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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ssam Sep 17. 2015

[노랑복숭아]

성장통 #part15


며칠 전 오랜만에
녀석의 친구 집으로 저녁 마실을 갔다
"저녁 메뉴 골라봐. 족발? 곱창?"
"곱창~~"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나왔다

어린 놈이 곱창볶음은
어찌 그리 좋아하는지
동네 곱창집 줄 서서 기다렸다가
3인분 싸들고 전화를 걸었다
"언니! 곱창 샀으니까 맥주 좀 사다 놔요."
"응~ 배고프니까 얼른 와~"
상 차리기가 무섭게 두 녀석 달려들어
폭풍흡입! 잘도 먹는다.

실컷 먹고 방에 들어가더니
목청 높여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요즘 나라 지키는 저 녀석들의
최대 관심사는 쇼미 더 머니와 옛날 노래들,

무한도전 그리고 화장하기이다
분도 바르고 촌스런 섀도우도 칠하고
입술에 빨간 틴트는 기본이다
마치 옛날 내가 대학교 입학했을 때 모습을 보는 듯

세대차이도 살짝 느끼면서
조금 더 커서 해도 되는데 하는
구닥다리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녀석의 단짝은 오늘도 풀메이크업을 했다
"오늘 피곤한가? 다크서클이 심한데?^^"
슬쩍 던져보니,
"섀도우가 번진 거예요~"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계속되는 메들리 속에
낯익은 가사도 들렸다
"천년이 가도 난 너를 잊을 수 없어~"
노랜지 고함인지 어이가 없어
그저 우린 웃고 말았다

저녁 내내 엄마들은 주방에서
녀석들은 방 안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고
시간이 지나니 슬슬 다시 출출해졌다

집주인은 김치국에 국수를 말고
복숭아도 내 놓았다

녀석들은 언제 저녁을 먹었냐는 듯
후루룩 또 국수를 한 그릇씩 거뜬히 비웠다

그러다 내가 한입 베어 물은
노란 복숭아를 빤히 보던 녀석
"어? 복숭아다!" 하며 달려든다
맛나게 하나 물고는
"이모~ 통조림이에요? 황도요~"
"우린 통조림 안 먹는데?"
"완전 맛있어요~"
허걱! 우리도 황도 통조림은 안 먹는데
졸지에 나쁜 엄마가 된 듯
내 얼굴이 붉어졌다
"얘! 황도 사서 먹여라~ 저리 잘 먹는데~
하나 더 깎아줄까?"
"네!!!"
그렇게 배부르고
오랜 지기들과의 여유로운 저녁 마실이 끝나갔






오늘은 일을 보고 들어오다
집 앞 작은 슈퍼에 밀가루를 사러 들렸다
내일은 큰 맘 먹고
녀석이 해달라 조르던
백주부 레시피에 나온 간식을 한 번

만들어 볼까 해서이다

밀가루, 빵가루, 음료수 하나
그러다 맥주도 한 캔
카운터에 갖다 놓으려다
갑자기 무언가가 눈에 확 들어온다
동글동글 노랑노랑
먹음직스러운~~~
바로바로 황도다!!!

"큰 건 12개, 작은 건 15개 들었어요~
맛은 똑같아요~"
넋을 놓고 보고 있으니 주인 아주머니가 한 마디 건네신다
"아~~ 네! 작은 걸로 한 박스 주세요~"

개선장군이나 된 듯
녀석에게 전화를 건다
"복숭아 한 박스 샀는데 내려와서 좀 들어줄래?"
"응~"
다른 때 같았으면 짜증내며 끊었을 텐데
군소리 하나 없이 내려온단다
제법 무거운 박스를 들고선
"그 노랑 복숭아야?"
"그래~ 그러니까 많이 먹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렸다

저녁을 먹고 황도 하나를 깎으려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
'저 녀석 품었던 여름, 커다란 황도맛에 푹 빠져서

박스로 사다 놓고 여름 내내 혼자 하나씩 먹었었는데~'
그때 먹었던 황도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아무도 안 주고 보기만 해도 부자가 된 듯
'딸이면 좋을 텐데~'

했던 예쁘고 맛있었던 그 기억이 떠오른다
그 뒤론 식구도 없고 과일이 비싸니
이렇게 박스로 사놓고 먹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오늘부터는 녀석과 함께 실컷 한번 먹어봐야겠다

과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한 번 맛보더니 첫 눈에 반했나
노랑 복숭아를 좋아하는 녀석
엄마 뱃속에서 먹은 그 황도를 기억하는 걸까?
"엄마가 너 가지고 황도를 엄청 먹었거든.
그래서 우리 딸 피부가 이렇게 예쁜 거야~

엄마한테  고마워해야 돼!"
뜬금없이 생색이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아직도 여드름 하나 없이

매끈하고 예쁜 피부에 발그레한 볼따구는  

그때 황도를 먹은 까닭이라고
누가 뭐래도 혼자 굳게 믿는 딸바보 엄마다


태교로 바느질했던 어떤 엄마의 딸내미가

바느질을 진짜 좋아한다는 말도 떠오르면서
수학이라면 질색을 하는 녀석이 될 줄

미리 알았으면 태교로 수학 문제를 좀 풀어볼 걸 그랬나

꼬리를 무는 상념 속에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앗! 황도 박스를 챙기다가

밤에  마시려던 맥주 한 캔은

바구니에 담아둔 채 깜박 잊고 말았다

자식이 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렇게 건망증은 중증인데
녀석이 먹고 싶다 했던 건

절대 잊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오늘은 녀석 덕분에
달달한 황도 같은 저녁이다


글, 사진: kossam


※그러고보니 녀석이 젤루 좋아하는 카카오프랜즈도 어피치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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