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 라너의 생애
칼 라너는 독일 프라이부르그의 검은 숲이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1904년 3월 5일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대가족이었고, 중산층의 매우 경건한 카톨릭 가정이었다. 그의 형 휴고처럼 칼은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고, 특별히 예수회 교단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교단은 칼을 교수로 키우기로 계획했고, 그는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 인식론에 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칼 라너는 1937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신학부에서 교수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의하여 폐교되기도 했지만, 후에 다시 학교로 복귀하여 1964년까지 계속 강의했다. 이 학교를 떠난 해에 뮤니히대학교로 옮겨 기독교 세계관 석좌 교수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 곳에서 동료교수들과 불협화음으로 뮌스터 대학으로 옮겨 교의학을 가르치게 된다. 1971년 교수 은퇴 후 뮤니히로 돌아와 살다가, 1984년 인스부르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칼 라너는 은퇴 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에큐메니컬 운동, 종교간 대화, 신학자 회의, 교황들의 신학 자문으로 활동을 했다. 그가 남긴 저서 분량은 가히 바르트나 틸리히와 견줄 만하다. 1984년까지 그의 이름으로 나온 논문과 책만 해도 3,500여 종이 된다. 논문 중 가장 중요한 것만 모은 「신학 연구」라는 20권짜리 책도 8천 쪽이 넘는다. 생을 마감할 때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그의 생애 신학적 작업을 간명하게 요약한 책으로 라너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가 된다.
칼 라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칼 라너의 강의를 듣고 나온 사람이 그 내용을 설명할 때 라너가 말한 신학과 전혀 다른 신학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화로 그려져서 일간지에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칼 라너의 신학은 이해하기도 전달하기도 벅찬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칼 라너의 신학방법론을 먼저 살펴봄으로서 그의 ‘신학함’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나아가 그의 신학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2. 칼 라너의 신학방법론
칼 라너는 생을 살면서 현대의 문화적, 신학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로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술들은 자명성을 갖지 못한다.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둘째 모든 학문 분야의 전문지식이 점점 증가하고 심화되기 때문에 하나의 종합이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신학의 궁극적 기본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종합이 필요하다. 셋째 신학의 전통적 개념들은 현대인의 삶과 변화된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신앙의 위기를 초래한다. 현대인이 갖게 되는 경험과 기독교 신앙이 서로 관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칼 라너의 신학은 이런 고민과 문제의식 속에서 전통적인 신학의 문제인 초월성과 내재성의 논쟁에서 하나의 종합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기존의 스콜라 신학이 인간의 삶과 거리가 먼, 추상적 개념에서 시작되므로 아래로부터 곧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삶과 진리, 그리고 경험과 개념의 상응을 추구했다. 그래서 자신의 주체성과 실존 안에 있는 말씀에 반응하길 원했다.
칼 라너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도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며, 거룩한 신비 없이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통해 경험하는 역사적 환경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를 마주하고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라너의 신학적 접근 방법의 핵심은 ‘초월론적 방법’이다. 그는 여기서 ‘초월론적’(transzendental)이라는 용어를 ‘초월적’(transzendent)이라는 용어와 달리 구분하여 사용한다. ‘초월론적’이라는 표현은 칸트에게 있 어서는 ‘내재’(immanent)라는 용어에 응하는 개념이다. 전자가 경험 세계의 한계 내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경험세계를 벗어 난 것, 따라서 경험될 수 없기에 인식될 수 없는 것, 즉 인식의 상이 될 수 없는 것에 사용된다. 이는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은 경험 세계 내에서 어떠한 것이 인식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기 하여 인식대상으로부터 떠나 주체의 선험적 구조로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칸트는 ‘초월론적’이라는 용어를 ‘범주’(kategorial)이라는 용어의 대응개념으로 사용하는데, ‘범주’라는 용어의 개념이 경험되어지는 상의 인식과 관련이 되어있다면 ‘초월론적’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범주성’을 떠나는 것, 즉 의식인 경험 인식 대상으로부터 떠나 인간 주체의 선험성에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초월론적 방법이 철학적이기에 그가 철학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라너는 철학을 신학을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철학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작업인 기초신학의 측면”이라고 말한다. 즉 맹목적인 신앙의 비약을 넘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합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라너는 인간 존재가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초월론적 반성’이라는 하나의 철학적 도구를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무한하고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편향성을 가지고 있는 ‘초월론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은 늘 신적 계시에 대한 개방성과 편향성 그리고 수용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라너의 과제였다.
라너는 이것을 입증하는데 ‘초월론적 반성’을 사용한다. 초월론적 반성은 현상이나 사실에 대한 선험적 조건들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에 선험적 조건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 선험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선험적인 조건은 인간의 보편경험을 초월론적 경험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볼 때, 인간은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지향한다는 내적인 본성이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내적인 본성은 인식하는 자 안에서 전제되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의미에서 존재론인 것이다. 아울러 인간 실존의 지평이 된다. 이 지평 안에서 인간은 경험하고 질문하며 인간의 주체성을 찾아간다.
