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호 Sep 06. 2018

칸트의 도덕적 신증명

(칸트의 인식론에서 윤리학까지)

칸트의 도덕적 신 증명

     

1. 들어가는 말

     

    근대를 시작하며 치열하게 다투었던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대립하는 이 두 가지 이론을 종합한 칸트는 그야말로 근대철학의 선구자이다. 칸트는 누구보다 이성을 가장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비판하는 동시에 누구보다 이성의 역할과 기능을 긍정했다. 칸트는 인간의 주체성을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성에 대해서 누구보다 면밀한 철학적 작업을 수행했다. 특별히 형이상학과 관련하여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주장하는 반면, 형이상학이 필요함을 도덕법칙과 관련하여 요청하였다. 칸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요소인 ‘신’, ‘자유’, ‘영혼불멸’은 합리적인 ‘공리’일 수는 없다. 하지만 합리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공준’으로서 자리매김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칸트의 신 증명을 중심으로 그의 ‘형이상학’을 살펴볼 것이다. 먼저 칸트의 제1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을 통하여 형이상학에 대한 사변적 이성의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며, 다음으로는 사변적 이성의 한계를 중심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신 증명의 방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과 칸트의 비판점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리형이상학 정초』와 『실천이성비판』의 내용을 중심으로 칸트의 도덕적 신 증명을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칸트의 도덕법칙에 대해서 먼저 살펴본 후 도덕법칙으로 인해 왜 신이 요청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 『순수이성비판』을 통한 칸트의 인식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이 어떤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질문한다. 칸트는 형이상학과 관련된 것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알았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에서 제시된 질문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칸트는 오성과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벗어나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는지에 관한 근본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그의 인식론을 전개한다. 즉 그는 감성을 넘어선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의 가능성을 검토한다. 칸트는 이를 위해 인간의 사변적 이성의 기능 전반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는 순수이성을 순수감성(직관), 순수지성(오성), 순수이성으로 세분화하여 그의 논리를 전개한다. 세분화된 요소들은 『순수이성비판』의 방법론인 초월론적 감성론, 초월론적 분석론, 초월론적 변증론에서 각각 핵심 개념을 이룬다.

   첫째로, 순수감성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칸트는 감성이 인식에서 지니는 역할 중 ‘공간’과 ‘시간’이 중요한 상관자라고 말한다. 감성이 인식에서 지니는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때, 감성에서 ‘감각’에 속하는 것을 제거한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 ‘순수 직관’이며, ‘순수 직관’은 “감성이 선험적으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즉, 순수감성은 현존재를 위한 선험적 조건으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이다.

   둘째로, 순수지성(순수오성)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모든 인식은 재료와 이 재료를 정리하는 형식을 요소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인식의 형식은 사고의 형식이며, 사고의 형식은 지성에 예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인식의 밑바탕에는 선험적인 사고의 형식이 놓여 있다. 이러한 사고의 형식을 예비하는 지성은 개념에 의한 인식능력, 즉 사유능력과 같으며, 판단의 능력으로 간주된다. 칸트는 순수지성의 인식의 형식을 범주로 소개한다.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따르지만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양(단일, 다수, 전체), 질(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관계(실체와 속성, 원인과 결과, 상호작용), 양태(가능과 불가능, 현존과 부재, 필연과 우연)로 구분한다. 칸트에 의하면 “지성은 오로지 이것들에 의거해서만 직관의 잡다에서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시 말해 직관의 한 객관을 사고할 수 있다.” 

   셋째로, 순수이성은 인간의 의식 활동에서 최상위에 위치하며, 바로 사고의 최고의 통일을 가져오는 능력이다. "규칙의 능력"으로서의 지성에 대해 이성은 "원리의 능력"으로 규정된다. 칸트에 의하면 "지성을 규칙들에 의거해 현상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라 한다면, 이성은 원리들 아래에서 지성규칙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다."

