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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Oct 10. 2018

식혜 이야기

편린 27

최근에  미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물론  서로 공유한 추억이  달랐으므로  내용은 천차만별이었지만  나를 아는 친구들이라면  다 하는 말이 있었다.

네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살이 엄청 빠졌어.”

난데없이  살이 빠지다니,  이게 무슨 소릴까  싶었지만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아니,  그 보다도  최근에 사귄 친구도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나 큰일이야.  체중이 많이 늘었어.  다이어트해야겠어.”

친구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에 미안함이 밀려든다.   그들의 체중 증가는,  그렇다.  내 취미 덕분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요리하는 습관이 있다.  타고난 요리 솜씨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요리하기 전에 나름  연구를 한다.  동영상도 찾아보고  요리 잘 하시는 분들의 노하우도 찾는다.  스트레스 해소하는 과정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좋은 재료를 찾아  마트에 가고  괜찮은  양념을 찾아본다.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완성한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소요되는 작업이지만  결과물을 보면 행복해진다.  내 스트레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은  그다음이다.  친구의 입에 내가 만든 음식이 들어가는 걸 바라보는 순간,   완벽하게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나는 의외로 많이 먹지 않는다.  이건 비밀이지만 요리 하면서  맛도 잘 보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먹을 음식이 아니므로  친구의 입맛을 상상하며 만든다.   이번에도  새로 소설을 시작해야겠다 마음먹고 나서부터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어 고민했다.  저번 주에는  난생처음  밀푀유 나베를 만들어  맛을 보았다.   오늘은  식혜를 만들어 먹을까 싶었다.  식혜는 만드는데 시간만  잘 지키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옛날 같으면  만들기 몹시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고슬고슬한 쌀밥과  엿기름,  적정량의 설탕과  물만 있으면  꽤 맛있는 식혜가 완성된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요리 도구다.  ‘전기밥솥‘ 말이다.  특별한 기능이 없어도 괜찮다.  취사와 보온, 두 가지 기능만 있다면 식혜만드는데  아주 적합하다.  쌀밥이 삭을때까지 같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능만 있으면 된다.

     

밥은 멥쌀로 짓는다.  고슬고슬하게 짓기 위해 밥물은 약간 적게 둔다.  그 밥을 식혀 엿기름물에 섞는다.  보온밥통을  보온에 놓고 양에 따라 몇 시간 동안  엿기름물에 밥을 삭힌다.  나중에  밥알이 삭아 동동 뜨는 걸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삭힌다는 이 과정에 감명받는다.  밥이 더 이상 밥이 아닌 순간을  맞을 때까지  적절한 온도(에너지)와  시간(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식혜가 되지 못하고  쉰 밥으로 변한다. 혀를 감아도는 특별한 식혜 맛이 없는,  쓸모없는 음식 쓰레기로 변하는 순간은  아주 짧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정해진다.  인생의 비밀을 한 겹 벗기고 들여다본 듯한 감회가 밀려든다.  이런 게 바로  요리가  나에게 주는 깨달음이다.   적절하게  삭힌 밥은 엿기름이 들어있는 면포 주머니를 제거하고  냄비에 옮겨 담는다.  식혜를 끓이고  입맛에 맞게 설탕을 첨가한다.  이로써  발효의 과정에서  끓이는 단련의 과정으로 넘어간다.  ‘음식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살균과 가미의 과정을 겪는다.

     

흔히 말하는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 식혜에도  존재한다.  우스개 소리로 마법의 가루가 없다면  식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식혜 만들 때 꼭 필요한 마법의 가루는 바로 엿기름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아무리 잘 지어도,  다른 것을 아무리 잘 섞어도  엿기름이 없으면  식혜가 되지 않는다.  인생에  고난과  슬픔이  배합되지 않는다면  완성될 수 없듯이.

     

식혜가  거의 완성되면  설탕을 첨가한다.  단 것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설탕을 평소보다 더 넣는다.  비염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위해  비염에 좋다는  생강즙을 좀 넣어도 괜찮을까?’  물었더니  친구는  생강을 전혀 먹지 못한다고 털어놓는다.   음식을 나누면  비밀도 공유하게 되는 거였다.  알겠다는 나에게  친구는  그냥 오리지널 식혜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갈아 즙을 내려고  준비해 두었던 생강은  편으로 썰어 생강청으로 만들기로 한다.  음식이란 먹을 사람의  취향과  체질에 따라 변화한다.  재료인 생강이  식혜에 들어갈 것인지  생강청으로 변모할 것인지 결정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한 번 결정되면 되돌리지 못하는 선택의 순간은 계속된다.  나를 채우는 단어들이  어떤 글로 태어날 것인지,  무슨 느낌으로  남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이  아주 짧은 것처럼.  

     

내 안의 단어들도  삭혀 다시 태어난  식혜 속 쌀 밥알처럼  찬란하게 변화해 주었으면, 항상 열망하는 좋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 주기를  식혜 위에 동동 뜨는 밥알을 들여다보며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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