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LA에서 팜스프링스로 가는 10번 프리웨이 선상의 미니밴은 크리스피 도너츠가게는 커녕 차 한대도 없는 황량한 새벽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몇 십분을 달렸을까? 뒷자리가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백미러를 힐끔 바라 보았다. 시어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도너츠를 달라고 칭얼대기를 멈추고 물끄러미 차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출해서 길거리를 헤맨 후라 시어머니에겐 더 이상 칭얼 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핸들을 두손으로 빨래짜듯 꽉 쥐고 앞을 응시했다. LA 다운타운에서 프리웨이에 올라 미친듯이 액셀을 밟고 화량한 이 곳으로 오는데는 단 몇 초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은 듯했다. 속도계가 가리키는 엄청난 숫자와 달리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미명의 광경은 마치 시간을 되돌려 놓는듯 너무나 느릿하게 뒷걸음질 쳤다.
- 아아아악
그녀는 헤드뱅잉을 하는 헤비메탈 가수처럼 머리를 미친듯이 흔들어 대며 비명을 질렀다. 좁은 차안에서 아이를 낳을 때만큼 소릴 질렀는데도 차 밖에서 유리창으로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항속 금붕어 같았다. 뒷좌석의 시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차창 밖을 쳐다 볼 뿐이였다. 그녀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는데도 속이 후련하기는 커녕 시어머니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화가 더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 아아아악
그녀는 다시 한번 목놓아 괴성을 토해냈다.
- 니가 뭐 그렇지
어디선가 시어머니의 귀한 외동 아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남편은 부부싸움을 할때 그녀가 분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면 언제나 천성적으로 고성을 내지 못하는 성대를 가진 그녀를 무슨 장애인 대하듯 빈정댔다. 소리를 지를 일이 없이 넉넉한 가정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란 그녀는 소리 질러볼 연습도 없이 시집을 와서, 매일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기막힌 현실때문에 더욱 더 소릴 질러댔다.
그녀와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뭔가 맞질 않았다. 매달리는 남편에게 적선해주는 셈 치고 결혼해 주었더니 남편의 엄마는 성은을 입은 줄 알라고 그녀를 씨받이 취급하였다. 남이 보면 누구나가 그저 그렇게 여길 집안인데 시어머니는 자신의 가문이 무슨 조선 마지막 황족 혈통인 것처럼 그녀를 닥달했다.
- 그래도 시댁에 잘해야지
수더분한 친정엄마는 그녀가 시어머니 욕을 하면 언제나 그렇게 다독거렸다. 시어머니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때 마다 그녀는 울컥했다.
- 엄마. 시댁이 무슨 뜻인줄 아세요? 시댁媤宅은 남자의 집이라는 한자라구요. 지금 남편과 시어머니가 사는 집이 무슨 남편 집이예요? 엄마 아빠가 뼈빠지게 모은 돈으로 사준 100% 엄마 아빠집이지. 남들은 남자가 집 장만하고 여자는 속만 채우면 되는데.. 그것들은 다 거저먹은 주제에….
그러면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 그래 누가 의사하고 결혼하래? 니가 좋아서 결혼한거 아니냐? 시어머니나 남편이 두들겨 패지 않은 이상 그냥 참고 있어. 너 애 놓고 시간이 흘러가면 다 괜찮아 질거야.
그러나, 시어머니의 압력과 전문의 과정에 있는 남편의 뒷바라지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그녀는 좀처럼 임신을 할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온갖 임신에 좋다는 혐오식품들을 들이댔다. 그것도 꼭 남편이 보는 앞에서. 한번은 시어머니가 예전에 본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에일리언 머리와 똑같이 생긴 생선을 그녀 앞에 내놓았다. 생선을 보자마자 비위가 약한 그녀는 헛구역질을 했는데 그걸 본 시어머니는 생기지도 않은 손자의 백일잔치라도 열듯이 온 사방에 전화를 돌려댔다.
- 드디어 임신했어..
- 씨가 좋은데 열매도 당연히 좋겠지 뭐 오호호호호
- 우리 손자도 의사시킬거야. 두고보라구.
