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하시는 하나님
아내의 희귀병 진단에 남편은 의도와는 달리 암담한 눈빛을 흘렸다.
아내만 있으면 온 세상이 자기 것인 양 만족해하는 여리고 특이한 남자. 이 남자 때문에 마음이 더 시리고, 당면한 상황이 몹시 절박하다.
절망의 순간은 예고 없이 엄습해온다는 법칙이 있는 걸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속담이 이유 없이 만들어진 게 아니로구나...
하지만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또 하나의 이치를 많은 이들이 살면서 간과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시련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려움에 처해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순간, 도움의 손길 또한 소리 소문 없이 살며시 찾아왔다.
날벼락같은 희귀병 진단을 받고, 대체 어떤 몹쓸 병이기에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인지 궁금증이 폭발했다.
하물며 주치의와 병리학 전문의, 시술을 집도한 의사 세 명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데 어쩌면 나는 그들의 판단을 의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 치료약이 없는 병은 분명 있다.
하지만 코로나처럼 극히 최근 발생한 바이러스가 아닌 이상 이처럼 알려진 게 없는 병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없었다면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흉한 사진들이 다수 눈에 띄었고, 접근이 제한된 논문 외에는 딱히 일반인의 입장으로 참고할 만한 내용은 많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기록이 시작된 질환으로, 발병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정보 외에 수확이 없었다.
어디서 이 병을 다스려줄 의사를 찾아내지?
난감할 뿐이었던 순간도 잠시.
예비된 귀인이 이미 내 곁에 있었다!
알고 지낸 지는 십 년 이상이지만 최근에서야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며 마음을 터놓게 된 언니가 있다.
아내들의 친분으로 가족들의 만남은 물론, 남편들끼리도 정기적으로 운동도 하면서 단 기간 서로에게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마침 언니의 남편이 의사다.
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신의 일처럼 적극 발 벋고 나서 주었다. 전문 분야가 내과임에도 불구, 본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손 든 나의 20년 지기 산부인과 주치의보다 더 체계적으로 알아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었다.
우선 동료 의사가 운영하는 방사선 병원에 직접 연락해 발 빠르게 검사일시를 잡아주었다. 이 종양의 연조직 특성상 초음파로는 확실한 파악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란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만큼 논문 등을 참고하여 스스로 공부하고, 방사선 전문의와 교류하며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종양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며 불안 속에 휩싸인 우리 부부의 심리 상담까지 자처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 내로라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내 케이스를 알리고,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는지 수소문해주었다.
그 결과, 두 개의 종합병원에 상담 일정이 잡혔고, 그중 에센(Essen) 시에 위치한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종양전문센터는 이 종양부문 유경험 기관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코로나 발생 초기, 하필 에센이 위치한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가 독일 내 진원지였기에 상담 시 보호자 동행도 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당연하더라도 유일하게 같은 하늘 아래 가까이 사는 막내 동생도 휴가를 마다하지 않고 굳이 동행하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가까이 피붙이가 있어 든든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띠동갑 언니보다 의젓한 막내는 오가는 길 내내 경직된 나를 살갑게 살피며 상담 시 반드시 확인해볼 사항들을 재차 주시시켜 주었다.
편도 두어 시간의 거리가 부담스러웠으나 기대가 컸다. 그랬던 만큼 실망도 비례했다.
에센 대학병원 담당의사는 이 희귀성 종양부문에 있어 어쩌면 독일 내 유일한 경험자일 수도 있다.
때문이었을까?
이미 경험이 있음을 근거로, 자신감을 과다하게 장착한 인상이 불편했다. 불안에 잠긴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몹시 경솔하게 느껴졌다.
다행스럽게 이 병원에 앞서 프랑크푸르트 (옆 동네)에 소재한 Sana 종합병원에 근무 중인 의사 친구의 전 동료 내장 외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았었다.
그곳에서 종양의 위치를 근거, 산부인과보다 내장 외과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술 시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수술 및 이후 재활에 관한 시나리오를 매우 상세하고,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받았다.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빗발침에도 불구, 그녀는 마주 앉은 환자에게 충실했다. 궁금한 사항들까지 꼼꼼히 챙겨가며 대답해주었고, 따뜻한 독려도 잊지 않았다.