초월론적 반성을 위해서, 인간은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위해 추상화라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것은 사물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초월)시켜 사물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의 개념은 사물이 가진 범주나 관계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사물을 분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고유의 능력이며 초월론적 반성을 위한 선험적 자기 운동능력이다.선험적 조건은 선험적 자기운동으로 발현되어 초월론적 반성을 한다.
결과적으로 라너는 초월론적 반성을 통해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입증하기 원했다. 라너는 이런 신적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청종적 능력이라고 말했다. 청종적 능력이란 인간은 원하시면 자신을 얼마든지 계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적 사물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말씀의 청종자이다. 그 능력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어서 라너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 자체 안에 포함시켜놓은 일종의 지식이라고 간주하였다. 이 지식은 전의식적이고 잠재적이지만 인간 본성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신-지식’ 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위상을 가진다. 라너의 매우 정교한 철학적 인간학의 목적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공간이다.
3. 칼 라너의 신학
1) 계시론
라너는 계시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첫 째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 초자연적 성향을 초월론적 계시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이며 초월론적 경험들을 통하여 중개되는 이 계시는 항상 비테마적이며 비반추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암묵적 지식을 제공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가지고 개념을 형성하거나 사상적으로 그 내용을 반추해 보여주며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초월론적 계시에서 하나님은 답이 아닌 질문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초월적 계시는 반추적이고 개념적 지식을 위한 선험적 기초를 제공한다.
라너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본성과 모순 관계에 있다고 보는 ‘외인주의’와 인간의 본성에 예속되어있다고 보는 ‘내인주의’의 극단 속에서 중재적 위치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를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중재적 개념으로 극복해보고자 했다. 이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것은 라너의 신학 전반에서 중심적인 개념이다. 라너는 실존을 하이데거에게서 빌려왔다. 인간의 어떤 특성이 타존재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든 말든 그것은 하나의 인간 실존인 것이다. 초자연은 꼭 기적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모든 것이다. 초자연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기 의사표현이다. 은혜는 인간에게 값없이, 근거없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전달로서 선사되는 초자연적 현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부터 선험적으로, 초월적으로 인간의 실존과 함께 언제나 주어져 있으며 인간의 역사적 삶을 동반한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 한가운데 현존한다. 정리하면 초자연적 실존은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에 대한 인간이 본성이다. 이것으로 인간은 타존재와 구별된다. 그는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라너에 따르면 초자연적 실존은 인간이 가진 청종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청종적 능력으로 하나님께 항상 열려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늘 초자연적으로 고양되는데 그러한 고양됨이 모든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존재구조에 있어 유한한 세계를 넘어 절대자 하나님을 향해 늘 개방되어있다. 이 초자연적 실존 때문에 인간은 초월의 종착점을 발견케 되며 그것이 은혜롭고 인격적이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란 초자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외인적인 것은 아니다. 이 초자연적 실존을 통하여 라너가 기대했던 요점은 외인주의와 내인주의 모두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본성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 개방성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다고오기 때문이다.
라너는 초자연적 실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와 충분히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특별 계시와의 관련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너는 그런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초자연적 실존은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며 그것이 성숙되기 위해서는 범주적 계시가 요구된다고 했다.
라너의 두 번째 계시형태는 범주적 계시, 혹은 실제적 계시이다. 초월론적 계시와 범주적 계시는 상호의존적이다. 라너는 초월론적 계시를 인간의 경험으로 분석(반성)함으로써 설명한다. 그것이 범주적 계시의 출발이다. 인간은 다양한 경험들을 한다. 이 경험들은 인간의 다양한 범주적 세계를 이룬다. 그런데 인간은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개별적 사물들을 경험할 뿐 아니라 그들의 유한성을 경험한다. 그의 경험들은 유한성의 경험들이다. 그러나 인간 속에는 초월론적 구조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유한성의 경험 속에서 인간은 무한한 것의 경험을 찾게 된다. 초월적 계시는 범주적 계시를 통해 선명해진다. 범주적 계시는 초월론적 계시만을 통해서는 발견될 수 없는 하나님의 내적 실재를 드러낸다. 그 내적 실재는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과 그가 영적인 피조물과 가지는 자유로운 관계이다. 이것은 초월론적 계시를 반성적 지식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자기-의사소통’으로 하나님과 맺는 초월론적관계가 ‘자기-반성’적일 때 범주적 계시가 된다. 초월론적이며 동시에 범주적인 하나님의 보편적 ‘자기-의사소통’이 ‘자기-반성’을 통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주적 계시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부분적으로 오류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차적이며 고등적인 유형의 존재가 있을 것으로 가정된다. 주로 신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적 계시이다.