   세 가지 세분화된 개념을 통해서 칸트는 그의 초월론적 방법론을 전개했다. 결과적으로 사변적 이성은 경험을 제외한 인식기능이 불가하다. 칸트는 “우리의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순수감성(직관)에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이, 순수지성에 ‘범주’라는 관념이 경험이전에 존재한다. 그리고 순수이성은 이것을 종합하고 통일하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 모든 선험적인 요소는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실재성을 가진다. 공간과 시간은 사물의 현존재를 통해서만 실재할 수 있다. 즉 초월론적 요소도 경험을 통해서만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그래서 칸트의 인식론은 초월론적 관념론인 동시에 경험적 실재론이다. 관념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만 경험으로만 그 실재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칸트에게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는 ‘나는 생각하면서 실존한다.’라는 경험적인 명제이다. 이는 ‘나는 생각한다.’가 자아의 현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초월론적 관념론과 경험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사고한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은, 경험한 대상을 현존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현존하는 것에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는 이미 경험한 대상이기에, 실존(현존)하는 것이다. 실재성은 대상에 관한 인식으로 볼 수 있으며, 현존재는 실존하는 경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을 통해 현존재를 감관하고 범주를 통해 실재성을 가진다. 이때 직관과 범주를 연결시키는 매개가 ‘도식’이다. 도식은 상상력을 통해 시공간에 있는 현존재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현존재는 술어가 아닌 주어이다. 그저 있는 사물이다. 그리고 실재성은 인간의 초월론적 요소의 종합인 술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식에 있어서 칸트는 이원론자라는 것이다. 현존재는 특정 시공간에 그저 존재하는 사물이다. 현존재는 그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재성은 사물에 대한 초월론적 요소의 종합적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실재성은 현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

    칸트의 이러한 사고방식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어떠한 사람인가? 지구가 중심이고 우주의 별들이 도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시대에서 지구가 돈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이는 운동의 주체가 변화된 엄청난 주장이다. 칸트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대상을 인식한다고 생각했다면, 칸트는 대상이 인간의 선험적 요소들을 향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식이 단순히 인간의 주체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시에 모든 것이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칸트의 인식론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그리고  전환은 대상보다 형이상학(물자체) 중요시하던 종래의 무게중심을 바꾸었다. 그래서 대상의 현상에 더욱 무게중심을 두었다.


3. 세가지 신 증명과 이에 대한 칸트의 비판


3-1) 존재론적 신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


    존재론적 신 증명은 “최고 본질의 개념”으로부터 출발 하는데, “이러한 본질은 그것의 비존재가 불가능한 존재이기에,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존재가 속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를 세 단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신은 본질상 완전한 것이다. (2)완전성에는 실존도 포함된다. (3)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존재론적 신 증명의 출발점인 ‘최고 본질의 개념’은 칸트에 의해 ‘실재성의 총체’라고 불린다. 이는 “사물들 자체의 모든 술어의 총괄 개념인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며, 총괄개념이 아닌 근거로 해석한다. 이러한 단초로부터 “모든 실재성하에서는 존재 또한 함께 파악된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신에 대한 개념이 완전한 것이기에, 신은 완전성을 갖추기 위해 존재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갖는다.

    칸트는 이러한 증명을 비판한다. 그는 실재성에 현존재가 포함되지 않음을 주장한다. 현존재는 실재성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실재적 술어가 아니며, 사물의 개념에 덧붙여질 수 있는, 그러한 것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물의 정립일 뿐이다.” 칸트에 의하면 “사물의 개념 안에 있는 실재성이라는 말이 술어 개념에서의 실존과 다르다는 것은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비록 모든 정립을 실재성이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그 사물을 이미 그것의 모든 술어들과 함께 주어 개념에 정립하고서 현실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즉 현존재는 그저 있을 뿐이고, 모든 개념은 경험에서 비롯된 술어들이다. 그리고 그 술어는 사물의 실재성이다. 칸트의 유명한 100달러 예를 살펴보면, “현실적인 100 달러는 가능적인 100 달러보다 조금도 더 함유 하는게 없다. 왜냐하면 가능적인 100달러는 그 개념을, 현실적인 100달러는 그 대상 및 그것의 설정 자체를 의미하므로, 후자가 전자 이상 무엇을 더 함유하는 경우에는 나의 개념은 그것의 전체 대상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므로 또한 대상에 알맞은 개념이 아닐 것이니 말이다.” 사물은 그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물에 대한 규정이 개념과 실재성으로 남는다. 결국 본질에 관한 규정 자체가 ‘실존한다’는 논리적 귀결로 이어질 수 없다. 실존의 영역과 본질의 개념 영역은 구분되며, 존재론적 신 증명은 오류가 있다.