시간이 흐를 수록 시어머니는 [늑대와 양치기소년]의 거짓말 양치기 소년이 되어갔고, 그녀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서울 지하철에서 오바이트를 하는 전지현이 되어갔다. 급기야 시어머니라는 말만 봐도 속이 뒤틀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뜻밖에 남편이 희소식을 그녀에게 전했다. 남편이 미국에서 공부와 학위를 마칠 기회가 생겼는데 미국으로 같이 갈 수 있겠느냐는 것 이였다. 그녀는 당연히 그자리에서 오케이 찬성을 하고 일사천리로 이사 준비를 모두 마치고 정확히 한달 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 갑자기 미국이라니…우째 이런 일이 벌어졌다지..
공항에 마중나온 시어머니는 복잡한 기차역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슬픈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을 잊질 못하였다. 걱정 말라는 남편과 작별인사를 하는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의 모습이 마치 한편의 촌스런 흑백 코메디 같아서 하마트면 그녀는 웃음을 터트릴 뻔 하였다. 눈치 챈 친정엄마가 몰래 그녀의 옆구리를 눈물나게 치는 바람에 겨우 슬픈표정을 머금을 수가 있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자 기내 화장실 안으로 총알같이 들어가 그녀는 자질러질 정도로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 23년동안 그녀는 시어머니의 존재도 잊고 미국에 오자마자 임신해서 낳은 아들의 양육과 남편 뒷바라지로 시간을 정신없이 보내게 되었다. 남편과 아들 외에는 다른 친인척이 미국에는 하나도 없어 조금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23년이라는 시간이 23초만에 휙하고 그냥 지나가버렸다.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한 주말 아침..
골프를 치러 나가면서 남편이 그녀에게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 다음달에 어머니 오실거야.
- 뭐?
- 어머니 오실거라구. 이제 연세도 팔순을 넘기셨는데 우리가 모셔야 되지 않겠어?
그녀의 하늘이 오뚜기 카레처럼 노래졌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나이 쉰에 시어머니를 모시라구?
- 그럼 누가 모셔? 너무 한국을 떠나와서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우리집 장손이라고…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어.
- 아니.. 왜 이제와서 모시냐고..
그녀의 목소리를 울음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 뭐? 이제와서? ….그동안 시집살이도 안하고 편했잖아…그건 생각 안해?
- 당신 뒷바라지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녀는 울먹였다. 남편은 쉰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우는 모습이 한심했는지 남편은 잠시 말을 멈췄다.
- 당신은 왜 그렇게 어머니를 싫어해?
남편의 질문은 그녀에게 마치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연쇄 살인마에게 왜 사람을 자꾸 죽였냐고 다그치는 형사의 취조처럼 들렸다.
그녀도 이유가 없었다. 왜 시어머니를 싫어하는지….
언제부터 매듭이 꼬였는지 이유를 찾자면 전생보다 더 까마득한 시간속을 헤매여야 할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약속보다 이틀이나 빠르게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시어머니는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금이환향하는 선수처럼 기세등등하게 손을 흔들면서 나타났다. 4년전 그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보다 연세를 더 잡수셨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염색을 해서 그런지 솔직히 그녀보다 더 젊어보였다.
시어머니는 시차고 뭐고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미국생활에 막바로 적응해 나갔다. 물론 그건 그녀의 모든 시간과 여유를 다 빼앗아간 결과였다.
시어머니는 23년동안 그녀에게 시켜야 했던 [시집살이]라는 압출파일을 빛의속도로 풀어댔다.
- 야 이거 매일 진수성찬이네..
아침으로 한식은 거북하다며 23년간 간단한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를 선호하던 남편도 시어머니의 입맛에 맞춰 차려진 한정식같은 아침상을 해맑은 얼굴로 감탄했다. 남편이 그럴때 마다 시어머니는 처음2초는 그녀를 노려보았고 다음 10초는 남편쪽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차린 이 아침상이 시어머니의 제사상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평생 불교신자로 살았던 시어머니는 일요일이 되자 교회를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교회를 들어서자마자 등록부터 침례까지 일사천리로 끝내고 예배시간에 신앙간증도 하였다. 시어머니는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이야기를 간증속에 곁들이면서 시어머니 말 들어서 잘못 되는 며느리 못봤고, 이제 죽어서 며느리와 함께 천국에서 다시 [영원히] 거할 것이라면서 교회 성도들 앞에서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난감했다. 천국 가서도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한다니.
