적 유산 '아이리스'를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