3-2) 우주론적 신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


    우주론적 증명은 가능한 모든 경험의 대상을 세계라고 부르며, 그 세계의 본질을 역으로 추정한다. 칸트는 우주론적 증명을 두 단계로 설명한다. 1) 현실적인 것의 경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본질의 개념으로 이끄는 것으로, “무엇인가가 실존한다면, 또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본질도 실존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연적인 것은 그 원인이 있는 것이고, 이 원인 역시 우연적인 것이라면, 이 또한 원인이 있어야한다. 이러한 인과율을 통해 마침내 근본 원인으로서 더 이상 우연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본질이 실존한다. 2) 이 개념으로부터 가장 실재적인 본질의 개념으로 이끄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본질의 개념 안에는 최고의 실재성의 개념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우주론적 신 증명의 허점을 발견한다. 우연적인 것의 원인의 우연적인 원인을 갖고, 그것이 마침내 필연적 원인을 갖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항상 우연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상 세계에서의 인과율을 통해 현상 세계를 넘어서는 근본 원인에까지 확대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인과율은 단지 현상 세계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하나의 원인을 추론하려는 선험적 근본 명제는 허위적인 명제들에서 나타나며, 이것은 단지 감성적 세계에서만 의미를 지닐 뿐 그 외에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원인이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즉, 인과율을 통하여서 근본 원인을 증명하는 것은 효력이 없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실재성 전체에 대한 절대적 필연성의 관계가 문제이다.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은 순수한 개념들에 관한 것은, 실재성만 있을 뿐, 현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는 존재론적 논증의 단순한 도치일 뿐이다.


3-3) 자연신학적 신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


    자연신학적 신 증명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합목적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연신학(단지 경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은 자연의 목적으로부터 자연의 최고 원인과 그 고유성을 추론하려는 이성의 시도이다.” 칸트는 자연신학적 신 증명을 네 가지로 묘사한다. “1)특정한 의도에 따라, 위대한 지혜로 실행되는 질서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2) 세계의 질서정연함은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다. 만약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이한 사물들이 질서정연함을 이루는 것은 낯선 것이기에, 이렇게 일정한 의도를 공유할 수 없다. 3) 따라서 지성으로서 자유를 통해 세계의 원인이어야 하는 그러한 하나의(혹은 다수의) 원인이 실존한다. 4) 이 원인의 통일성은 기술적인 건축물인 세계의 부분들의 상호관계의 통일성으로부터 추론된다. 나아가 유추를 통해 개연적으로 추론한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신학적 신 증명에서도 불충분함을 발견한다. 우주론적 신 증명에서와 같은 이의를 제기한다. 칸트의 자연신학적 신 증명에 대한 비판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는 경험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발견한 질서를 세계의 원인으로 유추하는 과정에서의 오류이다. 감성적 세계의 대상 위에 세워진 것에서 인과율을 통해 부터 초감성적인 것에로의 넘어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직 감성적 세계의 대상 위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기에 오류가 있다.

    두 번째 이의는 자연 안에서의 합목적성이 어떤 이성적인 근원자에 달려 있다는 추론이 유효한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 사건들이 “하나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오성적인) 세계원인”으로부터 발생하였다고 파악하는 것은 “반성적인 판단력을 위한 주관적인 근본 명제”일 뿐 결코 “객관적인 원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원인으로서의 본질이, 자연의 목적을 발생하게 했다는 명제를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세 번째 이의는 이 증명의 목적이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증명은 세계 건축가에 그칠 뿐, 세계 창조주를 밝힐 수는 없다. 인간이 기술을 가지고 가옥, 배, 시계 등을 만드는 것처럼, 지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가 자연 상태들을 만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 때, 인간의 기술은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는 질료를 목적에 따라 형태화 할 뿐. 최초의 물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이는 유비추리에 의한 것으로서 순수이성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자연상태를 만든 세계 건축가가 이러한 질서를 만들 수는 있으나, 최초의 질료를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최초의 질료를 만든 세계 창조주와 질서를 만든 세계 건축가가 동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신학적 신 증명은 최초 본질을 증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4. 칸트의 도덕론적 신 증명