경험이 없음을 솔직히 드러냈지만 엄청난 양의 예습으로 다각도에서 이 종양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해본 흔적이 역력히 전해졌으니 더 바랄 것도 없었다.
반면, 에센 대학 산부인과 종양센터 교수에게 중요한 것은 환자의 입장보다 유경험자인 본인의 명성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박혔다. 그런 본인이 직접 수술을 집도한다라는 것 외에 환자의 입장에서 품는 궁금증 해소의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태도였다.
환자를 대하는 성의의 결핍, 이미 내 마음은 기울었다.
그렇게 나는 이성이 아닌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내 결정에 대한 의심도 없었다.
남편도 동생도 나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아마도 복잡한 상황들을 미리 인지 못했다면 유경험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다행인가?
종양의 발견부터 수술을 받기까지 모든 과정들이 흘러오는 대로 전개된 것이려니 했지만 뒤돌아 보니 묘하게 맞춰지는 퍼즐들이 있었다.
의사 친구네와의 친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갔을까?
무경험 의료진들이 포진해 있으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최적의 솔루션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병원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도, 유경험 기관이 아닌 이 병원으로 내 마음이 기운 것 또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해 평소 꿈 꾸지 못했던 재택근무도 나의 발병 시기와 맞물리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들쑥날쑥한 환자의 컨디션으로 출퇴근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덜 수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요.
주변의 친구들, 지인들은 끊임없이 먹거리를 공수해왔고, 평소보다 안부를 궁금해하는 인사들로 내 핸드폰은 쉬지 않고 울려댔다. 전해오는 긍정의 덕담과 해피 바이러스로 귀로나마 희망을 접수한다.
한국행도 알아보던 차, 코로나로 항로가 막혀 버리는 사달이 났다. 이 또한 하늘의 뜻이었음을 최근에서야 비로소 깨닫기에 이른다.
혈관점액종은 양성이기 때문에 WHO 기준, 경계성 종양으로 분류되어 한국에서는 진단비 지급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에 부딪힌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전 과정을 보험에서 일체 부담해준 데 비해 한국에서 치료 및 수술을 감행했다면 지금쯤 빚쟁이가 되어 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니 한국행이 그 시기부터 막혔음 또한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이 될까?
사전 치료부터 수술 후 현 상태로의 회복까지 약 1년의 시간 동안 남편과 생이별 속에 한국에서의 투병생활이 진정 더 속 편했을지 역시 의문이다.
시련 앞에 더 간절하게 붙들게 되는 것이 믿음이다.
범사에 감사하지 못했던 삶을 회개하며 십자가를 더욱 움켜잡게 되고, 치유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경련이 일 정도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져 허구한 날 눈물로 볼을 적시며 원망도 많이 했다. 왜 하필 나여야만 하느냐고...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라고 강조하면서도 날 진정 도와주실지 의심도 쉬이 꺼지지 않았다.
과연 이 상황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팽배해져 가는 의문 속, 인연과 우연의 연결 고리를 통해 순차적으로 진행된 과정들. 적시적소에서 필요로 하는 손길이 내게 닿았으나 그 시간의 계산은 도무지 인간의 머리로 설명할 수 없는 성격의 것들이었다.
나는 희귀병을 얻고서야 나를 위해 진즉부터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저마다의 용량에 따라 시련을 허하시며, 시련과 함께 견뎌낼 능력도 더불어 허락하심을, 또한 내가 직면할 상황을 유일하게 아셨기에 곳곳에 필요한 시기에 맞춰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두셨으며, 모든 과정이 우연처럼 포장되었으나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발병 1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 모든 과정을 다시 뒤돌아 봐도 아찔했던 순간들마다 여러 손길을 통해 나를 붙드시고,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병과의 싸움을 꿋꿋하게 견디어 낼 수 있으리라 다짐해본다.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n ever-present help in trouble.
- Psalm 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