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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Nov 01. 2018

이신건의 '어린이 신학'


1. 들어가는 말


   저자 이신건 교수는 그의 책 『어린이 신학』에서 시대적 소수자, 학대의 대상인 어린이를 위한 신학을 저술하였다. 어린이의 해방을 위한 신학적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는 어린이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인간의 어린이성을 긍정하고, 어린이 영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한다. 나아가 기존에 어린이를 보호 긍정하는 신학을 넘어, 하나님에게서 어린이성을 발견할 수는 없는가를 탐구하였다. 즉 어린이의 얼굴을 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연구하였다. 그렇기에 ‘어린이 신학’은 기존에 단순한 어린이 보호를 위한 신학적 역할을 넘어서 이신건 교수가 전개하는 독특한 신론이라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어린이 긍정


   지나온 역사를 돌아볼 때 어린아이는 늘 미숙하고 부족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무시의 대상, 착취의 대상, 학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어린이를 무한히 긍정하시고 더 온전한 인간의 형태로 말씀하신다. 대표적인 근거로 성육신,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수 있다.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이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으며 인간의 새로운 육체성이 등장했음을 가르쳐준다. 구원자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어린이 예수를 빼놓을 수 없다. 누가는 예수의 성장과정을 사랑스럽게 자란 예수, 랍비들과 대화할 정도로 지혜로운 예수의 모습 등 간단히 압축해서 표현한다. 하지만 공생애까지 예수님의 성장모습은 신비에 감추어져 있다. 물론 ‘도마의 유아복음’ 같은 글에는 초인적인 예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지만 이는 영지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있어 많은 비판을 받는다. 역사적 근거가 거의 없어서 예수의 어린 시절은 여전히 신비로 남겨져있지만 많은 문학가들의 시를 통해 ‘어린이 예수’는 가장 ‘티 없는 순수한 존재’로 묘사된다. 성육신한 어린이 예수는 하나님이 어린이를 긍정한다는 첫 번째 근거가 된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은 어른보다 어린이의 특징과 더 가깝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실 때 ‘마주보는 존재’, 말씀하실 수 있는 대상, 청종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신학적 개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반사하고 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는 위선과 속임과 연극과 계산 없이, 온 가슴으로 세계와 하나님을 포용할 줄 아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표현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과 기능이 타인과 세계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타인에 대해 개방적이고 유연한 관계를 맺는다. 또한, 어른보다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어린이는 청지기적 사명을 더욱 온전히 감당한다. 인류는 세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지배할 대상으로만 생각하지만 어린이는 세계를 친구와 놀이터로 생각한다. 그런 어린이에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할 동료 피조물이다.

   셋째 어린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공이다. 독사와 어린이가,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부장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어린 아기가 세상의 무력을 무용하게 만드는 힘의 역설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를 가져다주었다. 작은 자, 어린이에 대한 하나님의 당파성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어린이를 거부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어린이를 어른의 중심에 세우신다. 어린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어린이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오직 은혜로 산다. 어린이는 오직 하나님을 전적의지하고, 전적의존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에 철저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무한히 수용한다.


3. 어린이의 얼굴을 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린이를 긍정하는 것에서 나아가 어린아이의 얼굴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존재방식이신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순환하시고 침투함으로 어린이의 얼굴과 속성을 공유하신다. 우리는 이 특징을 성자로부터 접근하여 성부와 성령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으며 3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로 순수성이다. 우리는 어른보다 어린이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순수하다는 것을 안다. 어린이는 순수하고 진실하다. 잘못을 하더라도 그 잘못을 빠르게 수긍하는 순수한 존재다. 예수는 마음이 청결한 자를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마음이 청결한 자의 표본이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가장 진실하고 순수한 자이다. 즉 위선이 없고 외식이 없는 자이다.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한 분이시다. 그는 가르칠 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아멘어법’을 사용하셨다. 이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여 말할 때 사용하던 어법이다. 예수님께서 신적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진실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강조해준다. 예수의 순수성은 그가 마주하고 있는 하나님께도 해당된다. 마음이 청결한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거룩은 ‘순수함, 깨끗함’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하나님은 순수하기에 순수한 자만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다. 하나님도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같이 자기 자신을 세상에 투명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역사에 보여주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에 반응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성령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에 반응하도록 새로운 잉태를 한다. 그러므로 새 마음을 불어주시는 성령은 순수한 영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온유와 겸손이다. 예수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의 겸손과 온유를 본받는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가져온다. 겸손과 자기 낮춤의 태도는 어린이의 특성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분이셨다. 나아가 낮은 자리에서 낮은 자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었다. 그렇기에 늘 굶주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이 가득한 분이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유와 겸손함을 계시하신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포기하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다.(빌2:6~8) 하나님의 자기비하는 카발라 학파의 이론에도 등장한다. 하나님은 자기낮춤을 통해 이스라엘 안에 현존하시고 이스라엘과 함께 박해를 받으시며 이스라엘과 함께 포로가 되어 유배길을 가시고 순교자들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당하신다. 그렇기에 온유하신 하나님은 겸손한 자리에서 낮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나아가 성령도 겸손의 영이시다. 성령은 비둘기로 묘사되어 성경에 등장한다. 그것은 어린이다운 본성을 더욱더 풍성하게 지시하고 상징한다. 비둘기는 희생제사에 사용되는 하찮은 제물이다. 성령은 하찮은 모습으로 예수 위에 내려와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성령이 모든 인간적인 연약함과 고난으로 내려와 함께 고난 받는 영임을 나타낸다. 성삼위일체는 케노시스, ‘자기비하’와 겸손 안에서 통일성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놀이와 향유이다. 놀이는 어린이의 상징 중에 상징이다. 요한 하위징어는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라고 정의하였으며, 어린이는 가장 본능적으로 놀이를 향유하는 존재이다. 예수는 경직된 세계 안으로 큰 축제적인 즐거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해방과 자유를 선포한다. 예수는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로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리고 예수의 식탁 교제는 늘 축제적인 즐거움이 드러났다. 그래서 당대 종교인들로부터 예수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인간은 놀이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경험한다. 그래서 요한 하위징어는 예배를 자유와 해방감을 경험하는 가장 고상한 놀이라고 말한다. 하나님도 놀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과정신학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 목표를 피조물의 향유촉진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것을 요구하시지만 무엇보다 먼저 모두가 즐기기를 원하신다. 만물의 즐거움을 원하는 하나님은 즐거움에 참여하시는 분이며 스스로도 즐길 줄 아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에서 풍부한 놀이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각 위격이 상대방 안에 내재하며 상대방을 위해 개방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방에게 호의적으로 순환하는 삼위일체의 모습은 춤을 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성령은 자연스럽게 이 사귐 안에서 춤을 추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얼굴로, 온유하고 겸손한 얼굴로, 때로는 익살스럽고 천진난만한, 놀이를 즐거워하는 어린아이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4. 회복해야 할 어린이 영성