시어머니가 없는 곳은 이승에도 저승에도 그 어느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피가 머릿쪽으로 솟구쳐서 그녀는 남편에게 밤마다 침실에서 퍼부어 댔다. 남편은 처음에 그녀의 응석을 애교로 받아주었으나 차츰 넌덜머리를 냈다. 회유와 비난을 번갈이 쓰던 남편은 급기야 무관심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주말내내 골프를 치거나 학술회의나 세미나를 무슨 관광다니는 것처럼 찾아다녔다. 남편이 몇일 집을 비우면 넓은 집에서 시어머니와 독대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움때문에 더더욱 그녀는 미칠 지경이 되었다.
- 아니 왜 내가 시어머니를 이렇게 미워하게 되었지?
어느날, 한밤 중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 앉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문득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두손으로 머릿속 DVD플레이어의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보았다. 남편과 데이트를 할 당시 집으로 초대되어 시어머니와 첫대면을 하던 날을 재생해보았다.
그때 무슨옷을 입었었지? 헤어스타일은? 화장은 어떻게 했었었지?
그날의 보관상태가 좋지 못한지 애당초 녹화가 되어 있지 않았는지 전혀 재생이 되질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유없이 상대방이 미울때 만남의 시작이 된 원점으로 돌아가보는데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시어머니를 처음 만나던 날 실수할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시어머니의 첫인상은 평범했었다.
그저 그 나이대만큼 차려입고, 그저 그 나이대만큼 이야기를 했으며, 그저 그 나이대만큼 행동을 해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이 없었다. 평생을 시청공무원이였던 시아버지의 그늘아래 잠잠히 살아야 했던 환경이 어쩌면 시어머니의 인상을 그렇게 평범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예과 때부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닌 남편의 소원 성취 차원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어른에게 책잡히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철두철미하게 준비했고 최대한 공손하고 예절바르게 시어머니를 대했었다. 대접되어 나오는 커피맛이 끔찍하다고 생각했으면서 두손으로 컵을 쥐고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었고, 나프탈렌 냄새 진동하는 시어머니의 패션을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올렸었고, 결혼을 하기 전 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이라고 부르면서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속의 시어머니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칭찬했었고, 그녀 입맛에 전혀맞지 않는 반찬만 골라 모은 저녁상에 그녀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생선매운탕을 곁들여 공기밥을 완전히 비웠었다. 또한, 시어머니가 묻는 말에는 또박또박 대답을 했었고 별로 웃기지 않는 시어머니의 대화에 과장되게 웃으면서 추임새를 맞추어 주었었다.
반면에, 시어머니는 그녀의 첫인상이 참 마음에 들었었다.
신세대 스타일같은 당당함과 현모양처같은 단아함이 동시에 풍기는 인상이 특히 시어머니의 마음에 쏘옥 들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거실에서 자신이 실수로 설탕대신 소금을 넣은 커피를 맛있다며 극찬을 하는 그녀가 이해가 되질 않았고, 다리미질 하다가 태워먹은 새로산 겉옷 대신 장롱에 쳐박아 두었던 나프탈렌 냄새 진동하는 쌍팔년도 브라우스를 멋있다는 그녀가 가증스러웠고, 남편과 한바탕하고 기분 나쁘게 찍은 가족 사진속의 자신을 속이 거북할 정도 칭찬하는 그녀가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장래에 며느리가 될 아이의 식성을 아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해서 대강 해놓은 밥상을 맛있다는 그녀의 태도에도 뭔가 문제가 있다고 시어머니는 확신했었다. 이런 첫만남 이후로 그녀와 시어머니 사이에는 기막힐 정도로 기가 맞지 않는 일이 기적적으로 벌어졌는데 그러면서 그녀와 시어머니는 서로 원수지간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 잠깐! 내가 이렇게 싫어하면 나만 스트레스 받고 손해가 아닌가? 그냥 무시해버리면 내 맘이 편하지 않을까?
