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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Sep 26. 2015

영원한 진행형

It never ends

어렸기 때문일까, 난 무지했다.

'외국 가서 1년만 살다 보면 그 나라 사람 다 돼!'

내가 독일로 건너올 즈음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한 말이다.

내 나이 열일곱, 순진하다 못해 바보스럽게도 나는 그 말을 감쪽같이 믿었다.

더도, 덜도 말고 꼭 1년만 채우고 나면 독일인들 버금갈 만큼 독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언어문제가 해결되면 학업과 사회적응 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훗날 돌이켜보니 당시는 해외여행도 흔치 않았던 때인 만큼 외국생활을 해본 적 없는 어르신들이 먼 길 떠나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시려는 격려를 순진했던 탓도 있겠지만 그렇게 믿고픈 간절함이 더욱 컸기 때문이리라!


영어였다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외국어이니 가능했을까?

언어를 배우는데 무슨 공식이 있겠는가? 성격과 재량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겠지...

요즘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을 보면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내게도 어려운 우리말을 어쩌면 그리도 잘 구사하는지 내 언어 습득력이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통역장교를 지내고 오랜 해외근무를 하신 아빠, 동시통역대학을 나와 최소 3개 국어는 완벽히 구사하는 막냇동생을 보면 우리 집안에도 언어에 능통한 피가 흐르는 건 맞는데 하필 난 예외인가 보다.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독일에서 보내고 있다. 이 나라에서 호흡한 세월이 태어난 고국에서 체류한 기간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독일에 몇 년 살았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살짝 긴장한다. 왜? 1년만 참고 기다려보자던 소녀가 어느새 마흔 중반의 나이가 다 되었건만 여전히 나의 독어 실력 앞에 스스로 당당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독일인과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해서, 머리가 똑똑하다고, 영어실력이 탁월해 언어적 재질이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라 독어를 완벽히 소화해낼 것 같아 보였던 이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주춤대는 독어실력에서 정체된 채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왜 이처럼 '독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쉬이 뛰어넘지 못했을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독일로 건너온 시기는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새 학년을 맞이하는 가을학기를 앞둔 여름방학 끄트머리였다. 독일 땅을 밟자마자 학교 진학 문제를 해결하려 이곳저곳 뛰어 다녔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어정쩡한 나잇대에 무턱대고 외국으로 건너와 현지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어떤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하는지 현실감 있게 다가섰다. 여러 가지 필수조건을 간과했다. 그것도 하필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며 제2외국어로 선택했던 독어가 모국어인 나라로의 유학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도, 자녀 유학이 처음인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도와준 독일의 지인들도 모두 첫 경험인지라 독어만 습득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곳에서 '독어'는 제2외국어가 될 수 없음이 당연했고, 따라서 붕 떠버린 제2외국어 조건을 메울 대안이 있을 리 만무였다. 게다가 말을 알아 들어야 수업내용을 이해할 텐데 Guten Tag, Guten Morgen 등 간단한 인사말, 내 이름 소개 정도의 매우 기초적인 문장 외에는 대화조차 불가능한 학생을 어느 학교에서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자청하여 나서겠는가? 절망적 순간에 마지막 희망이라 믿고 찾아간 당시의 헤센주 교육청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나는 독일 학교로의 진학이라는 벽을 가까스로 넘게 되었다. 단, 조건부 입학이었다. 언어적 핸디캡을 이유로 2년 낮추어 입학하되, 1년 간의 유예기간 후 진학이냐, 퇴학이냐 학교 교장에게 결정을 일임하겠다는 일종의 시한부 인생과 흡사한 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일반 고등학교(Gymnasium)가 아닌 일종의 실업고등학교 격인 Realschule로의 진학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상 인생의 전부는 대학으로 여겼기 때문에(아직도 그런지도 모르겠만...) 실업고등학교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가 있었다. 그 선입견은 고스란히 내 몫이기도 했다. 때문에 눈 앞이 캄캄해졌고, 현지 상황도 제대로 모르는 채 무턱대고 이 나라로 날 보낸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것인가 싶으면서도 어떻게 던 극복해내야지 오기도 불끈 생겼다.  


실전에 당면하니 상상했던 것보다 독일에서의 학교생활은 더더욱 녹록지가 않았다.

언어장벽을 뛰어 넘는 것보다 성적 따라잡기가 급선무였기에 언어를 배우는 일조차 뒷전시 되었다.

독어를 모른 채 성적을 어떻게 따라 잡냐고 의문을 갖겠지만 가능했다. 어떻게?

요즘 교육방식은 어떤 지 잘 모르지만 내 또래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암기에 강했다. 언어로 승부를 걸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무조건 책을 송두리째 외우는 길만이 살 길이었다.

또한 나는 언어에 소질이 없는 대신 숫자와 셈에 밝았다.

숫자와 논리적 사고로 이해하는 자연과학 관련 과목은 언어적 핸디캡에도 불구, 진도로 승부하던 당시의 한국 교육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익숙한 이들에게 모든 걸 암산으로 계산해내고, 풀어가는 과정 없이도 정답을 척척 내놓는 나는 놀라운 존재 그 자체였다.


