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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법 인생

(단편소설)


제1장– 동사의 종류


“…..어…..어…..Help me ………….please….HELP ME PLEASE!!”


김군의 입에서 영어가 터져나왔다. 김군에겐 영어는 돌연 발생한 암세포와 같았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만국공통어가 되어 지구위 모든 사람을 감염시키고는 영어에 미숙한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고약한 암덩어리라고 생각하는 김군의 입에서 드디어 영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김군의 머릿속으로 영어와 함께 했던 지난 날들이 쏜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10년전 미국으로 와 올해 서른 살이 되는 김 군의 영어 실력은 좀 유별났었다. 영어로 읽기, 쓰기는 가히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준이면서 말하기만은 경악스럽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로 바닥 수준 이였기 때문이다. 참 희안하게도 김군은 영어를 쓰는 원어민 앞에서는 영어로 단 한마디도 하질 못했다.


영어 문법책을 달달 외워 친구들이 그를 걸어다니는 영어 문법책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인생을 사는 동안 통틀어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단연 XX종합영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군은 미국인 앞에 서기만 하면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그런 김 군을 보고 만약 뇌속에 영어능력을 관장하는 뇌세포가 존재 있다면 그의 뇌 세포속에는 잉글리쉬 스피킹을 가능하게 하는 세포는 아마 0.01mg도 존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어떤 사람은 김 군이 선천적으로 뭔가 해볼려는 자신감이 결핍된 것이 아닌가 김 군을 나름대로 분석했고, 또 다른 사람은 김 군이 어릴때 영어를 쓰는 외국인 앞에서 남모를 수모를 겪어 엄청난 정신적 트라우마때문에 영어로 한마디를 하지 못한다고 추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여러 의견이 분분했지만 확실한 것은 미국 온지 10년이 넘었어도 김 군은 혼자 영어로 햄버거 하나 사먹지 못하는 ‘말하는 벙어리’라는 사실이였다.


그리고 더 확실한 것은 자기 똑똑한 맛에 사는 자존심 강한 김군이 영어를 스피킹하기 위해 과감히 체면을 내려놓을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는 점이였다. 아무리 LA한인타운에는 영어를 한마디 하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해도 꽁한 성격의 김군은 영어 스트레스때문에 미국 생활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었다. 영어 쓸 일이 생길 때마다 주위에 영어 잘하는 사람들에게서 매번 부탁하기도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원래 고집이 세고 내성적이라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집에서 혼자만 있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 군은 남들이 사춘기때 느꼈던 고독을 30대 나이에 더 절절하게 느꼈다. 특히 날씨 좋은 공휴일날 혼자 라면으로 한끼를 때울때마다  ‘도대체 영어가 뭐지?’라는 실존적 의문이 머릿속에 울렸고 의문뒤에는 어김없이 영어에 대한 고독, 서러움 그리고 분노가 스멀스멀 혈관을 타고 기어나와 온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김 군은 영어가 너무너무 원망스러웠다. 영어만 쓰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천국같은 곳일텐데 그놈의 영어때문에 자신이 생활하는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나날들이였기 때문이였다.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젠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였다. 다행히 김 군이 일하는 회사의 한국본사에서 최근 불경기로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기 위해 사무실 임대경비의 삭감을 단행해 꼼짝없이 재택근무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다른 직장동료들은 어떨지 몰라도 김 군에게는 그 일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도 싫고 남이 자신에게 신세지는 것도 싫었기에 재택 근무 한답시고 방안에 틀어 박혀 1주일 이상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김 군을 파견 보낸 회사는 한국 굴지의 아동용 교육프로그램 개발회사로 특히 영어교육용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는 회사였다. 김 군은 영어회화만 못하지 그 개발부의 책임자로 회사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였다. 회사에서 어떤 임무를 맡기더라도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처리를 잘해 평소 상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람이였다. 김군이 유전적으로 영어구사결핍증을 가진건 아니였다.


김 군의 집안은 대대로 존경 받는 유명한 석학자들이 가득한 집안이였다. 김 군의 아버지는 이름만 대도 다들 아는 유명한 교수였다. 어머니도 지방대학의 교수이자 여러곳으로 불려가는 인기 강사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부모의 전공 교수 과목은 똑같이 영어였다. 김 군의 여동생도 부모처럼 언어능력이 탁월한지 사범대학에서 전공을 영어로 해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오로지 김군만 영어를 못하는 것이였다. 영어 구사 실력이 탁월한 김군의 어머니는 가정부들도 영어테스트를 거친 이후에 집안에 들였다. 왜 가정부가 영어를 반드시 구사해야 하는지 김 군은 이해 하지 못했지만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진 어머니의 입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영어로 요구사항을 랩가수 처럼 쏟아 냈으므로 사실 영어를 못 알아 들으면 1주일 이상  김군의 집에선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건평100평이 넘는 김군의 집엔 가정부를 안뜰 별채에 상주시켜 놓고 일을 부렸는데 그중 김군이 주문만 하면 5분안에 모든 메뉴를 뚝딱 만들어 내는 요리의 달인인 자야 아줌마는 김군이 간난아기때부터 상주한 가정부였다. 당시 6.25가 지나간지 얼마되지 않았던 시대상황에서 고아였던 자야 아줌마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그때 미국이란 나라에 좋은 선입관을 가지게 된건지, 평소 미국이라면 천국이라도 되는 곳 마냥 좋아하고 찬양했다. 그리고 그나이대의 아줌마와는 달리 영어도 일제식민지 발음이지만 곧 잘 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남편을 일찍 여윈 자야 아줌마에겐 두딸이 있었다.


