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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May 29. 2019

폴 틸리히의 신학적 기초

상관관계 방법론을 중심으로

 폴 틸리히의 신학적 기초

     

 정신생활과 궁극적인 관심의 상관관계


    폴 틸리히에게 모든 정신생활은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으로부터 시작된다. ‘궁극적인 관심’은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다른 모든 관심을 ‘예비적’으로 만드는 인간 심연의 무조건적인 관심이다. 그는 신학을 전개할 때에도 신학의 대상은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 대상’이나 ‘궁극적 목표’, ‘궁극적 본질’과 같은 단어보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을 선택한 이유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틸리히에 따르면 “궁극적인 것은 무한한 열정과 관심의 문제이며,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할 때도 그것은 우리를 그의 대상으로 만든다.” 궁극적인 관심은 주체의 능동과 수동이 종합된 개념이다. 그것은 정신생활의 절대적 목적인 ‘존재 자체’를 향한 무한한 관심이다. 동시에 정신생활을 하도록 사로잡는 무언가 이다. ‘궁극적 관심’은 손에 잡히는 대상이 아닐뿐더러, 우리의 모든 정신을 사로잡기 때문에 특정한 ‘대상’으로 상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대상’이라는 단어보다 ‘관심’이라는 역동적인 개념을 사용하였다.  

    틸리히에게 ‘궁극적인 관심’은 결과적으로 ‘존재 자체’와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의 근원, 기반이 되는 ‘무언가’이다. 조건 지을 수 없고, 규정할 수 없고, 대상화할 수 없는 ‘존재 자체’는 모든 정신생활의 근원이 된다. 『존재의 용기』에서 이는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도 사용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마저도 규정되고,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보다 근원적인 존재에 대해서 표현이 필요했다.

    본 단락을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궁극적인 관심은 모든 정신생활의 시작이 된다. 도덕적 영역에서는 ‘무조건적인 진지함’으로, 인식의 영역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는 ‘궁극적 실재’를 향한 열정으로, 미학에서는 ‘궁극적인 의미’를 표현하려고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도덕, 철학, 미학은 궁극적 관심에 기반을 둔 다양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틸리히에게 종교는 무엇인가? 틸리히는 종교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누어서 사용한다. 좁은 의미의 종교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와 같이 전통 속에서 체계화 된 것이라면, 넓은 의미의 종교는 틸리히에게 보다 근원적이다.

    틸리히는 “종교는 인간 정신생활에 있는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기능에 있는 깊이의 차원이다.” “깊이라는 은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적 측면이 인간 정신생활의 궁극적인, 무한한, 무조건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의미이다. 종교는 그 단어의 가장 광범위하고 기본적 의미에서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다.”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틸리히에게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이다. 인간의 모든 정신생활이 종교의 깊은 차원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종교는 인간 정신생활의 실체, 근거, 깊이이다. 이것이 인간 정신의 종교적 측면이다.”라고 말한다. 종교는 정신생활의 깊이를 개방하고 거룩한 존재에 대한 경험을 준다. 이는 궁극적 의미, 궁극적 용기의 원천에 대한 경험이다. 하지만 종교가 깊이를 개방하고 경험을 제공하는 도구이기를 멈추고, 자신을 독립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만든다면, 종교는 세속세계를 멸시하고 자신을 우상으로 만든다. 유대교부터 현재까지 기독교는 수많은 형태의 ‘자기우상화’를 역사에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서 종교는 세속영역과 종교영역을 분리하지 않고 두 영역 모두에서 정신의 깊이를 추구하는 ‘궁극적 관심’이다.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이 정신생활의 다양한 측면으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볼 ‘문화’의 양태이다. 틸리히는 문화를 예비적인 관심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는 궁극적인 관심과 예비적인 관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궁극적인 관심과 예비적인 관심 사이의 관계는 후자가 전자의 담지자와 매개체가 되는 관계이다. 유한한 관심은 무한한 의미로 높여지지 않고, 무한한 것 곁에 위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유한한 관심 안에서 그리고 유한한 관심을 통해서 무한한 것이 실제적인 것이 된다. 어떤 것도 이러한 기능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궁극적인 관심은 모든 예비적인 관심 안에서 그리고 모든 예비적인 관심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궁극적인 관심인 종교는 모든 문화의 요소로 실현되고, 이를 통해 존재의 근원과 현실의 실존의 역동적인 상관관계를 성립한다.  



상관관계의 방법론


    폴 틸리히의 신학은 결과적으로 문화적인 형태로 발현된 다양한 정신생활들이 종합되어, 그들의 존재기반인 ‘존재 자체’를 지향하는 과정이다. 특별히 정신생활의 다양한 측면 중 철학과 좁은 의미의 종교를 대변하는 신학의 공통분모를 통해 궁극적인 관심을 표현한다. 이것을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이라고 말하며, 조직신학의 방법론으로 사용한다. 물론 ‘문화의 신학’도 상관관계의 방법에 기초한다. 그에 따르면 “상관관계의 방법은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대답의 상호 의존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조직신학은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여 실존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기독교의 메시지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상징이 물음에 대한 대답임을 논증한다.

    철학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실재 자체’를 형성하는 보편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구조를 파악해도 구조의 내용을 설명하기에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철학은 구조가 적용되는 상황에서 궁극적인 관심이 드러나는 내용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이 생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간 실존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제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접근에서 궁극적 관심이라는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틸리히에게 궁극적 메시지가 되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종교영역에서 특수하고 구체적인 로고스이지만, 둘째 아담으로서 보편적인 로고스일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계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내용에 대해서 답변해 줄 수 있다.

    철학적 질문은 신학적 내용에 의존하는 반면에 신학적 답변도 철학적 질문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는 대답들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물음, 곧 실존적인 물음과 상호연관 속에 있을 때만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실존의 상황이 결여되어 있을 때 ‘구원’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오직 상황의 비극적 실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구원이 요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적 질문과 신학적 답변은 궁극적 관심을 중심으로 상호의존성을 형성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철학은 인류보편의 존재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존재론적 접근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기독교는 특수한 계시적 상징을 해석하여 철학적 질문에 대답을 제공하므로 인류보편의 존재론적 접근을 더욱더 풍성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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