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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Jul 29. 2016

잔인한 동화

그래도 해피 엔딩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잔혹 동화와 같은 단락이 숨어 있다. 꽃 날리는 봄날의 화려함에 가리어진 채 그늘 뒤에 몸 사리며 숨어 있는 어둔 그림자. 인연인지 악연인지 떼놓을 수 없는 나의 일부로 흡수돼버린 어린 날의 악몽...




내 어린 시절 속에는 "아빠"가 실종되어 있다.

아빠는 방학 때 잠시 외제 선물 가득 들고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과 같은 존재였다. 마치 계절을 혼동해 여름날 찾아오는 산타클로스 같았던. 아빠는 중동 지역 건설붐을 이끈 한국건설업계의 한 숨은 주역으로 70년대부터 해외에서 보낸 날들이 가족과 함께 고향땅 밟고 지내신 날보다 많고, 그로 인해 우리 집에는 가장이 오랜 기간 '부재중'었던 것이다. 매년 여름방학 때만을 손꼽으며 기다리는 나에게 가장 부러운 대상은 매일 저녁마다 퇴근 후 귀가하시는 아빠를 맞는 친구들이었다. 행복한 꿈은 왜 항상 쉽게 깨어지는 것인지, 달콤한 아빠의 휴가는 질주하는 100m 달리기처럼 순식간 막을 내렸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엄마 잘 보살펴드리고, 동생들과 우애 좋게 지내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아빠는 떠날 때마다 나에게 많숙제를 건네주고, 길고 긴 부재의 시간을 허락하셨다. 그렇게 띠동갑 막내(여) 동생이 태어나기까지 아빠 없는 지붕 아래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세 딸, 여자 다섯이 살았던 길고 긴 날들.  


어린 시절 나에게 아빠란 존재는 무엇보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우리를 지켜주어야 할 울타리라고 생각했다. 어렸기 때문인지 아빠의 수입으로 온 가족이 걱정 없이 살아간다는 것보다 예기치 못할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이 가장으로써 짊어져야 할 가장 중역할이자 의무라 여겼던 모양이다. 돈의 가치를 알기에 너무 어렸고, 굶주린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막연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나이... 

어린아이의 시선이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그때는 세상이 순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평화는 가지각색의 원인으로 흔들리는 법.

엄마와 바로 손 아랫동생은 밥 먹듯 아프기 일수였고, 당시 우리나라 교육의 영향인지 간첩이라도 넘어오면 어쩌나 '아빠의 부재'는 그 자체로 불안, 두렴, 근심의 요인이었다.


아빠 없는 땅 위에 내게 가장 큰 적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드는 밤었다.

세상의 밝은 빛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면 영락없이 아빠의 존재가 몹시 간절했다. 어렸던 내게 어둠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영화와 동화 속에서도 많은 사건 사고들이 어둠 속에 일어나곤 하지 않던가. 더불어 유난히 겁 많은 엄마, 모든 게 다 괜찮다 유유자적하셨던 할머니 그리고 두 어린 동생. 그들을 지켜줘야 하는 울타리인 아빠를 대신할 어른은 우리 집에 없다고 판단한 나는 나 스스로가 아빠를 대신해 집안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막연한 책임감을 자처해 짊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시커먼 밤마다 몽유병 환자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대문부터 시작해 긴 베란다 저쪽 구석에서부터 이쪽 구석에 이르는 모든 창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주방 가스관은 잠겼나, 할머니는 방 안에 TV를 켜놓고 잠이 드신 건 아닌지, 동생들은 이불을 잘 덮고 자는지, 엄마는 별 탈 없이 주무시는지 집안 구석구석을 쥐 잡듯 훑어보고 나서야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고, 그 행위는 매일 밤 평균 두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창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는 순간순간 학교에서 들은 귀신얘기가 실제 상황으로 나타나면 어쩌나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도 지켜야 할 대상이 있기에 하이디의 친구 클라라처럼 온 집안을 어두운 밤마다 휘집고 다니는 버릇이 무의식 중에 생긴 것이다. 두려운 순간이 닥칠 것을 방지하고자 한 자발적 행위 었으나, 결국 번복되는 밤나들이 속 어린아이는 스스로를 두려움에 가두어 버렸다.