첫째는 김군과 동갑인 세라였고 둘째는 세희였다. 특히 첫째 세라는 얼굴도 귀엽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지만 똑똑한 여자아이였다. 콧대높은 도도함으로는 둘째라면 서러워 할 정도인 김군의 어머니도 세라를 귀여워 해 집에 찾아온 모든 손님들에게 세라 칭찬을 입이 마를 정도로 했다. 김 군은 첫 눈에 세라에게 반했다. 매주 토요일 집안 대청소를 끝내고 부엌식탁위에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고 있는 그녀를 김 군은 몰래 지켜 보았다. 검디 검은 단발머리 속으로 내보이는 복숭아 빛깔의 뒷 목덜미는 김 군의 마음이 저리도록 설래게 만들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어머니가 준 헌 옷이였지만 그녀가 입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도 명품같은 고귀함이 넘실거렸다. 그녀가 앉았던 의자 위에는 생생한 향기나는 꽃이 필 것 같은 말도 안되는 상상도 했다. 또한 그녀가 내 뱉은 모든 공기도 청정하게 정화된 깨끗한 산소라고 착각 될 정도로 김군은 세라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김 군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감사했다. 영어는 뷰티플이라고 달랑 하나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동사의 종류가 많은 영어와 상대적으로 형용사가 발달한 한국어로 세라가 아름답다는 말을 영어보다 더 많이 표현할 수 있음을 감사해 했다.

 

2장-동사의 시제


인생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제로 나눠 진다. 과거 현재 미래중에 최고로 행복했던 인생의 순간이 언제였냐고 누가 김군에게 묻는다면 김군은 자신있게 과거라고 답할 정도로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집에 컬러 텔레비젼이 있으면 잘 사는 집안으로 분류되던 때에 고래등같은 김군의 집엔 일제 소니 컬러 텔레비젼이 두 대씩이나 그것도 베타방식의 비디오플레이어와 함께 거실과 안방에 떡 하니 각각 자리잡고 있었다. 인테리어에 일가견이 있는 김 군의 어머니는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면서 기념으로 사온 진기한 장식품으로 집안 곳곳을 꾸몄다. 친척들과 김군 부모의 친구들이 시시때때로 집구경을 올 정도로 집 안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아침식사를 반드시 베이컨과 계란후라이를 모닝커피와 함께 곁들여 먹어야 되는 고상한 아버지의 취미도 고상한 고미술품 수집이라 집은 마치 작은 박물관 수준이였다. 시간이 갈 수록 집구경 온 사람들의 수와 머물다가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고 길어졌다. 김 군의 부모는 전혀 피곤한 기색없이 손님들을 더 많이 초대했기 때문이였다. 김 군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싫었다. 평상시에는 서로 말수가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님만 집에 오면 그들과 대화 할때 짧은 영어 단어를 곁들어 시끄럽게 떠들었기 때문이였다. 김군의 부모는 워러, 글래스, 디쉬정도는 물론이고 집 구경온 사람들을 뜨악하게 만들어 버리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급 영어 단어들도 시도 때도 없이 남발했다.


김군은 아주 어릴때부터 그렇게 영어단어들을 봉두난발해대는 가식적인 부모가 부끄러웠고, 생전 들어 못한 영어 단어들 앞에 표정관리를 못해 당황해 하는 초대된 손님들을 측은하게 생각했다. 김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이 뿌린 영어단어들 중 상대방이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만 하면 얼마나 얼굴이 환해지는지 이 세상 어느 것도 견줄수 없는 궁극적 기쁨을 상대방이 모르게 서로 나누었다.  어린 나이의 김 군이 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표정은 참으로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기이했다. 그런 부모를 처음에는 말리고 싶었지만 김군이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손님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어처구니 없었기 때문이였다. 아무리 거물이고 사회적 위치가 높아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낚싯밥처럼 던져 놓은 어려운 영어 단어에 영락없이 걸려들면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다들 굽신거리면서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교육정도와 교양정도가 높으면 높을 수록 마치 사이비종교에 빠진 것같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발바닥까지 핣을 자세로 비굴해졌다.   


“나도 닥터 김처럼 브라이트하면 참 해피할텐데”


“닥터 김의 와이프님은 내 마음을 뷰디플하게 메이킹시키는 것 같아요.”


제 3자가 우연히 듣는다면 박장대소할 저질 코메디같은 상황이 매일 집안에서 벌어졌다. 차츰 사춘기가 다가오자 그런 집안 분위기가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모이지만 영어를 쓸 때만큼은 진실이 없어 보이는 속물같아 보였다. 그래서 김군은 국민학교 내 내 반에서는 물론이고 전교에서도 일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재였지만 영어를 시작하는 중학교 때부터는 알 수 없는 반항심에 영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형편없는 김군의 영어성적은 아쉬운 것 없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가질수 있어 행복했던 김 군을 차츰 고난의 가시밭 길로 내몰아 갔다. 중학교 때는 영어성적이 하위권이라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으나 고등학교에 와서는 상황이  급변하였다. 한국은 학교에서 배우는 여러가지 과목중에 영어와 수학은 인생의 운명을 나누는 아주 생명 같은 것들인데 김 군에겐 영어실력이 전혀 없었으므로 반쪽 실력만 가진 반쪽 인생처럼 차차 경쟁에서 낙오 되어갔다.


3장-부정사


김 군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불법과외는 받았지만 알수 없는 영어에 대한 거부감은 날로 더해 갔다. 특히 어머니는 회유5%, 협박 95%의 비율로 김 군에게 영어공부하라고 하루가 멀다하고 들들 볶았다. 그 방법이 날이 갈수록 비열해지고 악랄해졌다. 그로인해 한참 예민한 김 군의 마음에 깊은 상처와 반항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가출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영어 공부하는 시늉만 해주면 집처럼 편한 곳도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약삭빠르게 깨달은 김 군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똑똑한 머리를 최대한 가동시켜 시험칠때 마다 컨닝반 찍기반으로, 그럭저럭 영어 성적이 대학교 갈 정도는 되도록 올려 놓기는 하였다. 영문법에는부정사不定詞  라는 것이 있는데 인칭, 수, 시제에 제한 받지 않는 동사를 말한다. 김 군은 사람도 그런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환경에도 굴하거나 제한 받지 않는 부정사같은 사람. 생각해보면 김 군의 부모도  부정사같은 사람들 이였다. 영어를 인생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어떤 환경과 공간에서도 굴하지 않고 영어 만을 강조하니 말이다. 사실 김군의 부모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을 부모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김 군은 생각했다. 영어는 단순하게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 소통을 하는 언어였는데 한국에서 들어와서 그만 부귀영화의 수단이 되어 버린 탓이였다.  아무것도 못해도 영어만 잘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다 보니 차라리 모국어를 포기한 원정출산도 생겼고, 소문에 강남같은 곳에서는 영어 발음을 위해 ‘혀수술’도 감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영어가 한국내의 수많은 입시학원과 어학원에서 창출해 내는 경제효과와 시장규모는 따로 조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어마어마할 것이다. 요즘 연예인도 영어를 못하면 대성은 커녕 한류에 끼지도 못한다고 하니  인류가 이 지구위에 존재하는 한 영어는 국제 공용어로 영원히 존재하면서 부정사처럼 시간과 공간에 제한 받지 않고 변함없이 김 군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김군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그나마 이세상에 세라가 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장-동명사