   칸트는 기존의 신 증명을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판했음에도 여전히 신의 개념은 인간의 정신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선하고 합목적적인 이성의 본성을 타당하게 한다. 그렇기에 신의 개념은 여전히 순수이성의 과제로 남아있다. 칸트에게 신개념은 순수이성의 합목적성을 위한 최고의 본질이며, 최고의 이상이다. 그리고 하나의 ‘이념’으로 파악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순수이성이 신을 증명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신의 존재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신의 ‘객관적 실재성’은 순수이성의 방식에서 증명될 수 없지만 거부될 수도 없다. 칸트는 이론적 이성만이 인간이성이 실현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실천 이성의 영역이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이론적 이성을 신에 대한 질문이 설정되는 장소로 판단했으며, 실천 이성의 영역으로부터 신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해결에 근접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4-1) 도덕률과 최고선


    칸트는 순수이성에서 인식할 수 없는 신 개념을 실천이성의 실천적 법칙을 통해 증명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실천적 법칙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칸트는 활동하는 인간에게는 ‘무조건적인 실천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언명령이라고 말한다.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으로 요구되며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이성 자체에 실제적으로 놓여 있는 법칙’이다. 즉 실천이성에 내재되어 있는 선험적인 법칙인 것이다. 정언명령의 현실성은 단지 감성적 경험의 영역을 넘어 초감성적인 영역에 있다.

    정언명령은 선의지에 의해 정초된다. 칸트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 오직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 뿐이다.”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가령 다른 의도에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만 한다.” ‘선의지’는 옳은 행위를 그것이 옳다는 이유만으로 택하는 의지이다. 이는 마음의 경향성,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행위가 아닌, 선한 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함’, ‘옳음’은 선험적인 순수 이성의 이념으로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 가질 수 있는 ‘순수 실천 이성’이다. ‘선의지’는 선험적으로 내재해있지만 자연발생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계발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의지’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의무’개념이 필요하다. 선의지는 도덕적 이념의 실천이 이성적 존재자의 ‘의무’라고 납득하는데서 생긴다. ‘선의지’는 경향성에 의해 실천될 수 없다. 그렇기에 선의지는 ‘~하라’는 명령으로서 이성적 존재자에게 ‘실천 법칙’으로 다가온다.

   이성적 존재는 경향성에 의해서가 아닌 의무와 명령에 의해 ‘선의지’를 실천한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모두에게 타당하며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에게 선험적인 ‘실천 법칙’이기 때문이다. 실천이성은 이성자신이 스스로 제시한 것과 관계를 맺는다. 바로 이성적 존재자의 주관에 주어져 있어 이성 자신이 선험적으로 인식하기만 하면 되는 ‘도덕 법칙’이다. 우리는 이것을 ‘정언 명령’이라고 부르며, 이를 통해 윤리 형이상학이 전개된다. 정언 명령의 명제를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이것이 칸트의 도덕률(도덕법칙)이다.

    칸트는 도덕철학의 근본 원리로부터 하나의 ‘도덕신학’, 즉 도덕률에 의거한 신의 현존에 대한 증명을 전개한다. 칸트는 도덕법칙 자체가 신적 근원을 지시하지는 않는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도덕법칙은 경험세계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도덕법칙에 중간개념인 ‘지복(행복)’을 도입함으로써 도덕신학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지복을 세계 안에서 ‘이성적 존재의 상태’로 규정했다. ‘이성적 존재’는 그의 실존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을 소망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다. 이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지복을 추구하는 자체가 ‘선’한 것이 될 수 없다. 지복은 오직 도덕 명령과 연관해서만 선할 수 있다. 즉 도덕명령에 대한 주체적 삶만이 선하다. 반대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삶은 누구든 지복에 대한 욕구를 가지며, 따라서 각자는 자신의 태도에서 지복에 걸맞는 정도로 지복성을 희망할 만하다”라는 것이다. 종합하면 칸트는 도덕법칙을 실천함으로 이성적 존재의 행복을 소유하는 것을 ‘최고선’으로 보았다. 최고선은 도덕성과 행복으로 구성되며, 행복은 어디까지나 도덕성의 결과로서 전자에 종속된 방식으로 규정된다. 최고선은 유한한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실천적 의미에서 선이다.


