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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May 16. 2021

나는 희귀 질환자

혈관점액종을 아시나요?

나는 희귀 종양 질환자다.

병명은 Angiomyxoma.

우리말로 혈관점액종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는 대부분 성인 여성의 골반이나 회음부에서 발생하는 매우 희귀한 유형의 연조직 종양으로, 점액 양상을 띄며 성장이 더디고, 신체 다른 부분으로 전이되지 않아 양성으로 분류되지만 국소 침윤과 재발이 흔한 특성을 띈다고 한다.

표면 위로 자라는 표재성(Superficial)과 공격성(Aggressive)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내 안에 둥지를 튼 공격성의 경우, 말 그대로 조직 깊숙이 파고들 뿐 아니라, 주변 조직으로 범위를 넓혀 가는 경향을 보여 최선책은 완전절제이나 완전절제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국소 재발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시한부 선고도, 악성도 아니라는데 뭔 수선이래?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병명 앞에서 "What?"이라는 표정과 함께 가이드라인이 없어 당혹함을 나타낸 의사들. 생사의 기로에 선 만큼의 암담함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겠으나 적을 파악해내기가 쉽지 않은 현실, 해결책을 제시할 만한 의료진을 찾기조차 만만치 않은 현실이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위에 기술한 특성들도 나를 만난 후에나 논문으로만 접한 의료진들에게조차 수술을 마치기까지 약 1년의 과정을 거친 실상황을 통해 고구마 전개식으로 하나씩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지의 질환자인 나는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이고, 실험 대상인 셈이었다.




몸에 이상을 감지한 것은 2019년 연말이었다.

우측 회음부에 꽈리만 한 크기의 돌출이 감지되었다. 통증도 없고, 눈에 잘 띄는 부위가 아닌 만큼 시간이 약이려니 방치한 지 두어 달.

수그러들기는커녕, 도려 부피를 키우고 말았다.

통증이 없다고 하찮게 본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제사 부랴 산부인과를 찾았다.

20년 지기 주치의는 초음파 검사를 마친 후, 난소 낭종이 급작스럽게 자란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지만 지난 연말 정기 검진 때 크기를 분명 확인했는데 약 석 달만에 돌출이 가시화될 만큼 자랐다는 것이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장 다음 날 응급 제거술을 받으라 했다.

순간 2주 후로 예정된 휴가에 지장이 미칠까 머뭇거렸던 무지함... 남편의 쉰 생일을 맞아 우리 부부의 최애 여행지인 이탈리아의 북부로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포기할 마음이 한 조각도 없었다.

까짓 거 낭종 제거술 한 두 번도 아닌데 뭐 대수냐 쿨하게 미루겠다고 했다.

정년 퇴직기를 훌쩍 넘긴 주치의는 '무식하면 용감한 거지?'라고 비웃는 듯 경고했다, 이 정도의 돌출 상태로 보아서는 당장이라도 체내 파열 리스크가 있다는 것이다.

골치 아파지는 건 질색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집도할 의사를 찾아가 재검사 및 시술 안내를 받았다.

진단내용은 동일했다.

이미 경험이 있는 난종 제거 시술 앞에서는 무덤덤할 수 있었지만 여행 일정에 지장이 초래될까 초조함을 감출 순 없었다.


마음속 우선순위였던 휴가는 결국 취소됐다.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가 발생했고, 하필 이탈리아 북부가 초기 유럽의 진원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인류의 적과 내 인생에서 마주치게 될 복병이 동시에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음을 직시하지 못했기에 휴가를 포기했다는 애통함이 깊었다.

한국과 북이탈리아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을 통해 심각성을 접해도, 이제껏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 과거형으로 여겼던 팬더믹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이다. 인류가 이룬 발전이 코로나 시국의 장기화를 허용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시기. 그렇게 코로나의 발생 시기와 맞물려 종양과의 전투도 개시됐다.




낭종 제거(라고 믿었던 시술) 후 들려온 소식은 코로나 사태보다 나를 더 심각한 혼돈으로 빠뜨렸다.

정맥 수면 마취 전까지 흡입술이라 했는데 깨고 나니 절개술이 불가피했다는 설명에도 크기가 커서 그랬거니 가볍게 넘겼다. 1주 후 조직검사 결과가 나올 테니 '반드시' 주치의에게 가보라는 멘트는 시술만 한 의사가 해야 할 의무적 조치라 받아들였다.