또 다른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강점은 성실함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개근상이 뭐라고 열이 펄펄 끓어 올라도 수업은 절대 빠지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며 학교를 몇 년간이나 다녔는데... 수년간 몸에 익혀진 습관은 한국을 떠났어도 여전히 나의 몸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독일에 와서도 단 한 번의 수업을 빠진 적 없이 수업에 임했다. 아픈 데 왜 굳이? 옮으면 어쩌라고? 무리하면 더 오래 앓는 법인데? 등등 갖가지 이유로 왜 아픈 몸 끌고 등교를 하느냐는 이 곳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반응이 매우 생경했다. 무슨 상관 이람 내 몸을 내가 혹사시키던 말던...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은 걸까? 지독하다 내가 졌다란 생각이었을까? 독어, 역사, 종교 등 오로지 언어로 극복해야 하는 과목에서 특히 발표율이 적어 성적이 미달임에도 선생님들은 문제 삼지 않았다. 불공평한 처사라고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해석은 이렇다. 이 나라는 시험지의 답만을 가지고 채점을 하지 않는다. 정답을 향해 가는 과정을 생략하면 절대 정답을 썼어도 절반의 점수만 주는 곳, 모든 것의 과정까지도 중시여기기 때문에 이 또한 가능했던 것이었다고.  그때를 회상해보면 나는 지금도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큰 절박함을 안고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라고.


왜 '인생 = 대학' 공식에 집착했을까?   


실업고에서 일반고로 무사히 진학한 후에도 나는 변함없이 성적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구를 사귈 시간조차 허용할 수 없었다. 내 스스로 그들과 선을 긋고 살았다. 독일에서는 만 5세~6세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런데다 난 2년을 낙제한 셈이었으니 같은 반 친구들이 빠짐없이 나보다 훨씬 어렸고, 나이차가 나는 만큼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철없이 너무 유치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보다 매우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한국사회에서 자라난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개방적인 이들의 문화에 아찔할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 문화를 받아들이는 순간 타락할 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이 컸다. 성인으로 인정받는 18세가 되기도 전에 흡연, 음주, 연애, 수업 중 애정행각, 진한 화장에 대학생 버금가는 옷차림 등등 등...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가 순수한 친구들이었는데 사회적, 문화적으로 접하며 살아온 환경이 다른 탓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차이일 뿐인데 으레 그들을 타부시 시켰던 어린 시절의 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거늘 남의 나라에 와서 그 문화와 사람들을 등진 채 나는 스스로를 나만의 세계에 철저히 가둔 채 알아듣지도 못하는 교과서 그리고 내 자아와 혈투하며 외롭고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한국이었다면 입시 고문은 더 심했겠지만 함께 웃고 울어줄 친구들이 있어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만 했다. 바로 이 곳에서 내 마음을 나눌 친구를 사귈 수 있단 생각은 꿈에도 품어보질 못했으니...

 초반에는 생소한 나라에서(88 올림픽 이전에는 한국이란 나라를 아는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온 내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선 친구들이 몇몇 있었지만 함께 어울릴 짬을 내지 못하는 나에게서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그게 서운하지도 않았다. 공부가 최우선이었기에 사람의 소중함을 놓치고 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무지함 속에서 선진적 교육방식으로 공부하겠노라 이 먼 나라까지 왔건만 한국에서 배운 그대로 고리타분한 주입식 교육방식을 적용하고 있었으니 무슨 발전이 있었으랴! 그렇게 나는 수년간을 늘 북적대는 교정을 혼자 서성였고, 등굣길부터 하루 수업의 끝시간을 고대하며 벙어리가 되어 갔으며, 독일이란 나라에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한 채 학업을 마친 후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는 '인생=대학'이라는 공식을 적용하면서 살아야 했을까? 왜 대학에 집착해야만 한 걸까?

독일에 오기 전까지 집과 학교가 삶의 전부였던 순진했던 고교생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겠지?

본의 아니게 2년 낙제한 꼴이 된 것도 억울한데 더 이상의 시간낭비? 꿈에서조차 생각해선 안 되는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긴 나를, 때 맞춰 학업을 마쳐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집착한 내 행동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때 우리 사회가 그렇게 학생들을 세뇌시켜 놓은 것을! 결국 틀에 박힌 사고 탓에 학업을 마칠 때까지 성적 외 다른 모든 것을 뒷전시해야만 했다. 애석하게도 '언어는 현지에서 부딪히노라면 금방 배운다'라는 공식이 내게는 적중하지 않았다. 오로지 몸뚱이만 현지에 있을 뿐 모든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고향땅을 떠나지 못한 채 현지화를 거부했으니 당연지사인 셈...




독일에서는 등수를 가르지 않는다. 등수로 어떤 대상을 판단하지 않는다.

독일의 최고 대학? 1등 기업?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개념이 독일에서는 '우수'하다는 의미로 일괄 상통하는 것 같다. 이 곳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등수의 개념이 없다. 우수대학, 우수기업은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한국 최고의 대학,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개념을 이들은 아예 생각조차 않는 듯하다. 오로지 순위를 가르는 분야는 스포츠가 유일한 것 같다. 이런 사고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특정 대기업이 아닌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이 나라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다고 얕보지 않고, 겉으로 초라하다고 무시하지 않으며, 1등만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나라!   