수학적으로는 4가지중에 답을 고르는 것보다 2가지중에서 고르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나, 졸업후 인생의 실전에서 자기앞에 두 가지 양자택일의 선택만이 주어진다면 4지선다형 문제에만 익숙한 사회 초년병들은 대부분 당황해한다. 그러나, 영어를 싫어하는 김 군의 가치 판단의 기준은 모조리 영어를 써야 되는 상황이냐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냐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남보다 한결 쉽게 인생의 결정들을 내릴 수 있었다. 김 군은 고등학교 졸업후 전공을 ‘국문과’로 정했다. 전공 공부를 하는데 영어가 전혀 필요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였다. 아들이 국문과를 택하자 당연히 김 군의 부모들은 길길이 날뛰면서 말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대학입학금 원천징수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재수를 시킬 망정 절대로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는 별 필요없는 ‘국문과’같은 데를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의지때문이였다. 그래도 남들이 들으면 인정할 만한 일류대의 ‘국문과’인데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한 김 군은 그럼 군대라도 들어가버리겠다고 강짜를 놓았다. 그래도 씨가 먹히지 않자 한번 온 집안이 뒤집히도록 부모와 한 바탕 소동을 일으킨뒤 가출을 해 버리고 말았다. 마치 영어를 종교처럼 떠받드는 광신도같은 부모들이 한심하기도 했고 앞으로 자신은 더 이상 평생을 영어라는 종교 밑에 있을 순 없다는 판단하에서 가출을 결정한 것이다. 지방에서 자취를 하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집으로 피신한 김 군은 몸에서 땀이 알코올로 흐를 정도로 매일 술을 마셔댔다.  

가출 한지 한 달이란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만이 김 군의 마음에 그리움으로 떠올랐다. 그건 바로 세라였다. 그녀를 머리속에서 지우려고 술을 입에 더 때려 넣어 보아도 취하기는 커녕 뇌속에 들어앉은 그녀의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명료해졌다. 술이 아무리 취해도 오로지 세라의 얼굴만 김 군의 뇌리속에 한번 박히더니 떠나 갈 줄 모르는 것이였다.

“너 그러다가 뒈진다”

매일 술을 마셔대는 김군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친구가 한 마디 했는데 김 군 자신이 생각해봐도 정말 뒈질 것 같았다.  

“너 군대 들어간다면서?. 그 꼬라지로 신체검사도 못 받겠다.”

신체검사도 신체검사지만 자신의 이 꼬라지로는 세라를 만나는 것은 무리라는 점이 더 신경쓰였다. 김 군은 가진 돈도 떨어지고 집안 분위기도 살필겸해서 몇일 동안 술을 끊고 몸을 더 추스린뒤, 김 군은 동생에게 삐삐를 쳤다. 보고 싶다고 집 앞 제과점으로 나오라고 약속을 하고는 약속시간보다 더 일찍 나가서   기다리는데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동생이 제과점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라도 같이 따라 들어오는 것이였다.

 “어?..세라 네가 웬일이야?”

한달정도 못본 사이 두배 정도 더 이뻐진 세라는 엉거주춤하게 의자에 앉으면서 아무 말 없이 김 군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오빠 가출 하고 난뒤 나도 얼마나 감시하는 줄 알아? 세라언니와 같이 아니면 밖에 내보내지도 않아.”

여동생은 그러면서 시시콜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김 군에게 했지만 아무말도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세라를 바라보는 시각을 위해 청각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였다. 한참을 그렇게 세라를 바라보다가 비장한 표정으로 김 군은 동생에게 군대에 가겠다고 말했다. 마치 전쟁에 참전하는 것처럼 .  

“가고 싶으면 가. 그런데 군대 가고 싶으면 그냥 가버리지 왜 불러내고 지랄이야 ?”

싸가지 만발하게 대답하는 동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곁눈으로 김 군은 세라의 반응을 살폈다. 세라는 조용히 탁자위에 놓인 커피만 홀짝거리고만 있었다. 김 군은 그때 그녀의 얼굴에서 마치 영어의 동명사처럼 동사도 되고 명사도 되는 야누스적인 신비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마치 성스럽고 고귀하고 순결한 동정녀와 배꼽을 드러내고 유혹을 추는 페르시아의 무희가 묘하게 한몸처럼 복합된 것 같은 신비로움이 그의 마음을 강타했다. 너무나 강렬해서 김군의 손가락 근육이 불위의 오징어처럼 오무러들면서 들고 있던 포크와 빵을 바닥에 떨어뜨릴 정도였다.

“생쇼하고 있네”

동생은 자리에 일어나면서 눈을 흘겼다.

“내가 빵값은 낼테니까. 오빠는 제발 군대가서 인간이 되어 돌아와 알았지? 언니 가자”

김 군은 동생과 세라가 일어나자마자 순간적으로 세라양의 체음을 맡기위해 자신의 시각과 청각을 접고 온 몸의 에너지를 후각에 집중시켰다. 0.5초 동안 맡은 세라양의 향기를 음미하기 위해 동생과 세라양이 제과점을 나간뒤에도 김 군은 0.5시간동안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세라양의 향기는 숫처녀의 풋풋하면서도 관능적인 느낌이 동시에 들어 있는 향기였다. 김군은 세라양을 만나고 난 뒤 연료를 충분하게 공급 받은 터보 엔진처럼 힘차게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1급판정을 받았다. 김군은 신병훈련을 위해 논산 훈련소로 들어갔다. 김군의 집도 군대갔다오면 김군이 정신차릴 수 도 있다는 생각에 입대를 말리지 않았다.  김 군은 세라만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힘들다는 신병 훈련기간을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김 군의 기쁨은 체 오래 가지 않았다. 훈련뒤 ‘캬츄샤’로 차출되었기 때문이였다. 김 군과 같이 훈련받은 동료들은 ‘남들은 시험쳐서 들어가려는 캬츄사에 걸린 김 군에게 행운아라며 혀를 내둘렀고 김 군은 군대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영어의 올가미에 머리를 내둘렀다.     


