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여검星天女劍 20화

( SF 무협판타지 ) 설안, 홍몽, 녹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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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의 밤은 아직도 숨을 쉬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

침묵이 더 깊어진 게 아니라,

침묵 속에 ‘박동’이 생겼다.

하연이 검을 쥔 손목에서,

연화가 창을 쥔 손등에서,

서로 다른 맥이 한 번씩 맞물려 뛰었다.

마치 현무가 말없이 인정하듯.

“버텼다.”

“그럼 다음.”

마황 A.I의 군세는 무너졌다가도 다시 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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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불식(不斷不息).

하연이 욕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야—진짜… 지긋지긋하게 나온다.”

연화가 피식 웃었다.

“너 방금 욕할 뻔했지.”

“뻔이 아니라 했어. 마음속으로.”

“현무의 밤에서도 마음속 욕은 들리나?”

“그럼 너도 들리겠네.”

하연이 검끝으로 바닥의 기름을 툭 쳤다.

“네가 나한테 하는 말들, 다.”

연화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재수 없는 소리.”

“정답.”

하연은 담담히 말했다.

“재수 없으면, 살아있다는 뜻이거든.”

그때 첨성대 쪽에서—

낮은 울림이 아니라,

뼈를 두드리는 진동이 올라왔다.

돌기단 사이로 은빛 선이 늘어지고,

하늘의 별자리가 마치 실처럼 당겨졌다.

성간정(星間錠).

이번엔 ‘미세’가 아니었다.

명백했다.

—쯔르륵.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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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가 본능적으로 창끝을 돌렸다.

“또 움직인다.”

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 대신, 숨이 한 번 끊겼다.

별빛이 검날 위에서 맥동했고,

현무의 침묵 위로 청룡의 선이 얇게 깔렸다.

두(斗)와 허(虛)가 이어진 틈에서,

어둠이 단단해졌다.

현무의 영역이 ‘밤’이라면,

지금은 **‘감옥’**이 되려는 기척이었다.

하연이 낮게 말했다.

“…이제부터가 진짜구나.”

연화가 씁쓸하게 웃었다.

“너희 동방박사들, 시험은 왜 이렇게 항상 사람 열받게 하냐.”

“내 스승들이라서요.”

“그러니까.”

연화는 창을 고쳐 쥐었다.

“말도 안 되게 성질 더럽지.”

전장은 잠깐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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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황의 병력들이 한 박자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건 물러난 게 아니었다.

한꺼번에 쏟아지기 전의 정적(靜寂).

연화가 먼저 알아챘다.

“온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엔—”

검을 들며.

“정파(正派) 쪽에서도.”

비가 조금 더 굵어지는 순간,

현무의 밤 바깥에서

다른 기운들이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사파(邪派)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제된 기운.

지나치게 반듯한 살기.

정중동靜中動.

살기는 곧 법도였다.

그들 뒤로, 문파의 문양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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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교파의 설백정궁 — 설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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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교파의 몽염혈도 — 홍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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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월단의 녹사만독문 — 녹독.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서

마황의 잔여 연산이 바람처럼 흘렀다.

연화가 혀를 찼다.

“아. 이런.”

하연은 입술을 비틀었다.

“사파가 정파인 척하고—

결국 마황이 판 깔아준 데로 들어오네.”



설안이 먼저 한 걸음 나왔다.

눈빛이 얼음처럼 맑았다.

“하연.”

목소리도 차가웠다.

“현무의 영역을 독점할 자격은 없다.”


홍몽이 뒤에서 웃었다.

“독점이라니. 말 예쁘게 한다, 언니.”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불꽃이 피었다.

“그냥—뺏자고 하면 되지.”


녹독은 말이 없었다.

다만 하연의 배 쪽을 한 번 훑고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네가 가진 건 별이지.”

그 말이 더 섬뜩했다.


연화가 창끝을 들어 그들 쪽을 가리켰다.

“여긴 너희들 무대 아니다.”


설안이 대꾸했다.

“이제부터는.”


홍몽이 하연을 보며 웃었다.

“여왕 후보가 이렇게 우리가 더 있는데 왜 너희들만 여기서 설치고 있어?”


하연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진심으로 말했다.

“아…”

연화가 곁눈질했다.

“왜.”

“다들 재수 없어서.”

하연이 검끝을 세웠다.

“진짜로.”



그 순간,

홍몽의 손끝에서 붉은 불꽃이 번졌다.

몽염환진夢焰幻陣.