그녀는 무슨 진리를 발견한 구도자처럼 환한 얼굴을 지었다. 그런 결심이 있는 후로 그녀는 시어머니를 철저히 무시했다. 시어머니가 집안에서 무슨 말을 하든 말든 그녀는 들은체 만체 했다.시어머니가 미국에 오면서 잃었던 밥맛이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그녀가 주중에 한번정도 소일거리로 나가서 봉사하는 인권협회사무실에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그녀에게 물을 정도였다. 그녀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 아가야
- …
- 아가야
….
-할말이 있다.
하루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시어머니는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TV속 한국드라마의 여주인공만 째려 보았다.
- 너 아들내미가 말이다.
-….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들내미? 정말 교양없는 명칭 아닌가? 그리고 언제부터 손자 신경썼다고 그녀의 분신인 아들까지 간섭하느냐고 보고 있는 TV속 여주인공 바라보듯 시어머니를 째려보았다.
- 아가야. 너 없는 동안 그애가 자기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말이다…방에서..
시어머니는 평상시와 다르게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한참을 아무말도 하지 않은체 시어머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시어머니를 무시하기로 맹세한 대로 째려보던 눈길을 거두고 다시 TV만 바라보았다.
- 아니 도대체 당신 어머니한테 그게 뭐야?
시어머니를 무시한다는 것을 시어머니가 이야길 했는지 아니면 남편이 느끼게 된건지 모처럼 결혼기념일이라고 예약해놓은 LA다운타운 리츠칼튼호텔에 있는 식당에서 남편은 다짜고짜 물었다. 그녀는 모처럼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아무대답을 하지 않고 테이블위에 놓인 물잔을 들어 입술만 적셨다. 물을 적셔도 입은 더 마르는 것 같았다.
- 나도 당신 기분을 알아 결혼생활 내내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다가 나이들어서 모시게 되어서 얼마나 힘든지를..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은빛 포크를 금빛반지를 낀 손으로 만지작 거리면서 남편이 방금 한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과연 미국인 며느리중에 폐경기가 지난 나이에 시어머니를 모시게 된 며느리는 과연 몇이나 될까 궁금해졌다. 홀로 된 부모를 장남이 모셔야 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나라들도 관습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식을 다 키우고 남은 여생을 즐기며 정리해야 할 시기에 다시 시집살이를 시작해야만 하는 그 빌어먹을 관습을 가진 나라는 과연 지구상에 몇이나 존재할까 알고 싶어졌다. 그녀는 남편에게 시어머니를 이제 더 이상 모실 수 없다고 천천히 말했다. 남편은 그녀가 예상한대로 한치의 틀림이 없이 반응을 했다.
- 그럼 어떻게 해? 고려장高麗葬 해? 저 어디 사막에 갔다버려?
남편의 말에 그녀는 예전에 한민족처럼 효성이 남다른 민족이 부모를 산채로 버리는 살인행위를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면서 실제로 고려장은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고분유적들을 파헤칠 당위성의 논리를 펴고자 만들어낸 날조된 역사라고 말하는 한국에서 만든 한 TV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고려장이라….
그녀는 아름다운 유리잔에 담겨진 물을 한모금 마셨다. 그녀는 고려장은 인륜에 어긋나는 참으로 끔찍하고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시어머니가 치매진단을 받기전까지만 이였다.
시어머니는 무심한 그녀에게 골탕을 먹일 가장 적극적 방법으로 치매를 택한 것 같았다.