5장-분사


영어를 못하는 김 군의 카츄사 이병생활은 지옥 바로 그자체였다. 전임들이 모여서 캬츄사라면 미군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불가피한데 김 군이 영어를 너무 못하니 상부에 편지를 써서라도 김 군을 재배치시키자는 회의까지 하였다. 김 군은 전임들이 재배치를 요청하는 편지를 쓰는 동안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별종이라면서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 회신이 왔는데 상부에서는 올려진 편지가 전례가 없다고 그대로 제대까지 김 군을 카츄사로 그대로 두라는 명령이 담겨있었다. 답장을 받고나서 김군은 열받은 전임들에게 더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상사들은 김 군을 때리다가 자신의 손도 아프고 지치니까 김 군의 하급병들에게도 김 군을 패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저 자식 입에서 영어로 비명 나올때까지 두들겨 패!”

그 중 제일 독종인 한 상사는 김군의 눈이 찢어지고 입술에서 피가 나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듯이 날 뛰었다. 사실 독종상사와는 김 군과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독종상사는 군에 들어오기전 ‘영양사’로 일류호텔요리사를 꿈꾸던 카탈스런 입맛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처음 김군을 만난 신고식에서 라면을 끓이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한번도 라면을 끓여본 경험 없이 귀하게 자란 김군은 그만 국물이 과도한 물라면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물라면인 독종상사는 그날로 김군과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독종상사 이외에 다른 부대원들은 영어를 신기할정도로 못하는 김 군을 마치 장애인 대하듯 따스하게 대해줬다. 다들 측은한 눈으로 독종상사의 눈을 피해 김 군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 주었다. 같은 부대에 소속된 미군들도 김 군에게만은 영어를 쓰지않고 어디서 배운지 알 수 없는 한국말로 띄엄띄엄 말했다.

“킴! 빨리 빨리해”

자신에게 한국말을 하는 미군들을 보면서 김 군은 그런 미군이 귀엽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영어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영어로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김 군은 도대체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아주 갓난아기때 정신적인 충격때문에 영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정신과 의사같은 분석도 해보았다. 적자생존의 원리가 존재하는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계라면서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한 자신의 ‘영어구사 분자’는 기원 2000여년의 한반도역사가 흐르는 동안 왜 진화되지 않았을까 김군은 참으로 궁금했다. 숫제 어딜가나 장애인보다 못한 차별대우를 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하는 이 한국사회가 너무 부당하다고 김군은 생각했다. 김군은 잠자리에 누워  

영문법에 보면 단어에 –ED와 –ING가 붙으면서 과거분사, 현재분사가 되어 동사와 형용사의 성질을 나누어 가지므로 분사分詞 라고 불리는 문법이 있는데 –ED와 -ING처럼 척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영어로 되는 컴퓨터칩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의 날개를 펴보았다.


6장- 조동사


김 군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영어를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독종상사가 제대를 앞두고 김 군을 잡겠다고 작정을 아예 하였는지 매일밤마다 영어회화공부라는 명목으로 김씨를 못살게 굴었다. 김 군은 밤이 되면 화장실의 소방등밑에서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계속 반복하였다. 누군가가 화장실에 들어오면 김 군은 얼른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기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 들어온 같은 막사동료들의 대화에서 독종상사가 시골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집의 농사일을 돕다가 군대에 입대했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되었다. 김 군도 독종상사의 영어실력이 중학생수준이고 문법도 엉망이라고 생각은 했었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독종상사는 김 군과는 달리 미군들 앞에서는 머리속에 들어 있는 영어 몇 마디를 허풍스럽게 아주 잘 떠들어댔고 신기하게도 미군들은 그 허접한 영어를 알아들었었다. 김 군은 그제서야 자신의 문제가 몸속에 영어를 말하게 하는 DNA가 없는 것이 아니라 터무니 없이 높은 자존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존심을 죽이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체면을 접어두고 독종상사처럼 말도 안되는 영어를 삐에로같이 나불대야 하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 영어로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김군은 생각했다. 한국사회는 가진 돈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계급사회다. 계급의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북한도 공산주의 내지 주체사상을 가장한 신정계급사회다. 양반, 귀족, 왕족이 없더라도 한국은 돈만 있으면 대통령도 사고, 학위도 사고, 명예도 사들이는 것이 가능한 계급사회이다. 그런데 그 돈이 수중에 굴러들어오게 하려면 영어를 숭상하는 한국에선 영어를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영문법에서 동사를 도와주는 조동사들처럼 이 한국에서 돈을 모으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영어였다. 조부모때부터 미제를 사들이고, 영어로 집안을 온통 덧칠하고 자식들이 영어만 잘하도록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고, 영어를 시도때도 없이 말할때 섞어서 고상하고 유식하게 보이도록 갈고 닦았단 김 군의 부모들이 바로 그 증인들이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깨달아지자 김 군은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하는 만큼의 영어실력만 되어도 ‘잘난 부모’덕에 어느정도 한국사회에서 대우를 받을텐데 인생의 조동사격인 영어를 이렇게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기까지 했다. 김군은 자신의 이 영어 못하는 병을 고칠수만 있다면 자신의 혼이라도 팔텐데 한탄을 하며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다.