     

   하나님은 학대받는 어린아이를 긍정하는 분이시며 그런 어린아이의 얼굴로 인류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얼굴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마주하기 위해 ‘어린이다운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회복해야할 어린이다운 영성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함을 말씀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다시 어린이로 태어난다. 어린아이가 생명의 환희를 경험하며 울음을 터트리듯이 그리스도인은 중생의 기쁨과 생명의 충만함 속에서 어린이로 새롭게 태어난다. 어린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본다. 동시에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의존하게 된다. 어린이는 하나님을 향해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이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직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오직 어린이가 되는 길밖에 없다. 둘째로 자연을 향한 개방성이다. 어린이에게 자연 만물은 친구다. 그래서 어린이는 가장 많이 새로운 존재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하나님은 자연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장난치는 어린아이의 숨결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가장 크게 경험하신다. 마지막으로 존재를 지향하는 삶이다. 어린이는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선물로 여긴다. 그래서 어린이는 그저 공짜로 주어진, 은혜로 주어진 세계를 누리며 살아간다. 어린이의 영성은 소유하려고하고 이용하려고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항하는 검소한 영성이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이신건 교수의 『어린이 신학』을 통해 3가지 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글을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이신건 교수의 어린이 신학은 이신건 교수의 ‘신론’이다. 종래 칼 라너, 몰트만, 젠센으로 대표되는 ‘어린이 신학’을 살펴보면 이들은 어린이를 통해서 ‘인간론’을 전개한다. 어린이가 하나님께 어떻게 긍정되는지, ‘하나님의 형상’의 대표성으로 어린이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신건 교수의 ‘어린이 신학’은 인간론을 넘어 신론을 전개한다. 그의 어린이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어린이의 얼굴을 전개해나가며 하나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바르트가 주장한 ‘자유로이 사랑하는 하나님’, 즉 ‘자신을 제한하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이해와 삼위일체 속에서 ‘사귐’을 즐거워하시는 하나님, 향유하시는 하나님 이해가 ‘어린이’라는 얼굴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고 선명해진다. 마치 어린 아이가 놀이터에서 흙으로 집을 짓고 기뻐하듯 하나님은 실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보시고 즐거워(키-토브)하신 ‘어린이’같은 분이시다.

    둘째로 ‘하나님 형상’에 대한 막연함을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어른의 중심에 세워놓고 비유로 이야기하신 것은 탁월한 교수법이다. 동일하게 어린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개한 이신건 교수의 이론은 후학들에게 구체적인 배움을 허락한다. 나아가 ‘하나님 형상’을 막연히 교육하고 있는 교회의 실정에서 성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이 신학을 접하고 더욱 부끄러워 질 것이다. 이제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회복해야할 성도의 자세,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요즘 교회마다 주일학교가 무너지고 있다고 다들 앓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어른’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의 운영방식은 주일학교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전체를 바라봐야할 것이다. 주일학교에 나오지 않는 어린이들은 그 나름의 환경에서 교회보다 더 하나님을 닮아있을 것이다. 오히려 주일학교를 걱정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교회는 더 순수해질 수 없는 것인가? 교회는 더 즐거울 수 없는 것인가? 교회는 더 겸손할 수 없는 것인가? 종교개혁이 요구되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린이’영성을 다시 회복해야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신건 교수의 「어린이 신학」은 삶과 학문의 관계를 가르쳐준다. 이신건 교수는 언행지서가 일치하는 학자이다. 하나님에게서 어린이의 얼굴을 발견하듯 우리는 이신건 교수로부터 어린이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이신건 교수는 자연과 음악을 사랑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누구와도 친구 되어주는 선생이다. 그는 늘 텃밭에서 식물을 가꾸는 자연인이며, 늘 아코디언을 사랑하는 악사이며, 늘 학생들과 장난치는 악동이다. 이신건 교수의 삶은 어린이 신학을 실천·적용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학문은 학자의 상황과 환경,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신건 교수의 「어린이 신학」은 학문의 진위여부, 논리여부를 넘어서 학문하는 자세, 학문과 삶의 관계를 보여주는 글이다. 그렇기에 이신건 교수는 늘 그가 말하는 대로 “어린이 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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