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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Apr 14. 2019

변화는 선택

비밀일기 1

어떻게 보면 오래오래 살아온 것 같은데,  매일 뭔가를 쌓아가고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나는 삶에 대해 잘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열심히 따라 해 본적도 있었고  부러 삐딱하게 살아본 적도 있었다.  남들보다 더 잘한다는 소릴 들어보려  밤새우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해본 적도 있고  내내 하던 일을 그만두기 전  몇 달이나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청소를 했고  먼지와  오래된 물건에 섞어  스트레스도 많이 버렸는데도  배우는  것은 많지 않다.  배웠다고 생각했던 것도 시간이 가면 잊어버리고  잊힌 걸 다시 배우며 짧은 삶을 낭비한다.  



삶을 낭비하지 않으려 책을 읽는데도  배우는 건 역시 무척이나 미미하다.  매일 나는 참 부족하구나 느낀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도  또 다른 아침을 맞을 때면 조금은 달랐으면 기도한다.  별로 다르지 않은 매일을 보내면서 실망하고,  하루하루 낭비하는 것 같아 쓸쓸해진다.  그래도 또 열심히 살아야지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지쳐간다.  열심히 해봐야  뭐가 될 것도 아닌데 싶어져 슬퍼진다.  그 모든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 나를 덮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 같은 경우엔 청소를 한다.  책상 위 정리,  서랍정리,  침대 정리,  옷장 정리....  일단 시작하면 끝이라고 손을 놓기 어려운 게  청소라서  하다가 지쳐버릴 때도 많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어질러졌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따로 어지르는 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집안은 항상 내가 만진 그대로다.  그래서 내가 청소를 했다고 하면 우리 집에 와 봤던 사람은 누구나 "청소할게 뭐 있다고" 청소를 했냐고 묻는다.

그런데도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청소를 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경우는 다양하다.  오늘은 침대 곁에 놓여있던  물건이 눈에 거슬렸다.  그걸 치우고 나서  그 옆에 있던 걸 옮기고,  그러다 보니 옆에 있던 것과 색이 맞지 않아  또 옮기다 보니 아무래도 안되겠다.  청소를 전부 하게 되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 사소하듯  그렇게 시작된 청소는  창밖을 때리는 빗방울이 잦아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 지쳐 점심을 먹고   그냥 쓸쓸해져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는 받지 않았다.   바쁜 걸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그가 전화를 했다.

"미안,  청소하느라  전화 온 걸 몰랐어."

그는 청소하고  지쳐 쉬고 있다고 했다.  항상 깨끗하게 정리해 두고 깔끔을 떨면서도 맨날 청소를 하는 그의 성격은 나와 많이 닮았다.  그 성격을 좋아하지만   지쳐 누워있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청소가 뭐라고  지칠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싶어진다. 특히 설거지하느라 싱크대 앞에 서있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는 이유도 없이 가엾은 기분이 든다.  참... 왜 그런 것인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나는 뭐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묻는다.  밥은 먹었냐고,  잠은 잘 잤느냐고 묻는다.  점심때  집에서  짜장라면을 먹은 것도, 지금 청소로 지쳐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 것도 그와 내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다.    언제나처럼 그는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최근 일어난 일들을  두서없이 떠들고  갑자기 배가 고파 뭔가를 먹어야겠다며  전화를 끊겠지.   전화를 끊으며  나는 혼자 미소 짓고  읽던 책을 마저 읽을 테고  일요일  오후는 아쉽게 흘러가겠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월요일이  무자비하게 쳐들어올 테고  그는 다시 출근과  근무,  퇴근을 견뎌야 할 테고  나는 아침부터 카페로 걸어가는 길에  문득  내가 사랑하는 그가  곁에 있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겠지.




청소를 하는 이유는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변화가 다 즐거운 것은 아니다.   변화란 너무 크거나 심하면 오히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기분 좋은 변화는 흔들림 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고마운 것들이 있어 그 가치를 가진다.   항상 내 곁에 있어주는 고마운 것들.  예를 들면 말없이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이나  묵묵히   매연을 견디는 가로수처럼,  비 오는 날 퇴근길이 고생스러웠다면서 '네가 따뜻한 집에 있어서 기분이 참 좋았다.'라고 말해주는 이가 말없이 전해주는 웃음 같은 것들.   제자리에 있어주는 하늘, 구름이 고마운 걸 배운다.  물론 그 고마움을 자주 까먹고  또 배우고 깨닫게 되겠지만  오늘도 나는 작은 걸 하나 배운다.


뭔가를 변화시키지 않아도 괜찮은 게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의 나도  충분한 게 아닐까,  더 배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나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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