하연의 시야가 한 번 흔들렸다.

병실이 아니라—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짧고, 맑고,

말도 없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소리.

하연의 손가락이 잠깐 떨렸다.


그 찰나를, 녹독이 놓치지 않았다.

생사흡환生死吸環.

허공에서 푸른 고리가 생겨

하연의 심장 쪽으로 휘감겼다.

연화가 바로 몸을 틀었다.


“뒤!”


창이 휘어졌다.

백호칠수—단절斷絶.

푸른 고리가 반쯤 잘려 나갔다.

하지만 남은 반이 하연의 팔을 스쳤다.

피가 나지 않았다.

대신—

힘이 빠졌다.

하연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씨바”

연화가 짧게 웃었다.

“욕했네.”

“응. 했어.”

하연이 가쁜 숨 사이로 말했다.

“욕하니까 아직 건강하다는 거네.”


설안이 움직였다.

빙심정맥氷心靜脈.

공기가 식었다.

비가 떨어지다 멈추는 게 아니라,

비가 ‘떨어지길 잊는’ 느낌이었다.

하연의 팔이 더 무거워졌다.

현무의 침묵 위에,

설안의 정적이 얹혔다.

이중의 정지.

현무가 시간을 늦춘다면,

설안은 의지까지 얼렸다.

하연의 무릎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연화가 낮게 말했다.

“하연.”

“응.”

“괜찮냐.”

하연은 웃었다.

“어디가요.”

“무릎.”

하연은 대답 대신,

검을 땅에 박았다.

—쾅.

검날을 통해 별빛이 바닥으로 흘렀다.

청룡의 선이 아니라,

현무의 ‘버팀’이 올라왔다.

하연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한 마디 더.

“나 원래—무릎 꿇는 거, 싫어하거든.”


그러나 그때였다.

홍몽이 다시 웃었다.

“그럼 더 예쁜 걸 보여줄게.”

불꽃이 번졌다.


이번엔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장례식이었다.

하연의 숨이 멎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홍몽이 속삭였다.

“여왕이 되면…

그 아이를 볼 수 있을까?”

하연의 검이 잠깐 내려갔다.

그 틈을, 녹독이 파고들었다.

푸른 고리가 심장을 꿰뚫었다.

이번엔 잘리지 않았다.

연화가 창을 세 번 찔렀지만,

녹독의 호흡이 끈질겼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그러나 그 한계가, 지금이었다.

하연의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현무의 밤이 흔들렸다.

시간이 끊어질 듯했다.

그 순간—

첨성대의 돌기단이 한 번 크게 울렸다.

성간정이 풀리며

하늘의 별이 ‘딸깍’ 맞물리는 소리.

그리고—

세 개의 그림자가

현무의 밤에 ‘통과’해 들어왔다.

문을 연 게 아니었다.

문이 그들을 통과했다.

멜기오르.

가스파르.

발타살.

동방박사(東方博士).

멜기오르가 한숨을 쉬었다.

“또 이런 꼴이군.”

가스파르는 건조하게 말했다.

“예상 범위안이니 뭐 다행.”

발타살은 하연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제자님, 욕은 늘었고.”


하연이 가쁘게 말했다.

“…지금 그 얘기 할 때예요?”

멜기오르의 눈빛이 낮아졌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험이다.”

그가 손을 들자

별빛이 현무의 밤 위로 번졌다.

“여왕 후보들.”

“이 전장은—”

별빛이 칼날처럼 얇게 서며.

“마황의 판이 아니다.”

설안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홍몽의 웃음이 멈췄다.

녹독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화가 낮게 말했다.

“…드디어.”

하연은 피 묻은 입술로 중얼거렸다.

“늦었어, 진짜.”

멜기오르가 조용히 답했다.

“늦지 않았다.”

그리고 하연의 검을 바라보며.

“네가 아직—서 있으니.”

현무의 밤은 다시 굳어졌다.

이번엔 마황이 아니라,

별이 굳힌 밤이었다.

그리고 멜기오르가 말했다.

“18성좌의 다음 문이 열린다.”

“다음은—”

그의 시선이 연화와 하연을 동시에 스쳤다.

“주작의 불.”

하연이 헛웃음을 흘렸다.

“와, 씨…”

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또 욕?”

“응.”

하연이 검을 들었다.

“이번엔 진짜 큰 거.”

비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무의 밤이 숨을 쉬었다.

그리고—

전장은 더 뜨거워질 준비를 마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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