시어머니와 대화를 끊은지 3개월도 되지 않아 그녀는 냉장고 안의 얼음이 녹아서 부엌바닥을 흥건히 적셔질때까지 우두커니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바라보고 있는 시어머니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빈번해지자 그녀는 남편에게 시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전했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진단을 받게 했는데 치매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시어머니를 진단한 의사는 치매가 갑자기 닥치게 된 이유가 크게 스트레스를 받은 것 때문이라는 소견을 덧부쳤다.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스트레스를 치매가 걸릴 정도로 받다니 어이가 없었다. 평소 건강할때도 그녀를 괴롭히는 못된 말을 짧게 했던 시어머니는 치매진단을 받고 난뒤 말수가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녀는 그런 시어머니를 보면서 치매에 걸린 기분이 마치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상태와 똑같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것을 기억해내고 자신도 자신의 인생에서 이 상황을 끊어버리기 위해 남편이 사다놓은 위스키를 아이스 없이 보리차 마시듯 벌컥거렸다. 앞으로 치매가 걸린 시어머니를 모실 생각이 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처럼 변했다. 시어머니는 이제 냉장고만 바라보는 것을 벗어나 온 집안의 문과 창문 그리고 차고문등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열어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나 아침에 눈만 뜨면 아무 문이나 열어놓고 하루종일 바라보았다. 급기야는 시어머니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어야 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어 버렸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녀는 시어머니의 뒤로 다가가서 시어머니가 바라보는 방향과 같은 곳을 동일한 방법으로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열린 문의 바깥 장소에 따라 딱히 별다른 점이 없어보였다.
누굴 기다리나?
한참을 들여다 보았지만 점점 순백색으로 변해가는 시어머니의 얼굴에서 뭔가를 기다리는 간절함은 발견할 순 없었다. 대신 간절함이나 애절함은 없지만 시어머니의 눈빛에는 뭔가 끔찍한 장면을 보고 난뒤 질려버린 공포와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공허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기세등등하던 시어머니가 저렇게 변해버렸다는 사실이 다 자신에게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앙상하게 말라가는 시어머니가 무척 안쓰럽게 느껴졌다.
도대체 뭘 봤길레?
그녀의 집은 헹콕팍에 위치한 5베드룸을 가진 고급 단독 주택이였다. 그녀의 집이 위치한 동네는 남가주에서 알아주는 부촌으로 이웃들도 다들 그녀의 남편처럼 전문직이나 회사를 경영하는 등의 비슷한 클래스의 사람들이였다. 그녀도 이곳으로 이사온지 10년이 되었는데 밤에 운동삼아 걸어다녔어도 아무런 사고가 없었던 아주 안전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흔한 앰뷸런스 지나가는 소리도 드문 지역이였다.
그럼 집밖이 아니고 집안에서 뭘 봤나?.
그녀의 남편은 요즘 거의 집을 비우다 시피했다.
그녀 이외에는 집청소를 위해 고용한 가정부 클라우디아와 산타모니카 컬리지를 다니는 외아들 뿐이였다. 클라우디아는 불혹을 넘긴 후덕한 인상의 멕시코인으로 6년이 넘게 고용해왔는데 언제나 달덩이같은 미소를 머금고 맡겨진 일에만 충실하게 일하는 순박한 라티노 아줌마였다. 원래 클라우디아는 그녀의 집 이층 윗방에서 딸과 같이 살았었는데 올해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따로 아파트를 렌트해서 출퇴근을 하였다. 클라우디아는 시어머니와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처음 볼때부터 서로 다정하게 지냈다. 시어머니는 그녀보다 클라우디아가 더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한식을 즐기고 또한 김치까지 담글줄 아는 클라우디아에 대해 시어머니는 틈만나면 그녀나 남편에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갑작스럽게 치매가 와서 온 집안의 문을 열어놓고 우두커니 서있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사실 그녀보다 클라우디아가 가장 슬퍼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크리스피 도너츠 한다즌을 사와서 시어머니의 입에 조금씩 뜯어서 넣어주었다. 도너츠을 받아먹고 오물거리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 클라우디아는 눈물을 흘렸다. 도너츠를 먹다가 흘린 하얀 설탕 조각들이 클라우디아의 눈물처럼 시어머니의 발바닥에 떨어졌는데 클라우디아는 일일히 그것들을 깨끗이 청소하면서 또한번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클라우디아를 신임했다.
자신이 없을때 시어머니에게 더 잘했으면 잘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설사 클라우디아가 시어머니를 남몰래 학대했더라도 그녀는 아마 눈을 감아줬을 것이였다. 자신의 앙갚음을 대신 해주는 것이니까. 이렇게 되면 집안에서 시어머니와 마추칠 사람은 그녀가 한국에 있을때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손자인 그녀의 아들밖에 남지 않게 된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은 겉모습만 한국인일뿐 한국말은 전혀 못하는 전형적인 이민2세 아메리칸이였다.