4-2) 조율을 위한 신 요청


    그럼에도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현실성을 보면 도덕적인 행동이 항상 좋게 이어지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칸트는 세계 안에서 단순히 자연적인 과정에 따라서 도덕적 가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지복은 기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지복은 자연의 속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성과 지복의 합치에 대한 요구는, 즉 최고선에 대한 요구는 자연에 의존한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은 그 자신만으로 아무런 행복도 약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 질서 일반의 개념상 행복은 도덕법칙의 준수와 필연적으로 결합돼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성적 존재는 행복과 관련하여 그 자신의 힘으로 자연을 그의 실천 원칙들과 일관되게 일치시킬 수가 없다. 그럼에도 최고선을 위한 필수적 작업에서는 그러한 연관이 필연적인 것으로 요청된다. 우리는 응당 최고선의 촉진을 추구해야한다. 그러므로 이 연관의 근거, 곧 행복과 윤리성 사이의 정확한 합치는 근거를 함유할, 자연과는 구별되는 전체 자연의 원인의 현존이 요청된다.”

   즉, 자연이 최고선과 합치될 수 있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합치는 인간의 간섭에 의해 일어날 수 없다. 이러한 합치는 하나의 존재, 즉 자연 안에서 도덕적 요구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지복이 가능하도록 자연을 정돈할 수 있는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했다. 즉 도덕법칙과 지복의 정확한 합치를 근거하는 ‘전체 자연에 대한, 자연과 구분되는 원인’의 현존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도덕률은 최고선의 가능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신의 실존을 요청해야만 한다.

    이 경우로부터 신의 본질에 대하여 진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일어난다. 신은 도덕적 요구에 걸맞게 자연을 조정할 수 있는 ‘최고의 원인’ 혹은 자연의 ‘근원자’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칸트는 신을 창조자로, 자연법칙의 근원자로 특징짓는다. 이러한 신은 동시에 자연과 도덕성의 합치도 창조해낸다. 즉 최고의 선이 가능하도록 작용하고 ‘도덕적 인과율’을 만들고 ‘도덕적 입법자’로서 존재한다. 곧 신은 ‘도덕적 세계 근원자의 이념’이다.

    칸트는 도덕적 입법자인 신에게 ‘오성(지성)과 의지’라는 속성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도덕적 법칙을 따르는 인간의 인과율은 동일한 존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더 이상의 술어들에 대하여 더 정확히 하는 것은 금지했다. 이려한 고려는 오직 실천적 고려 안에서만 실재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고려와의 연관 안에서만 신적 오성과 지식을 인간적인 오성과 지식, 그리고 그 실천 이성과 유비시키는 것이 전제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고찰되었을 때 인간과 신 사이의 유비를 위한 어떠한 장소도 발견되지 않는다.


4-3) ‘자유’와 ‘목적의 왕국’을 위한 신 요청

     

   칸트는 인간의 본질을 자유를 통해 규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유의 개념은 오직 도덕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유의 존재는 어떠한 경험으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은 도덕률로 인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확신할 수 있다. 자유가 현실적이라는 사실은 도덕률을 통해 개시된다. 왜냐하면 자유는 도덕률에 대한 필연적이고 실천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유는 실천적 실재성을 가진다. 이는 경험으로 확증 가능한 실재성이 아니다. 실천의 전제 안에서만 실재성을 가진다. 이 자유가 머물 수 있는 장소는 경험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이다. 오직 ‘초감성적인 실존’ 안에서만 자유는 논할 수 있다. 곧 실천적 영역 안에서만 칸트는 형이상학을 전개한다.

   칸트에 의하면 “자유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속성으로 전제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자유’를 매개로 도덕 법칙과 결합할 수 있다. 자유는 이성적 존재자의 본질적 속성이고, 도덕 법칙은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로운 법칙수립, 자율이다. 그렇기에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 의지란 바로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의지로서 순수한 실천 이성의 존재자인 인간은 응당 도덕 법칙을 준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은 실천 이성으로서, 또는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로서, 그 자신에 의해 자유롭다고 간주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오로지 자유의 이념 아래서만 자신의 의지일 수 있고, 그러므로 그런 의지는 실천적 의도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실천 이성 비판』 에서는 도덕 법칙은 자유와의 연관 하에서 그 존재 근거를 보장 받는다. 왜냐하면 자유를 고려하지 않은 도덕 법칙의 전제는 근거없는 독단적인 전제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바로 이 양자간의 이러한 관계를 일러 칸트는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이며, 도덕 법칙은 자유의 인식 근거이다.”라고 말한다. 칸트가 신의 존재에 적극적으로 그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도덕 법칙의 존재 근거로서의 자유’와 ‘자유의 인식 근거로서의 도덕 법칙’의 연관을 파악함으로써 이다.