집안 누구도 내게 이런 행동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내가  시절 밤마다 몽유병자처럼 집안을 이 구석 저 구석 살피고 다닌 사실을 아는 가족 일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모두가 나의 솔선수범을 헤아려주는 듯 내심 한편 기뻤다. 아마도 아빠 없는 집 안의 큰 딸 역할을 그렇게 멋지게 해냈다 집안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욕심이 마음 구석 어딘가에 숨어있었던 모양.




그러나 맏이이기 이전에 어린아이였던 내가 감당하기엔 그 상황이 엄청 부대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불면증이 찾아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

공포...

헨젤과 그레텔이 과자의 집에 현혹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다행인 것은 어렸기 때문인지 하루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치매환자처럼 그 공포를 까맣게 잊고 뛰어놀 수 있었다. 어쩌면 현실감 약한 아이였기에 '에이 설마'라는 의심과 '오늘은 괜찮을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건지도... 결론적으로는 그랬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것이 아닌 특정 시간만큼은 그 공포로부터 해방된 셈이었으니 말이다.

 "늑대다!"라고 장난 삼아 외친 목동에게 여러 번 속은 마을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오늘은 안 속아!"하며 쿨하게 넘길 수 있기를 바랐지만, 장난에 재미든 목동에게 닥친 실제 위험 순간처럼 불면의 밤은 매일 현실이 되어 다가섰다. 


아빠 없는 집안의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이었는지 어린 시절 내 불면증의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매일 밤 고요가 깔린 어둠 속 시계침 소리조차 침묵하는 듯한 세상에서 가장 크게 내 귀를 자극하는 소음은 바로 내 두 눈의 깜박거림...

어린 시절 지독한 책벌레였건만 당시는 바야흐로 1970년대. 절약이 생활인 시대를 살았던 때문인지, 책이 좋아 환장하던 아이였음에도 시커먼 밤 허옇게 전기불 켜놓고 책을 볼 용기를 내기엔 너무 마음이 여렸던 시절. 요즘 아이들이라면 그런 걱정 없이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하나로 거뜬히 밤을 새울 텐데...


마 품을 찾아 함께 잠을 청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혼자 새근새근 잠든 엄마가 원망스러울 뿐. '엄마 나 잠이 안 와'라고 자는 엄마를 살짝 흔들어 하소연해봤지만 그저 말없이 나를 꼭 안아 주는 게 엄마가 해주실 수 있는 최선이었나 보다. 오히려 나는 그때의 엄마품이 더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자그마했던 아이에게 엄마의 품은 바다처럼 넓고 깊었고, 그 에 갇힌 채 가려진 시야, 막힌 숨통은 내 두려움을 도려 배가시켰다. 시야가 막히니 주변의 어둠이 더더욱 깊고, 거친 검은 베일 뒤로 몸을 숨겨 버린 듯 느껴졌다. 시야에서 벗어난 상대는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두려움이 더 커지는 법. 엄마 품 속에 얼굴이 묻힌 채 갑갑함만 더해 갔지만 또 한 번 엄마의 잠을 방해할까 싶은 조바심에 꼼짝달싹 움직이지도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운 수많은 날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란 환경은 그 사람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때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나의 습관은 성인이 된 현재까지 나와 영 이별을 나누지 못하고 나를 쫓아다닌다, 마치 스토커처럼.

이후부터 나는 무엇이두세 번씩 확인을 해야만 스스로 안심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머리는 '분명히 했어!'라고 신호를 주는데, 마음은 '한 번 더 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자꾸 의심을 불어넣는다. 대문을 나서며 분명 막 끄고 나온 스치위도 '껐나?', 창문을 제대로 닫은 게 분명함에도 '아냐 침실은 안 닫은 것 같은데?' 자신에 대한 불확신앓는다. 확신이 들어도 도마와 같이 다시금 눈으로 봐야만 믿어진다. '확신해!'라고 지나치게 자신 있는 척 집을 나선 날은 종일이 지옥이다. 물론 재차 확인한다고 나쁠 것은 없다.

옛 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엇이던 적정선을 넘어 지나치면 병이 된다. 모자라면 부주의했던 대가를 치르게 되듯이.