7장-태


동사(동작)와 그 주어 또는 목적어와의 관계를 태態라는 한 단어로 말할 수 있는데 김 군과 영어와의 이 질기고도 어이없는 관계를 단어 하나로 표현하자면 묘하다의 묘妙자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묘하게 김군이 영어 공부 열심히하면 영어 쓸일이 없어지고 안 하면 환경이 영어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였다. 영어를 해야 겠다고 독하게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그럭저럭 영어로 말 할 수 있을때가 된 무렵 독종상사가 휴가갔다가 음주운전( 그것도 경운기다! )으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사고가 나자 부대에서는 어차피 말년이라고 그대로 병가 처리해서 독종상사를 일찍 제대시켜 버렸다. 그 바람에 김군이 최고참이 되었는데, 김 군이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던 하급병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미군들과의 업무를 일사분란하게 처리했다. 그렇게 되자 독종상사때문에 열심히 영어를 공부한 노력이 무색하게 되었고 결국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말년 병장생활을 하다가 제대하게 되어 버렸다. 김군이 제대 해보니 대부분의 친구들은 졸업을 해버렸고 후배들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들과는 대화도 안통하고 어울릴 수도 없었다. 김 군은 마땅히 갈데도 없어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김 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카츄사로 제대한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며 잔치까지 벌일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가정부였던 자야 아줌마와 그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김 군의 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간호 보조학원으로 들어간 세라와 그녀의 동생이 나름대로 돈을 벌게 되었으므로 가정부 생활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김 군의 여동생도 대학생이 되었는데 한국에서 대학생이 할 일이라고는 밖에서 술 마시고 노는 일 밖에 없어 평상시에는 집안에서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강의로 각자의 서재에서 나오는 일이 없어 얼굴도 잊어먹을 정도였다. 김 군은 거의 일년동안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영어의 스트레스가 없는 김 군만의 공간에 틀어박혀 그나마 독종상사 덕분에 공부했던 영어마저도 머리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게 되었다. 할 일이 없으니 식성이 자라기 시작했다. 집안의 냉장고에는 미국인 식성에 맞는 고칼로리 육류식품들이 가득 차있었는데 김 군은 내키는 데로 입에 털어넣었다. 급기야는 몸매까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누워서 엎어지면 혼자 바로 돌아누을 수도 없어 숨이 막히게 되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정도였다. 폭식은 하지 않았지만 제어를 하지 못하고 계속 입에 뭔가를 넣으니 시간이 갈 수록 몸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새벽2시가 다 되어 부모 몰래 집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오던 동생이 부엌을 통과하다가 냉장고 앞에서 고기를 꺼내 혼자서 로스구이를 해먹는 육중한 김 군의 몸을 보고 공룡화석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괴성을 질러댔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조선 시대도 아닌데 무슨 갓타령이야?         

머리 돌리기도 힘든 듯 동생을 보지도 않고 입에 고기를 털어넣으며 김 군은  말대꾸했다.

“너 미쳤어? 군대 갔다오면 인간될 줄 알았더니 공룡이 되서 돌아왔네.”

동생은 측은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면서 김 군이 앉아있는 식탁옆으로 다가와 김 군의 신경을 긁어대는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공룡들이 뇌가 작아서 멸종했다고 하던데…오빠를 보니 그말이 맞는 것 같아”

“저리가라.”

“저리가라를 영어로 한번 해봐 그럼 저리가줄께.”

처음에는 동생이 술이 취한 것 같아 무시하려 했던 김 군은 영어라는 동생의 말에 용수철 튀듯 발끈해서 자리에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는 김 군의 무릎에 식탁끝부분이 걸리면서 그만 식탁전체가 엎어지고 말았다. 식탁이 엎어지면서 식탁위에 놓인 로스구이가 사방천지로 튀었는데 묘하게도 뜨거운 기름과 함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동생의 허벅지 위에 몇 점이 떨어졌다.

“으악!!!”

화상을 입은 듯 김 군의 동생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8장-법


김 군의 눈에는 전혀 1도이상의 화상으로 보이지 않는데 동생은 마치 극3도 화상으로 데인 것처럼 고함치고 목을 뒤로 30도 이상 넘기면서 발광해댔다.  김 군은 급히 동생을 업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어? 여기 웬일이죠?”

집에서 제일 가까운 종합병원의 응급실에 들어서자 응급실 입구에서 자야아줌마의 딸인 세라의 동생과 마주쳤다. 김 군은 잠시 자기 앞에 마치 세라가 서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오랜만이네. 여기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거야?”

“아뇨 아직도 간호보조원으로 인턴수업중이예요.”

그러면서 그녀가 배시시 웃었는데 마치 세라가 웃는 것 같았다. 김 군은 세라 동생의 얼굴에서 자꾸 세라가 읽혀지자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붉어졌다. 영문법에서 법(MOOD)의 정의는 ‘문장 내용에 관한 말할 이의 태도를 나타내는 용언의 형태 변화’인데 마치 MOOD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 중에 조금이라도 세라와 관련이 있다면 그것들은 김 군의 마음속에서는 모조리 세라로 아름답게 형태가 변화되는 것 같았다. 웬만해서는 남에게 관심을 나타내지도 않았는데 김군은 세라의 안부를 적극적인 태도로 물어보았다.

“언니는 벌써 간호보조사 자격증따고 여기서 근무하고 있어요.”

김 군은 이제 여기에 오면 세라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있어? 왔는 김에 보고 싶은데.”

“좀 안 좋은 일이 어제 있어서 오늘 안 나왔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

김 군의 놀란 얼굴로 변했다.

“여기서 수술 하신 당뇨병환자가 합병증으로 다리를 잘랐는데 자신의 생각보다 다리를 더  잘랐다고 환자분 가족들까지 다 몰려 와서는 병원전체가 떠나가도록 난동을 부렸어요.”

“그래서?”

김 군은 다그치듯 물었다.

“언니는 병원사람들과 함께 싸움을 말리다가 넘어져서 조금 다쳤어요. 그래서 집에서 본의아니게 쉬게 되었어요.”

“도대체 얼마나 더 잘랐다고 그래?”

“3센티미터정도요.”

“어짜피 자를 다리였는데 3센티 더 잘랐다고 사람이 다칠정도로 그 난리를 부렸대?”

“그러게 말이예요. 그런데 언니는 뭐 그 사람 입장에서 가정해보면  3센티도 엄청난 길이였을 것이라고 두둔하던걸요.”

김군은 세라가 그러고도 남을 따뜻한 마음의 여자라고 생각했다. 김 군은 세라의 동생이 가버리고 난 뒤에도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9장-명사       


김군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군의 아버지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미국 대학교의 교환 교수직을 정식 수락했다는 것이였다. 앞으로는 문 밖에 나서는 동시에 영어만 써야 된다는 생각에 김 군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동생과 김씨의 어머니는 복권당첨된 사람들처럼 부둥켜앉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김군의 아버지도 합세해서는 부둥켜안고 조국에 금메달을 안긴 올림픽선수처럼 감격해 했다. 김 군만 그냥 공허한 눈빛으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3년이상은 머물러야 하니 이민간다는 생각으로 이삿짐을 싸자고….”

