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
Angiomyxoma(혈관점액종).
이 종양은 두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악성은 아니지만 하필 내 안에 자리 잡은 것의 특성이 공격적(aggressive)이라고 한다. 조직에 들러붙고, 파고들며 면적을 넓혀 가는데 떼어 내기가 어려워 종양이 침범한 영역을 적게는 도려내거나, 통째로 절단하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한다.
발견 초기 이미 종양의 영역이 꽤 넓게 자란 상태였고, 항암제로 사용되는 항호르몬 사전 치료의 효과도 미지수였다. 직장 및 괄약근 일부를 절제해내야 한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했고, 그 경우 수술 후 약 3개월간 항문 기능을 멈추게 하여 수술 부위의 회복을 유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소장에 배변주머니를 연결한 채 생활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섭취물이 대장에 달하지 못한 상태로 소장에서 배변으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식음이 버거운 시간들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술 전 잘 먹고, 체력단련에 힘쓰라는 미션을 더불어 받았다.
그 3개월이 지난 후 항문 기능을 되살리는 수술을 다시 받고, 기능을 멈추었던 기관의 기능을 되찾도록 또 다른 3개월간 특정 시설에서 재활을 받아야 할 것이라 했었다.
이것이 애초의 시나리오였다.
어떤 고통이 수반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려지지 않는 미래 상황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저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병원의 종양 보드에서 항호르몬제를 투여하는 사전 치료를 시도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종양에 대한 논문을 바탕으로 이 종양은 유일하게 항호르몬제에 반응하여 크기가 감소하는 효과를 견인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100% 보장은 못 하지만 동일한 결과가 초래되기를 믿어보자며 이유 있는 설득을 했고, 이는 마다할 수 없는 유일한 솔루션이었다.
긴가민가 의문 속 애초 3개월을 목표로 돌입한 사전 치료 기간은 반년으로 늘어졌다. 중간점검 MRI 촬영으로 종양이 반응함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와 시작된 전쟁 중 수술 시기를 늦추게 되었으니 일석이조였다.
갱년기 증상은 이미 나타났지만 투여받은 유방암 및 전립선암에 적용되는 항호르몬제로 컨디션이 널을 뛰며 들어 눕는 날이 잦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큰 병과의 싸움은 다른 작은 병들을 일으킨다.
일상이 전 같지 않다.
부작용과 더불어 감수해야 할 많은 것들이 따랐지만 의도한 결과 앞에 감사함으로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긴 여정이라도 끝은 있는 법.
드디어 지난 11월 수술일을 통보받았다.
종양은 사악해 약물투여가 장기화되면 그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더 이상의 감소를 기대하기보다는 절제해내기 최적의 시기로 판단한 의료진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오랜 기다림 그 끝이 보인다는 것이 이처럼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것이었구나!
내장 외과의 진두지휘 하 산부인과와 콜라보 수술팀이 구성되었고, 이들은 수술 직전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혈관점액종은 연조직 종양으로 부분적으로 주위 조직으로 침습하는 양상을 나타내어 흔히 재발한다.
수술 전 MRI로 종물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를 파악하여 충분한 절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희귀한 종양을 실제 육안으로 확인해본 경험 없이 수집된 논문에 의지해온 의료진들도 이의 특성을 100% 꿰뚫을 수 없는 상황인 데다가 사전 치료 결과가 희망적이었기에 궤도를 변경하자 제안을 건넸다. 나 또한 반년에 걸쳐 고생한 결과, 대안이 있을 수 있는 그 상황이 벅찼다. 초기 시나리오를 고수한다면 재발 리스크는 낮아졌겠으나 재활까지 굵고 긴 고생길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다.
그들의 노선 변경 이유는 설득력 있었다.
아직은 젊은 중년인 만큼, 일상에서의 핸디캡을 최소화시키자는 목표였다. 종양의 자라는 속도가 다행히 느린 만큼, 재발해도 몇 년간 큰 지장 없이 일상이 가능할 것으로 사려되니 꾸준히 지켜보다가 정히 radical 한 수술을 비켜가기 어렵다는 판단이 설 때 그때 가서 초기 시나리오를 적용함이 어떻겠냐는 그들의 제안으로 나는 또다시 그들이 얼마나 내 케이스를 심사숙고하여 결정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술을 며칠 앞두고 나는 비로소 "유레카" 환호성을 질렀다.
인생은 저마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다른 마라톤, 페이스 조절이 중요한 장기전이다.
쉼 없이 앞만 보며 달리지도, 하염없이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지도 말고, 생애 가장 젊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포기해서도, 앞으로 완주해야 할 트랙의 길이를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며, 비록 거북이처럼 느려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당장의 핸디캡을 최소화하자는 집도의들의 제안은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었지...
당장의 완치보다 뒷 일은 후에 도모하자는 쿨한 스웩에 덩달아 의연해졌다.
병원을 드나들며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회색빛 공간 안에서 나는 다른 환자보다 가진 것이 많은 사치스러운 환자였다.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음을 망각한 채 굶주림을 호소하는 부끄러운 모습 버리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한 미래라도 하루하루 배곯지 않아도 되는 풍요에 감사하자고...
길고 막막한 터널 그 끝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이 내 삶을 향해 다가섬을 보았을 때, 입꼬리에 가는 미소가 얹혔다.
두려움이 동반되기에 더 빛을 발하는 삶, 그 자체의 무게를 견뎌내어야 그 인생이 비로소 빛 속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리라.
Don't waste your time worrying. [...] He gives us the strength we need as we need it.
- Trusting God day by day, Joyce Me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