처음에 시어머니는 외손자라며 살갑게 대할려고 아들에게 다가갔지만 아들은 시어머니의 체취와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첫대면후에는 줄곧 시어머니를 피해 다녔다. 게다가 말도 전혀 통하지 않아 아들과 시어머니 사이는 결국 서먹서먹해지고야 말았다. 그녀는 미국으로 올때 한국땅을 등지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므로 자식의 선택을 우선적으로 존중할것이지만 자식이 완전한 미국인으로 자라길 원했다. 파고 들어가보면 여성을 억압하는 유교적 가치관인 가부장 제도가 만연하고, 학연지연없이는 사회적 성공을 기대할 수 없고, 그리고 남눈치보는 체면문화에 물들여진 한국사회 자체에 대해 너저리를 쳤기에 자신의 아들만은 자유로운 미국에서 하고 싶은 일을 실컷하면서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녀는 미국 상류층 백인들만 다닌다고 소문난 남자 사립학교에 아들을 유치원때부터 입학시켰고 초등학교 때부터는 아예 기숙사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받아서 그런지 아들은 학교공부도 곧잘 하고 외모도 훤칠한 아이로 자랐다.
다만 흠이 있다면 조금 여성스럽다는 것이였는데 요즘 꽃미남시대에 부합하는 아주 멋진 얼굴이라고 그녀는 흡족해했다.
아들은 공부에 약간 흥미를 잃은듯 고등학교 졸업후 대학진학을 잠시 미루고 싶어했다. 언제나 자식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그녀는 서두르지 말고 시티컬리지에서 여러 클래스를 들어보고 하고 싶은 전공이 생기면 트랜스퍼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녀는 아들이 오랜 기숙사 생활후 부모집에 들어와 사는 것이 불편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프라이버시가 보장되게끔 아들의 방을 완전히 개조해 주었다. 집안을 거치지 않고 막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가서 확인을 해보기 전까지는 아들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녀는 치매가 걸리기전 시어머니에게 유일하게 부탁한 것이 있었는데 제발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어달라는 것이였다. 완전한 아메리칸인 아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기 위한 것이라면서 간곡히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그녀의 부탁을 건성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무시하고 싶었는지 보란듯이 방문들을 다 열어젖히고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을 하루 일과로 출발했다. 그녀가 화장실에 있는데도 문을 확 여는 바람에 당황한 적도 있었고 남편이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데도 샤워도어를 열어제치는 일이 적찮게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뭐가 즐거운지 비눗물 때문에 찡그린 얼굴로 웃었고 시어머니는 환갑이 다 되어가는 아들의 알몸을 마치 귀여운 아기처럼 바라보며 따라 웃었다. 원래 결벽증세가 조금 있었던 그녀는 시어머니의 문열어 젖히는 악취미를 막아보려고 집안의 문들을 다 자물쇠로 걸어 잠그고 열쇠로만 방문들을 열게끔 설치해보기도 했지만 그녀가 일단 불편해져서 그만 두었다. 그녀가 열쇠로 집안의 문을 잠그고 열던 것을 포기하던날, 시어머니는 뭐가 흥에 겨운지 아침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출장준비를 하는 남편의 넥타이를 손수 매여주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 패배를 인정했다. 그런 시어머니를 바라보던 그녀는 더 이상 시어머니의 유치한 놀이에 휘말리지 않고 철저히 시어머니를 무시하기로 굳게 다짐을 했다. 역시 애정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였다. 왜냐하면 사람은 애당초 관심받고 싶어하고 관심속에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미움이라는 관심조차 끊어버리면 자신이 시어머니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OH MY GOD!
패배를 인정한 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아들이 이층에서 쿵쿵거리며 내려와 그녀앞에서 씩씩거렸다. 수건하나만 두른 아들의 조각같은 몸을 예술작품 바라보듯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그녀에게 아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성토했다. 씩씩 거리며 윗층을 가리키면서 영어로 빠르게 말하는데 대략 시어머니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들을 달래려 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어마어마한 힘으로 아들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가슴을 확 밀었고 그녀는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녀는 눈물이 핑 돌 정도였지만 너무나 어이가 없어 아들이 다시 이층으로 올라간뒤에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아가야
어느샌가 시어머니가 뭔가에 질려버린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노려보았다.
