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의 죽음이 들린다.
또래가 죽었다. 19살. 컵라면이 들어있던 가방. 그는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다. 2인 1조가 상식인 곳. 그 상식은 자본 앞에 무너졌다.
호주에 와 좋은 점은 시급이다. 17불. 한국 최저시급의 약 3배. 하는 시간만큼 급여를 준다는 간단한 상식이 이곳에서는 통한다. 그 상식 덕분에 생존해가며 소비할 수 있다. 내 또래가 일하던 시간만큼 여기서 일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10시간씩 1주일만 일해도 주 1200불 남짓. 월 4800불.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500만원 돈이다. 그는 500만원으로 대학을 다니든 다른 걸 하든 지금처럼 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먹었던 컵라면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을 것이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노동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착잡하다. 한국에서의 노동은 생존이다. 살아가기 위해 해야하는 것. 호주에서의 노동은 삶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 기회를 포착해내는 것. 그러기 위한 노동이고 급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는가 싶다. 그리고 나도 그러고 있다.
한국에서 보낼 시간들이 가끔 두려울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러하다. 이런 뉴스를 보며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한국이 두려워진다. 내가 가면 저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할텐데. 아니 살아가야 할텐데. 무엇을 보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막연한 벽의 실체가 차츰 만져진다. 목표는 저 멀리 있지만 벽이 높다. 이 벽을 부술 방법은 몇 가지 없다. 그 몇 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 그나마 그 몇 가지를 얻더라도 부서질지 확신할 수 없는 사회. 현재의 한국이다.
그렇게 또래의 죽음을 애도하며 나의 불안감을 톺아봤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