아무리 성적이 우수해도 대학 진학을 마다하고 생업에 종사하겠다는 학생들도 예상 외 많다. 교사들 또한 그런 학생들에게 굳이 대학 진학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학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는 이들의 사고방식에 기인한다.  

또한, 사회진학 후에도 여러 갈래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기 때문에 조금 미뤄도 딱히 문제 될 것이 없다. 다양한 체제와 가능성을 열어둔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기 나와 같이 터무니없는 나이의 외국 학생이 다수 조건이 충당되지 않음에도 학교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이처럼 멋진 교육체제에서도 그저 우수한 성적에 급급해야만 했던 것이다.

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내 삶의 목표가 대학이어야만 했으며, 한창 친구들과 어울릴 시기에 홀로서기를 자처할 만큼 성적만 중시 여겼을까... 

한참 후에나 뒤돌아보니 참 억지였다. 너무 어려서 하나 밖에 몰랐던 순진함 때문이겠지...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건만... 제수, 삼수하면 좀 어때서?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음이 몹시 억울하고, 후회도 너무 크다.

더 이상 한국땅을 밟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비슷한 연령대에 대학을 졸업해야 할 것 같은 억지는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그렇지만 않았어도 나의 초반 독일 생활이 그리 고독하고, 힘겹지 않았을 것을.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대 무기인 언어부터 어느 수준까지 터득한 후 학업을 고민해봤다면 어땠을까? 등지고 산 독일 현지인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 친구 삼고, 어울려 놀며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려 노력했다면 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아직까지 이방인처럼 겉만 맴돌며 살고 있지 않았을 텐데... 네이티브 수준까지는 아니래도 감정과 의사표현에 제약을 훨씬 덜 받는 유창한 현지어 실력을 갖추었다면 내게 주어지는 기회도 더 다양했을 텐데.  사회인이 된 후에나 나의 독어실력이 이 곳에서 살아온 시간 대비 상당히 부족함을 깨달았지만 공교롭게도 한국기업에 취직을 한 이래 또다시 더 계발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덮은 채 여태껏 불편함 없이 지내왔으니 독어와 인연이 이 정도일 뿐인 걸까?  


兩 언어의 장애화


어디 그 뿐인가. 외국에서 사는 만큼 우리말 장애도 날로 심화되어 간다.

내가 한국 땅을 뜬 이후 변경된 맞춤법이나 문법을 다 깨고 있을 수도 없지만 무엇보다 한국은 빠른 변화와 성장이 이뤄지는 나라인 만큼 언어도 그 추세에 장단을 맞춰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 같다. 수 많은 유행어와 신조어가 탄생하고, 사라지며, 예전과는 달리 약어 사용률도 부쩍 늘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게다가 문법에 맞지 않는 불편한 극존칭어넘쳐 다. 급격한 성장 속 유행에 민감한 사회가 낳은 최대의 허점이까...

한국말을 할 줄 알면서도 이러한 사회적 추세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인 재외국민들에겐 한국에 나갈 때마다 생소한 단어와 표현법, 쉼표와 마침표 없이 우두두두 말을 기계처럼 내뱉는 사람들 앞에서 당혹스러워 버벅대기 십상이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고향에 와서도 이방인과 같구나' 울적해진다.

또한, 독일과 한국, 어디를 가도 세트처럼 나를 따라오는 언어적 핸디캡 때문에 난 항상 딜레마에 빠져 고민을 한다. 내 고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 책을 읽어야 할까?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예의와 내 삶의 향상된 질과 편의를 위해 독일 책을 읽어야 할까?

실제로 언제부터인가 눈에 보이는 것들, 마음에 동해지는 것들, 귀에 들려오는 것들... 내게 전달되는 모든 느낌과 감정에 대한 표현력에 장애가 오고 있다. 독어는 물론, 모국어인 한국어조차 단어 사용과 어휘력의 한계, 틀에 박힌 문장력에 이대로 표현의 바보가 될까 두려 한숨이 늘었다.  

내 삶에 가장 가까운 두 개의 언어환경 속에서 나는 어느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언어 장애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씁쓸함.


아직까지 나는 이 언어의 장애를 극복할 비상구를 찾지 못했다. 어느 하나 놓칠 수 없기에 난 두 개의 고삐를 계속해서 조이며 살아가겠지. 다행이라면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하나도 잡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될까 두려웠던 때는 이미 지난 것 같다. 완벽하지 않을 뿐 사는데 지장은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는 어떤 언어로든 순간순간의 감정과 느낌 표현에 좀 더 민감해지려 한다. 미리 겁먹고 표현하기를 아예 포기하지도, 안으로만 삼키지도 말고,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며 칭찬해주려 한다. 그렇게 많은 욕심 부리지 말고 이 만큼 이룬 것에 감사하한 걸음 한 걸음 앞을 보고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이렇게 나의 독일 적응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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