아버지의 교환 교수직 소식을 듣다가 ‘이민’라는 단어 하나가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김 군의 머리속에는 ‘이별’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누가 들으면 시작도 하지 않은 ‘사랑’에 무슨 ‘이별’이냐고 말하겠지만 김 군은 자신과 세라의 사랑이 ‘만남’과 ‘이별’의 순서가 뒤바꿔져 있는 특별한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언제 처음으로 세라양을 만났는지 그리고 언제 김 군의 마음속에 세라양이 들어왔는지 그 ‘시작’을 김 군은 전혀 기억해 낼 수 없었으므로 그 ‘이유’만으로 충분히 특별했다. 세상 연인들은 평범하게 만나서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 자르고, 한강에서 유람선 타고, 기차여행하고, 의자가 180도 젖혀지는 극장에 가서 영화보고, 손 잡고, 키스하고, 싸우고, 발렌타인데이때 쵸콜렛주고, 그러다가 사소한 일로 다투고 울고 술마시고 화해하고 몇번 반복하다가 실증나면 바이바이하는 그런 흔한 사랑을 하지만 김 군은 세라양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여행이나 밖에 야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지,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지 등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알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그녀와의 사랑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미국으로 이사 하게 되면 영어회화보다 세라를 앞으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김 군을 괴롭혔다.  

‘세라’

영어때문에 미친 세상에 치명적인 ‘영어구사 결핍증’을 앓아오면서 순탄치 못한 삶을 산 김군에겐 ‘세라’란 고유명사는  ‘영어구사 결핍증’의 항생제이자 치료제였던 것이다. 이 치료방법을 왜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일까 왜 아버지가 교환교수로 떠나게 된 이때에 그걸 깨닫게 된 걸까 수많은 질문들이 김 군의 머리속에서 꽈리를 틀고 또 틀었다. 그러나 곧 세라와의 사랑은 잘 정돈된 시간의 순서를 포기해야 하는 특별한 사랑이므로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덮어두기로 했다.


10장-관사


온 집안 식구와 친척, 친지들이 총 동원하여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김 군은 세라를 어떻게 하면 한번 만날수 있을지 기회를 엿보았다. 동생은 마치 결혼식 준비를 하는 것처럼 이사 준비를 하고 있어 동생을 통해 세라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세라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특별하게 뾰족히 떠오르지 않았다. 김군은 제대하고 처음으로 유심히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보았다. 김군은 자신이 살이 너무 쪘다고 그제서야 느꼈다. 세라가 살찐 자신의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영문법에서 관사만큼 공부하기 까다로운 부분도 없는데 그것처럼 몸에 찐 지방도 한번 찌면 빼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군대있을 때처럼 매일 운동이라도 할 걸 김군은 후회가 막급해졌다. 뱃살을 손으로 쥐고 흐드는데 기억의 비행기는 예전 자야 아줌마가 김 군의 집에 가정부로 있던 과거의 공간으로 날아갔다. 자야 아줌마가 맛있게 요리 해준 밥 생각에 침이 고였다. 그때 아줌마가 해주던 삼시 세끼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별미 중에 별미였다.  김 군의 어머니는 미국 방식이라며 긴 식탁에 다 같이 앉아 식사하는 것을 즐겼다. 자야 아줌마와 두 딸도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때 세라이 식사하는 모습은 게걸스럽게 먹는 김씨의 여동생과는 판이하게 기품과 교양이 흘렀다.

‘그래! 먼저 저녁식사를 한번 하자고 말해봐야지.’

김 군은 세라의 동생이 인턴교육을 하고 있는 병원으로 가서 세라양에게 어떻게 연락 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세라의 동생은 김 군 집안과는 오랜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라 의심없이 세라의 삐삐번호를  알려주었다. 세라의 삐삐번호를 알아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세라와 결혼하는 결혼식장으로 입장하는 길같았다. 이삿짐을 어서 싸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김군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호흡조절을 한 뒤 세라에게 삐삐를 쳤다. 삐삐를 치자마자 김군이 당황할 정도로 금방 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군은 다쳤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냐고 쭈빗거리며 안부부터 물었다. 그러자 세라는 별일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엄마로 부터 김 군네가 미국으로 이사간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밝은 목소리로 덧부쳤다. 그리고는 미국 가기전에 한번 만나자고 김 군이 묻기도 전에 세라가 먼저 제안을 해왔다. 당장 만나자고 약속을 밀어붙이고 전화를 끊은 김 군은 군대에서 배운대로 신속하게 머리손질과 입고나갈 의상을 선택하고  만나서 서먹서먹하지 않토록 서점에 가서 ‘최신유머집’이란 책도 구입했다.


