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인 Oct 08. 2018

산책 예찬

편린 26

작년 내내 쓰던 소설을  올해 4월쯤 마치기는 했는데  편집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항상  같은 것이었다.  임팩트 부족한  상황 설정,  감각적이지 않은 내용,  설명적인 내 문체 같은 것들.   게다가  '수위'를 좀 더 높여 주기를 바라는  요구에도  부응하기 어려웠다.    쓰던 소설을  다시 고치고  너덜너덜 기워 쓰다 보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흐지부지 포기한 것이  여름 한 복판이었다.    그때는 간단하게 생각했었다.

'새로 시작하면 되지.'

     

새로 뭔가를 시작하는 데는 아주 익숙해져 있다고  믿었다.   고장 난  기계나  전자 제품은  고쳐 쓰더라도  한 번 틀어진  인간관계나  삶의 궤적을  다시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인연이면  내 곁에 머물 것이고  어차피 안될 인연이라면  내가 무엇을 하던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소설 쓰는 일도  그렇고  사람 사귀는 일도 그랬다.    그러나  거의 다 썼다고 생각했던  소설을  접는 일로  공허감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여름 내내  그러했다.

     

여름  뜨거운 날씨에도  미술관이며   낯선 곳들을  두 발로 걸었다.  전시회마다  들렀고  신기한  것들을  먹어보고  느껴 보았다.   같이  다녀 주었던  친구는  부인했지만  공허감에  힘들어하는 나를  위한  친구의  배려였음을  알고 있다.    운전하다  큰 사고로  놀란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운전’이 큰 부담이다.  달리기도  운동에도  별로  재능이 없지만  두 발로는 잘 걸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름  꽤 많이 걷는데도 불구하고  친구는  더 많이 운동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매주  등산에  자전거 타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친구에게  내가  하는 산책은  집안일 수준일 것이다.  

     

집 현관을 나서면  내가  한국에 있다는 느낌이 확연해진다.  길에는  사람들이 넘치고  산책로에도  거의 항상  운동하러 나온 분들이 계신다.  스쳐가는 자전거도,  킥보드도  친절하고  조심스럽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한 시간을 걷고   돌아오는데  다시 한 시간을 쓴다.   그러는 동안  생각도 정리하고  기분도  추스른다.   얼마 전에 읽은 책 ‘꾸베 씨의 행복여행’에서도  언급되었던  ‘행복은 산속을 걷는 것이다.’ P.50라는 글귀가  있었다.   산책하는 중간중간  ‘생각의 나무’사이를  따라 ‘기억과 추억의 풀숲’을  헤쳐간다.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외롭지 않은 길,  안전한 길을 따라 걷는다.   어느새  등에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올 때는  집 근처에 다다른 걸 깨닫는다.  

     

좋은 생각만 하며 걷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수많은 고민을  짊어지고  걸을 때가 더 많다.   발길에 차이는 생각의  돌멩이를  제대로  치워내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걸으면  기분이 나아진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도  문제를 바라보는 눈은 좀 더 낙관적이 된다.  고민이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돌덩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찮은 인간인 내가  그 숙명에서 벗어날 리 없음도 깨닫는다.   고민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을  원하기보다는   예전보다는 적어지는 순간을  바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안도하면서.  아무  고민 없는 삶은  오히려  독이 아닐까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은 강을 건널 때  큰 돌덩이를 진다고 한다.  이유는 의외의  것이었다.  자신을 쓸어가 버릴지도 모를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거다.  산책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도  짊어진  고민과  고통의 무게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고민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어느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행위를 통해 삶도  밝은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라는,  고민하는 덕분에  위태로운 인생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나를 지탱해 준다.   

     

산책이 끝나는 곳에는  집 근처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 있다.  등에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올 때까지 걷고 난 후  가을 파란 하늘을 머금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는 순간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소확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추석 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