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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Jan 11. 2019

1월 11일 2019년

힘겨루기는  이겼습니다

나는 힘겨루기를 좋아한다.    이기고 싶어서 하는 힘겨루기가 아니다.  내 힘을 상대에게 확인시켜주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다.   요즘 내 겨루기 상대는 물론 그다.  커다란 초식동물같은 남자,  순둥순둥한 눈으로 싱긋 잘 웃는 그 말이다.

     

"그런 이론은 정말 말도 안돼."

그의 방 책상 앞에  앉아  내가 말했다.  눈 앞에 놓인 책에 대해 하는 말이었지만  내 눈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다.  겨울 아침인데도  반팔 셔츠만 입은 그는  어디선가  전기 청소기를 들고 나타났다.  약간은 무거워 뵈는  전기청소기를 들어서인지  그의 팔에는 근육이 울퉁불퉁 솟아나 있다.

"?  그렇지?"

그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묻는 나에게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의자에서 일어나서  침대로 올라갈래?   의자 밑에 먼지가 많아."

싫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다.  그가 곧 청소기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청소기는 18세기에 발명된 비행기가 낼 법한 모터소리를 자랑하며  책상 아래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소음을 피해 냉큼 그의 침대 위로 올라 앉았다.  모터 소리덕분에  우리 사이에는 잠시 대화가 끊어진다.  그는 가뜩이나 유연성이 없는데다가 커다란 근육 때문에  다 접히지 않는 관절을   과도하게 굽혀가며 방바닥에 쭈구려 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청소기는 섬세하고  꼼꼼한 흔적을 남기며   책상 아래와  방문 틈같은 곳의 먼지를 빨아들인다.

     

그가  갑자기 청소기를 멈춘다.  침묵이 엄습한 방안에는 어색함이 흐른다.   그는 청소기의 콘센트를 빼고  긴 전선줄을  꼼꼼하게 정리한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입을 열었다.  아까 하려던 말을 이어가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독립적인지,  그러므로  나 혼자서 여행을 다닐 것이며  세상은 생각보다 안전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 쓴 청소기를  옷장 구석에 집어 넣더니  최근에 산 물걸레 청소기를 꺼내온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 나와  물걸레 청소기에 붙여서 사용할  천걸레를  가지고 욕실로 들어간다.  물에 적셔  꼭 짜두기 위해서다.

조금 더 짜와.”

그는 내가 가져온 물걸레를  한 손으로 만져보기만 하고  명령한다.  그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감히 나에게 명령하다니  들고 있던 물걸레를 어디든 집어던져 버릴 뻔 한다.  그러나  그가  물걸레 청소기를 켜기 전에  젖은 걸레로 책상위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돌이켰다.  욕실로 다시 돌아가  물걸레를 양 손으로 꼬옥 짜냈다.  그러고 보니  과도하게 물이 묻어있었던 듯  꽤 많은 물이 빠져 나왔다.

     

그는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부터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걸 보면
나를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두려움을 자극시켜서   어디든 그와 함께 가야 한다고 세뇌라도 시키려는 걸까,  나를 그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싶은 걸까?  역사적으로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남성들에게 의존하던 습관 때문이었어.  아니, 남성들의 소유물이나  물건처럼 다뤄졌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 나는 혼자서 여행하고 싶을때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어떤 것도 그에게 보고해야 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그에게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전화하고 문자를 보냈다.  좋은 책이나 영화,  장소를 발견하면 경쟁하듯  서로에게 알렸다.  내가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나에게 연락하고 싶어할거라고 생각한다.   여행중에는 그와 연락할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가 아무리 실망하더라도  물러서서는 안된다.  지금 한 번 물러서면 계속 물러서게 될지도 모른다.

     

욕실에서 나오며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오늘은 꼭 이 힘겨루기에서 이겨야 겠다.  두어 발자국은 밀어내야겠다.  그가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줘야겠다고.

     

엄청난 다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화를 내거나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지를지도 모른다.  그런 전투를 감내할 만큼 내 독립성은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에야 말로 그에게 각인시키리라.

     

거대한 계획 덕분에 나는 참을성 있게 적당한 시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물걸레 청소기로  방 구석 구석을 다  닦아내고,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아파트 1층까지  내려갔다 다시 돌아왔다.  게다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샤워까지 하고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장한 일이다.  그가 대화 가능한 상태가 될 때까지  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척  시간을 보냈다.

     

내일 떠나면  이틀은 걸릴거야.”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자 나는  마지막 서명이라도 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 혼자서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다시 한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  혼자 떠나는 여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여행 동안에는 인터넷도 꺼둘 것이며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을거라고  다시 설명하려는 데 그가 입을 열었다.

.”

?  뭐라고 했어,  지금?”

.  다녀와.”

     

그는 가벼운 표정으로 말하고  내 옆자리를 차지한다.  있는 힘껏 밀어내려던 나는 저항 없는 그의 품안으로  내 힘에 못이겨 빠져들어가고 말았다.  저항 많은 나를  다룰 줄 아는 이 교활한 지배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아까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보였다.

     

너는 나를 지배할 수 없다고 소리치려던 나는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차라리 나를 지배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지는 걸 애써 누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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