11장-대명사


군대 나와서 처음으로 만난 세라의 모습은 한참 또래 여자들에게 유행하는 일본풍의 소녀라기 보다는 발랄한 아메리칸스타일의 대명사인 팝 여가수 ‘데비 깁슨’이나 ‘티파니’ 같았다. 김군의 마음에 세라도 그녀의 어머니처럼 미국을 동경하는 건가라는 불길한 의문이 문뜩 들었다. 나오라는 식당도 이태원의 아메리칸 스타일의 음식점이였는데 세라는 역시 미국음식의 대명사인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맥주와 함께 시켰다. 김 군은 미국음식만 보면 입에서 구역질이 나왔으나 억지로 세라와 같은 음식을 시키고 어색한 포즈로 식당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여대생으로 보이는 한국여자와 머리가 짧은 미군들이 서로 끌어안고 입으로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치료를 해주고 있었다. 김군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영어 하나 할 줄 아는 재주 밖에 없는 저런 미국쓰레기들이 한국이 영어 숭배국이라는 것을 어떻게 용케알고 들어와 함부로 한국여자들을 유린하다니 도대체 한국남자들은 뭘하고 있는지 자괴감마저 들 정도였다. 김 군이 카츄샤로 있을때에도 많은 한국여자들이 미군부대안으로 영어를 배운다는 목적으로 들어와서 잉글리쉬 를 바디 랭귀지로 주로 미군들에게서 배우는 것을 많이 목격했었다. 다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미군들에게 용돈까지 쥐어주면서 몸도 덤으로 얹어주는 어이없는 영어숭배자들이라고 김 군은 속으로 얼마나 욕을 해댔는지 몰랐다. 그런 한국여자들도 자격지심인지 한국남자들을 더 우습게 보았다. 세계 어느 곳에도 일어나지 않는 기이한 일이 한국땅 한복판에서 영어때문에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김 군의 마음속에는 영어에 대한 한 없는 증오심이 생겼다. 도대체 영어가 무엇인데 순결한 한국여인의 정절을 빼앗아가는지 연구소에 들어가서 연구하고 논문 쓰고 싶은 생각이 벌컥 일었다. 자신이 영어로 말을 못한다고 인생을 살면서 받았던 수많은 멸시와 핀잔이 주마간등처럼 김 군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열등인간 취급을 받으면서 흘렸던 눈물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커다란 분노로 눈알이 빨갛게  되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부들부들 떨며 식당주위를 바라보고 있던 김군에게 세라가 꺼낸 이야기는 식당 전체가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였다.

“오빠. 내 남자친구를 불렀는데. 어? 저기 오네. Steve! Right Here! ”

세라의 남자친구는 김군이 지구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종의 대명사격 인종인 새까만 흑인이였다.  


12장-형용사


세라와 헤어진 뒤, 김 군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살쪘던 모습이 피골이 상접할 정도가 되었다. 술을 하도 마셔 병원에도 몇 번 실려갈 정도였다. 김군의 부모들은 김군의 몸이 걱정되기 보다 미국으로 이사가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 안절부절하였다. 김 군의 동생은 김 군이 링겔을 꽂고 누워있는 병실까지 와서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면서 어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길 학수고대했다. 김 군은 술로 인한 심한 구토로 탈수현상이 일어났다는 병원의 진단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세라가 준 충격때문이였다고 굳게 믿었다. 병실에 혼자 누워 세라와 그녀의 미국인 남자친구 스티브만 생각하면 분노에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스티브가 아니 영어가 세라를 뺏아갔다는 생각에 머리가 어질해지면서 눈앞에 작은 소용돌이 같은 것이 돌았다.  

‘영어가 사랑하는 세라도 빼앗아 갔어…흑흑..절대로 영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김 군은 이제 뼈속 깊숙이 분노를 느낄정도로 영어가 혐오스러웠고, 미국도 가기가 싫어졌다. 김군은 미국에 갈 수 없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 평상시 영어를 섞어 말하면서 교양스럽게 말씀을 하시던 김군의 어머니는 길길이 날뛰면서 김 군의 머리채를 잡고 나죽고 너죽자며 쥐고 흔들었다. 아버지도 그러러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동생은 신내림받은 무녀모양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김 군은 자신을 국가 반역죄나 사회기강 전반을 흔드는 극악한 죄를 저지른 죄인처럼 다루는 가족들이 야속했다.


제13장-부사


마치 애완동물 처럼 비행기에 실려 미국에 도착한 김 군과 가족은 동부의 뉴져지주 대학가근처 한 아파트에 이삿짐을 풀었다. 도착해서 약 6개월간 가족들은 미국생활에 적응을 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김 군은 딱히 하는 일 없이 하루 온종일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면서 아파트 안에서만 빈둥거렸다. 한동안 김 군은 별다르게 미국인들과 접촉할 일이 없어 입국 당시 공항검색대를 통과한 이래로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사실 공항검색대에서도 비자와 입국서류만 볼 뿐 검색대원이 이례적으로 한 마디도 영어로 김군에게 묻지않아 엄연히 따지면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몇 개월을 지낸 셈이였다. 대신 가족들이 열심히 김군의 몫까지 영어를 해댔는데 김 군의 아버지가 식당에 가서 햄버거 ‘Three’를 ‘Thirty’로 잘못 발음하는 바람에 졸지에 햄버거를 30개나 사게된 일도 있었고 피자나 샌드위치샾에 가기만 하면 종업원이 토핑을 뭘할거냐는 질문에 무조건 ‘Everything’이라고 말해 언제나 거대한 피자와 육중한 샌드위치를 먹게된 일도 종종 있었다. 김 군은 그런 가족들의 무안한 상황들을 같이 겪으면서 더욱더 영어를 할 엄두를 내질 않았다. 친구도 없이 외토리로 지내는 김 군이 딱해보였는지 김 군의 아버지는 아파트에서 가까운 한인이 많이 모이는 한인 교회에 생전처음 예배라는 것을 보러 가기까지 했다. 김 군은 교회에서 마치 동사를 도와주는 부사같은 같은 한인 동포들을 만날 수는 있었다. 그들과 교류하면서 영어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김 군은 접하게 되었다. 영어를 못한다고 핀잔주고 차별하는 사람은 원어민이 아니라 반드시 같은 한인들끼리라는 사실이였다. 그리고 한인이민1세나 1.5세의 자녀는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대학교에 들어가기 까지는 어린아이 수준의 유치하고도 제한된 어휘로만 영어를 구사하는데 그런 어린아이의 부모일수록 자신의 아이가 영어권이라고 자랑하면서 영어를 아주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이해가 안되는 점은 미국에 산지 오래된 한인일 수록 영화관에서는 절묘하게 다른사람이 웃는 장면에서 따라 같이 웃었으면서 나중에 극장밖에 나와 무엇이 웃겼는지 김 군이 물으면 가르쳐주기는 커녕 막 화를 낸다는 사실이였다.  