- 아가야.. 니 아들내미가 니 아들내미가…
그녀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풋볼선수처럼 시어머니를 향해 질주했다. 서로 크게 부딪혔는데 다행히 그녀와 시어머니의 몸이 떨어진 곳은 푹신한 가죽소파 위였다. 그녀는 누워있는 시어머니의 위에 맹수처럼 올라타 시어머니의 목을 두손으로 잡았다. 시어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워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에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의미가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사람을 죽이기 이렇게 쉽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올라탄 시어머니의 시들은 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겉옷을 야멸차게 잡아서는 현관문 쪽으로 시어머니를 질질 끌고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캘리포니아의 차가운 초겨울 밤바람이 사정없이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밀어내다시피 문 밖으로 떠밀어 던지고는 다시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아가야
현관문에 달린 3개의 자물쇠를 모조리 걸어 잠그고 그녀의 침실로 뛰어가는데 그녀의 등뒤로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어머니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이불속에 몸을 숨기고 귀를 막고 있는 힘껏 울부짖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그녀가 운전하는 미니밴 밖으로 팜스프링스가 30마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표지가 보였다.
미니밴의 연료 계기판이 그녀가 더 이상 비명을 지를 기력이 없다고 빨간불을 껌뻑였다. 시어머니는 잠이 든 건지 눈을 감고 얌전히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LA경찰관의 연락을 받고 LA 다운타운 7가에 있는 경찰서에서 만난 시어머니의 모습은 집 밖으로 쫓겨나서 사라진지 3일만에 발견된 모습치고는 그래도 깨끗해보였다. 그녀는 괜히 노인학대방치라는 괜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남편친구에게 부탁해서 예전에 만들어놓은 시어머니의 치매진단서를 보여주며 자신도 놀랠정도의 눈물연기를 경찰관들앞에서 보였다. 경찰관들도 환자같은 괭한 눈빛의 시어머니를 별다른 의심없이 그녀에게 인도해주었다. 시어머니의 팔을 잡고 경찰서 복도를 걸어나오면서 그녀는 노련하게 이 모든 것을 침착하게 해내는 자신이 무서울 정도였다. 아마 이렇게 자신에게 내재된 무섭도록 잔인한 성격을 일치감치 시어머니가 간파했기에 그토록 자신에게 차갑게 대했구나는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전방에 주유소표지판이 보였다. 그녀의 미니밴은 그 표지판을 따라 프리웨이에서 내려 주유소 안으로 들어갔다. 주유소의 캐쉬어는 닫혀있었으나 크레딧카드로 셀프로 주유는 할수있게 펌프머쉰은 열어놓아서 그녀는 서둘러 입고 나온 남편의 캠프릿지 롱코트의 주머니를 뒤척이며 지갑을 찾았다. 그녀는 가솔린을 투입하기 위해 총같이 생긴 펌프기를 잡았는데 그게 묵직한 남근의 촉감이 전해졌다.그녀는 차안에 앉아 있는 시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시어머니만 아니였어도 우리아들이 그런줄 몰랐을 거야
시어머니만 아니였어도
시어머니만 아니였어도
너무 노려봐서 눈에 피가 한꺼번에 몰려서 인지 안압이 갑작스럽게 올라가면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미니밴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시뻘겋게 된 눈과 어울리지 않는 무색의 눈물이 흘렀내렸다. 그녀가 서 있는 바닥에 눈물 떨어진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질 정도로 많은 양을 눈물을 한꺼번에 흘렸다.
시어머니가 없었다면 남편도 없었을 거고 남편이 없으니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을테고 결혼하지 않았으니 아들을 낳지도 않았을텐데….
모든 불행의 원인은 시어머니가 제공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오한이 전기처럼 지릿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귀끝에 피가 몰려 뻘겋게 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금니를 질근 물자 볼에 근육들이 실룩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시어머니가 타고 있는 뒷좌석의 슬라이딩도어에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거칠게 문을 열어 제쳤다. 문을 여는 소리에 놀란듯 시어머니는 몸을 잔뜩 움츠린 토끼가 되었다. 그녀는 찬찬히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캘리포니아 특유의 황량한 사막바람이 불었다.