절제술로 인한 통증이 심해 주치의를 찾던 날,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있어 병리학 전문의의 연락을 기다린다며 평소 같지 않게 우왕좌왕하던 주치의 행동.

대기실은 그 어느 때보다 한가로왔으나 한 여름날 땡볕 아래 녹아 흐르는 엿처럼 대기 시간이 늘어지자 서서히 초조가 스며들었다.

내 마음속의 고요를 시기해 물매 돌을 인정사정없이 던지는 대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두어 시간의 대기 후 드디어 주치의와 마주 앉은 순간. 불길한 예감은 왜 어긋나지 않는 것인지...

주치의 얼굴에 거칠게 벤 당혹스러움과 바삐 흔들리는 눈길 속 예사롭지 않은 소식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어퍼컷을 날리며 후욱 달려들었다.


낭종이 아니란다.

왜 의사들은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힘든 전문 의학용어로 병명을 알려주는 것인지 짜증스러웠다.

반응 없이 멍한 시선만 건넸더니 그제야 종양이란다.

조직을 정밀 검사한 병리학자, 시술의 와 삼자 통화로 파악한 바, 악성은 아니나 매우 희귀한 것이라 이 병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단다. 원체 말 빠르고, 특유의 억양이 있어 매번 놓치는 부분이 없지 않은데 그날따라 그녀의 입술이 열려도 내 귓전까지 미치지 못하고 모든 말들이 튕겨나가는 듯했다.

결론은 '수십 년 의사 경력에 나도 네가 처음이야. 더 이상 내가 널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병명을 통고해놓고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난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느냐?"라고 호소했다.

무엇을 놓친 게 있는지 불안한 눈길로 차트를 뒤적이던 그녀는 이 질환을 다뤄줄 의료진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말로 진료를 마감했다.

아는 것 없이 섣불리 뭘 해줄 수 있다고 희망을 건네는 것이 더 잔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지라도 암담함을 오롯이 나만의 몫으로 넘기는 그녀와 20년 쌓은 정이 삽시간 증발해버리며 서러움으로 돌변했다.




조직검사 결과서 사본을 받아 들고 귀갓길에 올랐다.

보고 또 들여다봐도 뭔 말인지 생소한 의학용어 탓인지, 먹먹한 가슴이 뇌를 올스탑 시켜서 인지 알파벳 한 자 한 자로만 눈에 꽂힌다. 내가 발 디딘 한 뼘 공간에만 일식이 진행되는 듯 앞이 컴컴하고, 가슴은 먹먹함으로 체했다.


그제야 1주 전 시술 후 마취에서 깨었을 때 시술의가 결과에 관해 최대한 말을 절제하는 눈치였으나 주치의가 아니라 선을 넘지 않으려는 조심성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넘긴 순간이 눈 앞에 재현됐다. 육안으로 확인하고, 손수 떼어낸 그 종양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자의 이유 있는 말아낌이었겠구나.

흡입이 아닌 절개의 이유도 단순한 낭종이 아닌 때문이었구나.


서럽게 하늘을 원망하며 밤을 새워 울면 속이 후련해질까?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소식을 조금 뒤늦게 접한 남편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특유의 무표정함으로 무장했지만  표정을 놓치기에 우리가 함께  세월이 너무 길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방황하는 빛이 역력한 남편을 보니, 오히려 스스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오기가 불끈 쥐어졌다.

왜 나를 이 시련의 주인공으로 택하신 것인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알게 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나여야만 하는 이 정해진 운명은 비껴가지 않을 것인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어느 문부터 두드려야 할까?

막연함. 암담함.

삽시간 연탄 빛 먹구름이 머리 위로 촘촘히 들이운다.

하지만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억제하려는 순간 비로소 무언의 절규가 터져버렸다...

"누구 혈관점액종 아시는 분 없나요?"

"하나님 도움의 손길 만나게 도와주세요!"


이제 시작이다.

서둘지 말자.

꺾이지도 말자.




그 날의 기억을 덤덤히 적으며 기록할 수 있는 현재가 나에게 크나큰 하늘의 선물이다. 매 순간은 어려워도 매일 감사하며 살기 위해 노력할 계기를 허락하심에 감사치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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