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ssam Mar 04. 2016

[인사동의 추억]

성장통 #part40


녀석의 6살 5월,

나는 햇살이 반짝이던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끔 울적한 날이면 꺼내보는

그날의 사진들


지금까지 수천 장이 넘는 녀석의 사진을 찍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가슴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나는 그때쯤 외출이 늘 그랬듯이

한쪽엔 크로스백 한쪽엔 카메라를 메고

녀석의 손을 잡고 버스에 올랐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녀석의 눈빛도 미소도 그림처럼 들어오던

그런 날이었다


그때라고 어찌 일상의 고민이 없었을까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던 서른둘의 나

녀석이 아니었음 또 어찌 견뎠을까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다






쌈지길에서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전시가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나선 길이었다


조소를 전공하신 선생님은

나의 첫사랑이었다


여고에 입학하고 오리엔테이션 날 선교단 지도 선생님으로 처음 만난 선생님은

외모도 키도 호감형은 아니셨지만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목소리에 반했던 게 아닌가 싶다


친구 따라 선생님을 하루라도 더 보겠다고 학교 교회까지 다녀가며 두근두근 짝사랑을 키우던 나는

매일 예쁜 글귀를 적은 포스트잇을 선생님 책상에 몰래 붙여두기도 하고

야자시간에 미술실을 아지트 삼아 친구들과 공부를 했다


3학년 때 드디어 미술수업을 받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다른 미술 선생님과는 다른 수업을 진행하셨다

작은 스케치북에 사진을 오려 붙이는 꼴라쥬부터 이런저런 재미있는 도구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고

야외수업도 자주 하셨다


찾으려면 먼지 꽤나 써야 하겠지만 나는 그때 수업했던 스케치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은 가끔 학교 뒤뜰에서 용접도 하시고 뭔가를 두드리기도 하시고

알 수 없는 작업들을 많이 하셨는데

아마도 작품 활동을 하셨던 것 같다


나한테는 관심조차 없으신 듯 무뚝뚝한 선생님은 지나가다 한 번씩

"잘 사냐?" 하고 물으셨다


풍물동아리였던 나는 여름방학 그늘도 없는 운동장 구석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축제 준비를 했는데

어느 날 미술실 창문으로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달려가 보니 4층에서 양동이를 줄에 매달아 내려주셨는데 그 안에는 돈이랑 쪽지가 들어있었다

'더운데 음료수라도 사 먹어라'

나는 "네! 감사합니다~"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한 번 미술실에 교사들이 쓰는 조그만 방에 들어갈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선생님께서 내가 매일 교무실 책상 위에  붙여드렸던 색색의

포스트잇을 다 모아놓으신걸 보고

가슴이 뛰어 그날 잠도 설쳤던 기억도 난다


나중에 선생님한테 시집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던 나는

대학 진학 후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소식에 너무 슬퍼서 결국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다


그 뒤로 선생님을 쭉 뵙지 못하고

다른 선생님을 통해 대학교수가 되셨다는 소식만 듣고 있었는데

그 뒤로 연락이 닿아 전시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선생님께 녀석을 보여드릴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인사동으로 달려갔다






선생님의 작품을 예전에는 본 적이 없어 많이 궁금했었다

그날은 날이 좋아 인사동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녀석과 도착한 쌈지길 마당엔

선생님이 만드신 조형물들이 여러 개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커다랗고

생김새도 이상한 작품들이었다


내가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녀석은 망설임 없이 냉큼 조형물 위로 올라탔다

나는 놀랐지만 금방 미소가 지어졌다

선생님의 작품들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올라타고 매달리고 그림도 그리고 상상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가만히 눈으로 보는 작품이 아닌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친구 같은 그런 놀이터였다

나는 '엄마 선생님이 만드신 거야~' 하고

녀석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해줬다


나는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녀석을 데리고 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이웅배 선생님 작품들



만나 뵙고 얘기도 나누고 싶었고

여쭤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하필 그 시간에 선생님께선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 전화는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준비해간 선물만 맡겨두고

녀석과의 인사동 구경을 신나게 즐겼다


선생님의 작품을 만난 걸로도

그분을 다시 만난 듯

설레고 감사했다


나는 선생님 작품과 찍은 녀석의 사진을 인화해서 보내드렸지만 받으셨는지는 지금까지 확인을 못했다




그 후로 다시 10년,

이제는 많이 변하셨겠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 선생님은

고등학교 시절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계신다


나를 기억하고 계시려나

그 멋진 목소리는 그대로일까

언젠가 뵐 날이 있을까

막연한 상상도 해보지만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곧 시작될 녀석의 첫사랑도 나는 기다려진다





햇살 반짝이던 5월 어느 날

햇살보다 더 반짝이는 녀석과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추억했던

그 인사동 거리에서


나는 잠시 행복했었다





글, 사진: kosaam




매거진의 이전글 [인연의 소중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