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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Oct 19. 2018

문장가의 편지

조선의 마지막 문장






사이드 테이블로도 쓰이는 작은 서랍장   첫 번째 서랍에는 언제나 글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둔 노트와 펜, 그리고 잠시 글이 안 써질 때 기분전환용으로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이 건창조선의 마지막 문장’.

오늘 읽은 책이다.  책은 무겁고 담담하고 웅장했다.  임오군란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글을 잘 짓고 또 중국의 일에 대하여 박식하다 하니, 짐을 도와달라’는 고종의 부름을 받을 만한 명문장가 이건창이 적은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통찰.

     

이 책은 오늘로  여섯 번째 통독이다.  여러 번 읽었다고 해도  읽을 때마다 느낌이,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  배우는 것들이  달랐다.   처음에는 그의  기교와  특별한 능력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에  감동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꿈에 그리던 따르고 싶은 스승,  위대한 작가의 모습이었다.

     

구한말이라면 참 복잡한 시대라는 이미지가 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시대였으며  조선이라는 유교 사회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려는 외국세력이 밀려들던 시대,  여태까지의 사회 시스템을 이루던 종교와 신념, 인권과  가치관, 세계관이  부서지고 다시 조립되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이 죽고 잡혀가고 짓밟히고 버려지던 시대에  가장 뒤로 밀렸던 가치가 있었을 거다. 문장의 질, 쓰는 법, 책을 읽는 마음가짐 같은 것들 말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피어난 장미 한 송이로 비유할 수 있으려나 싶다.  사막 한가운데서 피어났기 때문에  더 고귀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사막에 피어난 장미처럼 쓸모없는 것도 없다.  아름답기만 해서 뭘 하나,  진한 향기와 고혹적인 매력은 매혹될 생물을 찾지 못하고 쓸쓸히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이건창은 그런 사람이었다.

문장의 가치가 가장 쓸모없던 시대에 위대한 문장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

     

책을 읽는 도중 나는 눈물을 흘렸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유는  감동때문이었다.

     

그의 글 대부분은 통렬한 사회적 비판이었고 죽은 자들에 대한 회한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지인들에게 남기는 미안함과 고마움.  감정은 평소에 나도 모르는 곳에 고여 있다가  어느 정도 빈자리가 생겨야 분출되는 성질이 있다. 곁에 있는 좋은 이들,  이미 갖고 태어난 것들은 사라져야 고마움을 깨닫는 것과 같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소홀했던 모든 것들을 잃었다는 상실감,  상실감에서 오는 후회와 안타까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만큼의 슬픔,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음을 깨닫는 분노의 과정, 어느 정도의 포기가 필요한 받아들임의 과정을 통해 마음이 다치고  부서지고 아파하는 동안 감정은 문장을 낳는다.  아파하지 않으면 좋은 문장을 쓰지 못하듯 위대한 문장가였던 이건창도  아파했고  두려워했고  눈물 흘렸다.

그렇게 아파했던 그의 존재에 감사했다.  감히 그의 삶을 들여다볼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감동했다.  그의 글은 그만큼 깊었고 슬펐다.

     

AI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깊이 절망했었다.  아직 설익은 내 글이 익을 시간도 없이,  제대로 완성되어 빛을 보기도 전에 세상이 바뀌어 버린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다.  아니, 쓸 엄두를 못 냈다.  써봤자... 하는 비관적 생각은 달콤하게 포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포기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더 많은 것들 앞에 노출되고 싶었다.  많은 것들을 마시고 만지고 먹고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있다면 빈한한 내 문장이 나아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무릇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천천히 심구(尋究;  찾아서 밝힘)하고 익숙히 사념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씹어 보고, 깨물어 보고, 삶아 익히기도 하고, 단련하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고, 끌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 글을 억양( 抑揚;  혹은 억누르고 혹은 찬양함) 하고 곡절(曲折; 글의 문맥 등이 단조롭지 않고 변화가 많음) 하며 선회( 旋回 ; 빙빙 돎) 하고 반복해 봄에, 소리가 울려 아름다운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능히 하루에 한 번 고쳐서 일 년에 몇 편을 짓고, 또 몇 편중에 산삭 하여 남겨두는 것이 몇 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10년 동안 하면 진실로 한 권의 책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문장가도  스스로를 다듬고 또 다듬었어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글을 쓸 힘을 얻는다.  다시 컴퓨터를 열고 시놉을 써야겠다  눈물을 닦으며 생각한다.  그의 영혼이 담긴 책을 조심스레 책장에 꽂으며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 비루한 삶을 연료로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을 태우고 싶은 욕망은  이건창과 나의 공통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와 그의 마음이 만났다.  위대한 문장가의 거대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읽어 내렸다.

     

책을 읽는 행복, 묘미는 이런 순간이 닥쳐올 때 느끼는 것.

어떤 책이 어떤 순간을 담고 있는지

아직은 모르며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기에

나는 또 다른 책을 펼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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