- 어머니 이제 내리세요. 다 왔어요. 도너츠 먹으러 가요.
그녀의 말에 시어머니의 표정이 놀이공원을 들어가는 천진난만의 아이처럼 바뀌었다. 시어머니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서 주유소안을 두리번 거렸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두리번 거리는 동안 미니밴의 슬라이드도어를 닫고 펌프기를 제자리에 가져놓았다. 그녀는 잠시 시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시동을 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유소를 빠져나왔다.
프리웨이에 다시 올라탄 그녀의 미니밴은 미친듯이 LA로 가는 방향으로 질주했다. 100마일이 넘는 속도로 달리는 데도 그녀는 아무런 속도감을 느낄수 없었다. 그녀에게 시어머니가 뒤에 앉아있을 것 같은 착각이 두려움과 함께 몰려왔다.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커지는 죄책감이 그녀의 사고능력을 사로잡자 온몸이 힘이 풀려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갓길에 차를 거칠게 세웠다. 핸들을 두손으로 꼭 쥐자 오한이 밀려와 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나스는?
뒷자리에 있지도 않은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생전 겪어보지도 않은 인간적인 모멸감과 미움을 아무런 이유없이 안겨준 시어머니에 대한 앙갚음을 했다는 자신이 이토록 저주스럽다니 그녀는 패닉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백미러를 향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틀전 아들방을 우연히 훔쳐본 그 광경이 다시 펼쳐졌다.
벌거벗은 흑인남자의 근육질의 몸아래에서 신음하는 아들의 모습이 지금 바로 뒷좌석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안돼..
안돼..
안돼..
그녀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자신을 세뇌했다. 밤새 현관문 밖으로 내다몰고 나서 사라져버린 시어머니의 실종신고를 하고 조용해진 집안에 외로움이 밀려와 그녀는 아들이 있는 이층방으로 올라갔다. 아들의 방으로 다가갈 수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살금살금 다가가 문이 조금 열려진 작은 틈새로 아들의 방안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아가야…할 말이 있다. 너 아들내미가 말이다.
다시 그녀의 귓가에 시어머니의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징그러운 벌레를 털듯 그녀는 더 세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아니야…시어머니만 아니였어도 우리아들이 그런줄 몰랐을 거야.
그녀는 목에서 머리가 튕겨나갈 정도로 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그녀는 그런 일이 매스컴에서만 일어나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녀는 같은 사람인데 성적기호가 어떻든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해왔다. 태어날부터 동성을 사랑하는 DNA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거의 이성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직접 본 장면은 인권이고 뭐고 귀하게 키운 아들이 일방적으로 성적 폭행을 당하고 있는 범죄장면이였다. 아들이 합의하에 그 짓을 한다해도 아마 공포에 질렸거나 이상한 약물의 환각상태에서 타의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눈앞에서 강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반드시 자신과 같이 실성해 버릴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전화해야 겠다는 생각에 거칠게 핸드백을 뒤졌다.
뚜뚜뚜…
아들의 목소리를 열심히 추적하는 전화신호소리가 그녀에게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 HELLO.
잠이 덜 깬 듯한 아들의 목소리가 스마트폰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슬픔에 무너지는듯 흐느꼈다. 아들은 아무말도 않고 잠잠했다. 그녀는 안간힘을 겨우 내어 아들에게 물었다.
- 너 엄마한테 어쩜 이럴수 있니?
- …..
- 난 용납못해..
- …
- 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엄마를 택하든지 그 놈을 택하든지 어서 지금 말해.
-…
- 어서 말해봐 어떻할 거야?
그녀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아들에게 매달렸다.
- 얘 ..너 정말 엄마를 버릴거니?”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 엄마를 버릴거냐고?”
그녀는 스마트폰에 대고 절규했다.
아들은 침묵뒤에 침묵보다 더 무거운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I GUESS SO…
그녀는 울었다. 아들이 그 놈은 택하고 자신은 버릴수 있다는 대답에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배신감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