끝으로 모든 계시의 절대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육신은 단순히 ‘자기-의사소통’의 최고 지점, 인류의 역사와 경험 속에 계시는 하나님 임재의 가장 치열한 매개적 지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전 보편적 역사를 해석하는 시금석이나 나머지 계시와 절대적으로 구별된다고 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초월’이 성취된 것, 곧 오메가 포인트이며 창조세계는 이것을 향해 이끌려간다.
2) 신론
라너에게 하나님은 자연적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신비’이며 초자연적 실존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인간에게는 ‘거룩한 신비’이다. 하나님은 초월적 신비로서 인간의 경험 안에 내재한다. 라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무한성은 공리적이기에 어떤 한 개체로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어떤 기계적인 신이 아닌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는 인격적인 것은 인격적인 것을, 비인격적인 것은 비인격적인 것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인격적이다. 동시에 인간의 인격을 초월하는 분이다. 이는 하나님을 천사적 인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피치 못할 진술이나, 인간은 ‘거룩한 신비의 표현할 수 없는 경외적 흑암’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 인격’이라고 고백해야한다.
라너는 무로부터 창조한 하나님을 긍정했고, 나아가 하나님은 이 세계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세계가 하나님을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가운데 스스로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라너는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나뉘는 이원론에 대항했다. 그래서 그는 무로부터 창조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세계에 자신의 근거를 두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내재성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간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분이다. 그러나 그 차이 안에서 인간과 가장 밀접한 일치점이 존재한다. 즉 절대적인 차이점이 아니다. 라너에게 하나님은 ‘차이-속의-일치’, ‘일치-속의-차이’로 존재한다. 라너는 이처럼 조심스레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맞추려한다.
또한 라너는 하나님에 관하여 삼위일체를 말할 때, 내재적 삼위일체와 동시에 기능적(경륜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며, 기능적 삼위일체는 역사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역할이다. 라너는 “역사 속 삼위일체의 구원을 위한 기능적 활동은 내재적 삼위일체 방식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성육신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육신 속에서 하나님의 내적존재가 포함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가운데 그 존재의 기능이 드러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여 예수처럼 되어간다. 피조물은 하나님과의 ‘자기-의사소통’을 통하여 점점 예수처럼 되어가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에 청종하므로, 초월론적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차이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며 ‘되어 감’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성육신이다.
3) 기독론
라너의 기독론은 초월론적 기독론이다. 라너에게 예수는 절대적 구원자이다. 예수가 절대적 구원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초는 예수의 자의식과 그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결합하며 찾았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탁월한 밀접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 밀접성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신성은 그가 절대적 구원자로서 어떤 기능을 했느냐가 증명해준다. 그는 단순히 선지자 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나누어주는-은혜’로 인간을 구원한 절대적 구원자이다.
인간의 구원은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 하나님과의 고상한 연합을 이루도록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으로 신성화하며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은밀한 본질로서 연합한다. 그 연합은 절대적 구원사건이며, 예수의 절대적 구원사건은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런 의미에서 라너는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찬성한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가진 예수의 자의식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과 다를 수 없다. 예수는 그 자아 속에서 하나님의 의식과 인간의 자의식을 가지며, 우리는 이 연합을 본체적 연합의 신비로 보아야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간이 되심, 곧 성육신은 “인간의 현실적인 본질이 일어난 최고로 유일한 경우”이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재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의 초월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하나님의 자기전달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초월성의 완성이요 정점이다.
4) 인간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신적 개방성이 있는 유한하지만 초월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가진 인간의 신적 개방성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을 위한 잠재력이다. 이런 인간은 ‘말씀의 청자’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며, 그분에 대해 질문하고 반성하며 답을 찾아간다. 하나님은 인간의 비밀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암호이다. 인간이 질문이면 하나님은 해답이시다. 하나님은 인간 속에 자신의 비밀과 답을 두셨으며 인간은 자신 안에 질문(자기-반성)을 통해 암호를 풀어나가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암호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그 존재가 암호이며 답을 찾아가는 존재이다. 그 답은 창조의 목적에서 드러나며, 창조의 목적은 ‘성육신’이다. 인간은 고로 성육신을 추구해야한다. 그것은 인간됨을 최대한으로 성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하여 로고스와 영원한 연합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가장 하나님과 밀접할 때 가장 인간다움이 나타난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궁극적인 성취와 실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통하여 자기를 외적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인간은 절대적 구원자를 찾던 하나님에 대한 개방성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하나님 계시 안에 있는 은혜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본성에 이미 가지고 있다.(초자연적 실존, 선험적 조건) 하나님은 무한하고 파악될 수 없으며 숨어있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의 존재”로 파악된다. 인간은 초월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의 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자신에게 언제나 하나의 비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비밀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