    칸트는 자유개념에서 나아가 선험적인 자유개념의 실현을 통해 ‘지성적 세계의 열림’에 대하여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성적 세계는 바로 도덕률과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인간의 초감성적 실존 안에서 이성적 존재들의 상호성이다. 즉, 인간은 자유를 통해 도덕적 실천을 하며 하나의 이성적 존재, 주제적 존재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지성적 세계라고 말하며, 지성적 세계는 칸트의 이상적 세계이다.

     칸트는 지성적 세계를 ‘목적의 왕국’이라고도 부른다. 왜냐하면 목적의 왕국에서 이성적 존재는 인격이 ‘자기 스스로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즉 타자가 수단이 아닌 행위의 목적이 된다. 여기에서 이성적 존재는 의지의 자유를 통해 선의지를 실천한다. 그렇기에 자유는 목적의 장소에서 고유한 장소를 갖는다. 목적의 왕국에서 이성적 존재는 두 가지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첫째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도덕적 법칙을 입법하며 둘째로 입법한 법칙에 복종한다. 목적의 왕국에서 이성적 존재는 입법자인 동시에 순종한다. 그렇기에 그는 왕국의 신하이지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 ‘목적의 왕국’에는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동시에 모든 보편적 도덕법칙의 근원적으로 부여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 존재는 완전하고 전능하며 선 자체인 존재여야 한다. 이때 신에게 단지 ‘오성과 의지’를 넘어선 전지, 전능, 영원, 무소부재 등의 속성이 부여된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신 증명들을 다루었고 『실천이성비판』내용을 중심으로 도덕법칙에 근거한 칸트의 도덕론적 신 증명을 살펴보았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형이상학은 인간의 사변적 이성을 통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반면 경험을 통해서만 인간은 사물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으며 나아가 초월론적인 요소의 실재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초월론적 요소가 있기에 경험도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의 이론적 토대를 가지고 전통적인 신 증명인 존재론적 신 증명, 우주론적 신 증명, 자연신학적 신 증명을 비판했다. 공통적으로 전통적인 신 증명은 최고의 실재성(완전성)에서 현존재를 포함하여 실존을 증명하려고 했으며, 경험으로부터 초감성적인 원인을 증명하려는 비약적인 인과율을 적용했다.

    결국 사변적 이성으로 신의 증명은 불가능하며 오직 실천의 영역에서만 신 증명은 가능하다.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통해 도덕법칙과 최고선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며,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도덕법칙에 행복이 수반되려면 자연을 조율할 신의 존재가 요청되어야 함을 확인했다. 나아가 인간이 자율적으로 도덕법칙을 선택하고 이를 통해 최고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경험해볼 수 없는 ‘자유’의 근거인 신의 존재가 마땅히 전제되어야함을 확인했다. 결국 실천영역에서 최고 존재의 현존재는 전제될 뿐 드러내어질 수 없다. 신은 단지 실천영역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공준’으로서 존재한다. 칸트는 이를 통해 신 증명에서 ‘실천적 실재론’을 전개한다.



<P.S 도움이 되었으면 구독 한 번 눌러주세요^^>


참고자료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1,2』, (백종현 역, 아카넷, 2006)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역, 경기: 아카넷, 2014)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역, 경기: 아카넷, 2012)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 (최상욱 역, 서울: 동문선, 2003)


-사카베 메구미, 아리후쿠 고가쿠, 『칸트사전』 (이신철 역, 서울: 도서출판b, 2003)


-오트프리트 회페, 『임마누엘 칸트』, (이상현 역, 문예출판사, 1997)


-임혁재, 철학50 『칸트의 도덕적 신 존재증명』 (서울: 한국철학회, 1997)

매거진의 이전글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