14장-일치와 화법    


미국에 온지 3년이 흘렀을때도 김 군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영어를 하지 않고 미국 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 불편해 몇일동안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밤낮으로 영어공부를 해도 이상하게 미국인 앞에 서기만 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또한 김군이 아무리 생활영어문장을 꿈에 나올 정도로 외어도 모든 미국인들은 김군에겐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질문을 영어로 해댔다. 특히 미국인이 ‘what?’ ‘Excuse me?’라고 김군에게 묻는 순간에는 바디랭귀지도 불가능하게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만나는 모든 미국사람들은 김군을 무시했고 같은 한인들도 김 군을 따돌렸다. 영어에 대한 분노를 접고 영어와 타협을 하려하면 저만치 멀어지고 영어를 저주하면 할수록 김군의 처지는 점점 힘든 상황속으로 치달으니 김군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교환 교수 계약기간이 끝나길 손 꼽아 기다리던 김 군에게 김 군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계속 머물 방법을 찾고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했다. 마른 날에 날벼락 맞은 사람처럼 김 군은 가족들에게 울고불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설득 했지만 미국생활에 완전히 만족한 모든 가족들은 일치된 목소리로 가고 싶으면 혼자서 가라고 김 군을 묵살했다.


15장-전치사


김 군은 쓸쓸하게 혼자 한국으로 귀국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세라를 찾아가 볼까 김군은 망설였다. 하지만 영어광풍이 더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한국에서 분명 변해있을 세라를 만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친척집에 머물면서 취직시험공부를 했다.  공부에는 일가견이 있던 김군은 첫지원한 곳에 당당히 합격을 했다. 한국에서 일류 기업인 한국재벌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정신없이 신입사원 시절을 보내고 정식근무 부서를 발령 받는 날, 김 군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영어 시험 점수를 높이 평가한 임원진 전원의 추천으로 자신이 미국지사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 또 미국….

김 군은 이제 영어가 단순히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영어英語가 아니라 뗄레야 뗄 수 없는 살아있는 영적인 요물 영어靈語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나의 생물체로 마치 전치사처럼 김 군의 인생 앞에서 김 군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거부할 수 없는 몸의 일부분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했다. 자신과 영어가 한몸이라는 운명을 받아 들이기로 하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는 짐을 싸는데 김 군은 세라의 동생을 통해 세라의 소식도 들었다. 세라는 스티브와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 1년만에 이혼해서 혼자 산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였다. 소름이 김 군의 온몸에 좌르르 흘렀다. 자신의 첫사랑이 영어로 인해 인생이 처절하게 찢겨졌다는 사실에 공포감을 느꼈다.


16장-접속사   


“김형의 고민을 완전히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뭐?”

김 군의 귀가 솔깃해졌다. 하루는 영어 못하는 고민을 김군의 회사동료에게 술을 마시다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 놓았는데 사연이 너무 절절했는지 회사 동료가 술자리에 데려온 그의 친구가 조용히 김군에게 따로 LA에는 영어의 말문이 트이는 용한 약이 있다고 소곤거렸다. 영어광풍이 부는 한국땅보다 영어를 쓰는 미국속의 한인들이 영어에 무관심한 상황이 좀 아이러니 하지만 사실 LA 한인타운은 한국만큼 영어 공부 열기도 없고,  LA타운안에서 전화를 잘못걸어도 상대편이 한국말로 ‘여보세요’할정도로 한국사람이 많아 김 군에겐 동부에서 영어로 고군분투 할때보다는 요즘 마음은 편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영어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가 응어리져 있었는데 영어를 잘할 수 있는 약이 있다니 처음에는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가 계속 그의 말을 듣다보니 차츰 마음이 솔깃해졌다.

“아니 평생을 영어때문에 그렇게 고민을 하셨는데 이제 털어버리고 싶지 않으세요?”   

“에이 아저씨 농담이죠…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있어?”

“허참. 믿기 싫으면 믿지 말고..”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기가 여태까지 영어를 못해서 받은 모든 인생속 수모들이 영화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였다.

‘먹으면 영어 잘하게 되는 약이라…..’

김 군은 약의 존재에 대한 허구성 여부보다 그 약을 먹고 난 뒤의 상황에만 생각이 접속되었다.

‘에이 세상에 그런게 어디있어..’

콧방귀를 뀌고 자리를 돌아누워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김 군은 미국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있다고 연설하는 꿈을 영어로 꾸었다.

다음날 회사동료로 부터 그 약을 이야기한 친구가 도박을 좋아하고 신뢰할 만한 친구는 아니라고 이야기를 듣고도 김군의 마음은 벌써 약을 먹고 영어를 술술 말하는 환상속에 빠지고 난 뒤라 아무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만큼 김군의 인생은 영어에게 시달렸던 것이였다.   

그러다가 몇달 뒤, 결국 김군은 그 약을 판다는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내 아무도 모르게 찾아나섰다. 찾아간 곳은 버몬트와 3가의 어느 일반 아파트였는데 어렵지 않게 약파는 사람의 방앞에 도착해 들은대로 문을 약하게 세번 두들겼다. 문이 쬐금 열리면서 라티노 계통의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머리만 쑤욱 내밀고 멍한 얼굴로 서있는 김군을 노려 보았다. 김군이 천천히 돈100불짜리 지폐를 내밀자 남자는 검은 비닐봉지를 순식간에 건네주고는 손에든 돈을 확 채어 가버리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김 군은 약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에라 돈 벌써 주고 왔는데 먹어보자…’

‘그래 약먹고 인생을 바꾸는 거야.’

김 군의 마음은 잠시 흔들렸으나 여태 영어 못해서 받은 고난을 한방에 날리고 싶은 호기가 발동했다. 김 군은 눈을 탁 감고 봉지속에서 약 두 알을 꺼내 단숨에 삼켰다. 약을 먹고 30분 뒤, 김 군은 무언가 정말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직감이 듬과 동시에 입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아악 배야~~~~”

뱃속의 창자가 뒤틀리는 극심한 고통에 김 군은 그만 바닥에 자빠졌다.

“으악……”
 사기꾼에게 걸려들었다는 후회를 완전히 압도하는 복통이 김군의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만들었다.

집엔 김 군 혼자 였다.

김 군은 배가 너무 아파 전화기를 향해 기어갔다.

김 군은 간신히 수화기를 들고 응급구조요청 번호를 눌렀다.

“This is 911. May I help you?”

김 군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흘러 내렸다.

“Sir. What’s wrong?”

김 군은 더는 못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어…..Help me ………….please….HELP ME PLEASE!! HELP ME PLEASE!! HELP ME PLEASE!! “

영문도 모르게 영어 때문에 평생을 고생한 김군을 마치 비웃듯이 영어가 김군의 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디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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