근 30년을 함께 산 식구들은 나의 이런 행동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눈에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래서 너무도 정상적으로 비쳤을 런지도 모르겠다. 또한, 누구 하나가 챙기다 보면 그 상황에 익숙해져 다른 이들은 그 한 사람에게 무의식 중 의지하고 미루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가족 외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나는 나의 모습이 그다지 정상적이 아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결혼 후 남편을 통해서 나의 강박증이 정도를 넘어 그 누군가에게 불편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남편은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마음 좀 편하게 가지라고 결혼 초반부터 나의 이런 행동을 지적했다.

그렇게 생긴 걸 어쩌라고 짜증부터 냈지만 누구보다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건 바로 본인이었음을...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더 불안할 시간이 미리 두려웠기에 번복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해결구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연함에 그냥 눌러앉았다.




내 어린 시절 '잔혹동화' 속에 나를 가둔 채 그곳에서 달아날 방안을 스스로 구하기보다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길 고대한 셈이. 그 구원의 손길이 내겐 남편이었다.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려는 기척을 들으면 옆에서 남편은 날 말려주었다. '내가 다 확인했으니 걱정 말고 계속 자.', 여행을 떠나려 대문을 잠그다 열쇠 방향을 되돌리노라면 옆에서 '전기? 창문? 뭐 확인하려고? 내가 다 보고 나왔어.'... 나의 불안증을 잠재울 수 있게 먼저 다독여 주는 남편이 내 오랜 심리적, 정신적 병을 다스려주는 유일한 치료사였던 것이다. 하물며 는 엄마 품에서 조차 구하지 못한 "안도"라는 효험의 묘약.


그럼에도 아직까지 남편이 출타하면 다시 나의 옛 습관은 잊히지 않은 채 그대로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잠근 대문에 꽂힌 열쇠를 또다시 돌려보고, 방방마다 창문을 훑어보고 나서도 어둠 속에서 잠을 쉬이 청하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 출장이나 여행을 떠나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혼자 잠을 이루지 못함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렇다 해도 누군가에 의지할 수 있기에 어렵게 어렵게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스스로 발견하니 참 다행이다 싶다. 이런 이유로 누구나 동화 속 왕자님을 꿈꾸는 것인가?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결혼 20년이 지나고 난 지금...

내가 나아진 만큼 남편이 나에게 전염이 되었다.  

남의 병 고쳐주려다 자신이 감염된 셈이다.

내 고유의 행동을 자신이 하면서 중얼거린다.

'내가 너한테 옮아서 웬 고생이냐?'

옆에서 나는 그저 말없이 미소 짓는다. 

나만의 방식으로 건네는 고맙다는 인사다.

백설공주나 숲 속의 잠자는 미녀처럼 수많은 동화 속 주인공들 또한 악한 마법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준 왕자님을 만났기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었듯 우리네 인생에서도 귀한 인연은 우리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이와 흡사한 잔혹한 기억 하나쯤은 가슴에 담고 있다. 학창 시절의 왕따였던 아픔, 물에 빠졌던 트라우마, 심하게 체해 그때 먹고 체한 음식은 아직까지 입에 대지도 못하는 거부감, 사랑하는 누군가를 멀리 보내야 한 끔찍한 고통 등으로 얼룩진 단락 하나쯤은 모두가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기억하자, 수많은 동화들은 대다수 해피엔딩이었음을.

그 스토리가 아무리 잔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구원의 손길을 만나는 순간 악한 마법은 풀리고, 새 날이 밝아 온다. 그리고, 마법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줄 그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음을 깨닫자!

동화 속 주인공들은 어찌 보면 참으로 무기력하고, 행운에 인생의 전부를 건 캐릭터로도 비친다.

그저 착하기만 하다고, 모두에게 행운이 오는 것도 아닐진대 말이다.

이 동화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착한 사람은 복 받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이기 이전에 동화 속 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강해져 손수 내 인생의 해피엔딩을 만들어 나아가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물론 독극물에 잠든 공주들이 남의 도움 없이 어찌 되살아 나겠냐마는 그런 극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우리는 스스로 마법을 깨고 탈출한 헨젤과 그레텔처럼 내 힘으로 내 인생의 종착역을 "해피엔딩"으로 장식해 볼 수 있기를 희망함이 옳을 것이다.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절로 도움의 손길도 뻗어주리라...

Finding happy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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