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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Mar 10. 2019

꽃잎은 떨어지는데

노을을 바라보다


"아, 시원하다."

잭은  들고 있던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신음하듯 말했다.  입가에  하얀 맥주 거품이  묻어있었다.

"왜 안 드십니까?  한 모금 시원하게 드세요."

잭의 채근을 받고 나서야  남자는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처음에는 입에 대기만 했는데  곧 한 모금을 쭉 들이켜듯 마신다.

"시원하지요?  역시 목마를 때는 맥주가 최곱니다. "

맥주 한 잔에  잭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죽은 후  한동안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마실 것이 없어 고생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소금이  한 겹 깔린  황무지를 걷는 기분이었어요.  그것도  끝없이  말이오."


한없이 걷다가 목이 마르고  지쳐도  앉을 곳이 없었다,  잠시 쉬어갈  그늘 한곳도 없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스쳐가는 소리가 들려오더라고 했다.   물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루하고도  열다섯 시간을 더 걷고 나서야  나무 한 그루를 찾아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였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   수많은 여성을 만나고  연애로 세월을 보냈지만  사랑했던 그녀는 한 명이었으니까.  그녀의 체취, 목소리,  작고 예쁜 눈빛을 다 가지고 있는 나무 그늘에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그늘은 생각 보다 넓어서  그를 충분히 덮어줄 만큼  든든했다.  땅바닥이었지만  누워있으니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죽음 이후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몇 달은 잤을 거예요.   그곳에서 시간은 별 의미가 없으니까요.  어쨌든."

잭은 중얼댔다.  

"그녀라면...  소설 속에 등장하던...?"

"그녀는 내 여자였습니다.  내게 맞는 영혼을 가진 여자였어요.  아무나 나를 감당하지는 못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아시겠지만 저라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열적이고   어리숙한 데다가  고집만 센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난 사랑을 사랑해.” 그녀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 세상의 모든 피치와 베티와 메릴루와 리타와 커밀과 아이네즈를 가져도 좋다. 이 사람이 내 여자고 내게 맞는 영혼을 가진 여자니까.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잭 케루악, <길 위에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한낮이었다.  아니,  햇빛이 너무 밝아 세상이 분홍으로 변했나 싶었다.  

"꽃이 피어있더군요."

그것도  팝콘처럼  소담하게  작은 꽃 뭉치들이  잔뜩 달려 있었다.  세상  전부가 꽃으로 덮인 것처럼  분홍색으로.  아니었던가.  연보라라고 했어야 하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꽃을 닮은 구석은 없었던 여자.  꽃이라기보다는 당찬 샘물 같던 여자를.  

"일찍 죽었거든요.  저보다 훨씬 빨리.  그때는 다들 그랬어요.  일찍 죽어갔지요.  약이나 술에 취해  길가에서 잠들기도 했고  폭력사태에 연루되기도 했어요.  그녀는  어느 쪽이었느냐 하면  강도에게  죽었지요.  지갑이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기막힌 것은  그 지갑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빈 지갑을 뺏기 위해  강도는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것도  스물한 살짜리  예쁘고 젊은 여자아이를.  

"그때는 잘 몰랐어요.  그녀를 잃는 게 무슨 의미였는지."


잭은  맥주잔 밑바닥에 깔릴 만큼의 맥주만 남기고  나머지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녀가 사라진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없었을 때에도  별문제 없이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삶은  쉽게 살아지지 않았다.  연애를 했고  술과 마약에 빠져들어도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공허와  슬픔이 그의 발목을 쥐고 흔들어대는 기분이었다.   

"그 공허를 극복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어느 날  극단적인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했던 말이 기억나더군요.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트럭을 얻어타고  멕시코 국경 쪽으로  달리고 있던 중이었어요. "

유난히 불안해하던 그녀에게  그가 해주었던 말이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그곳에 도착할 거야."라고.

(앞 좌석에 있는 게  어떤 놈들인지 알아? 걱정하기를 엄청 좋아하는 놈들이야. 거리를 계산하고, 오늘 밤 어디서 잘지 고민하고, 기름값, 날씨, 목적지까지 어떻게 갈지를 생각하지. 그런 생각 안 해도 어차피 도착할 건데 말이야. ―잭 케루악, <길 위에서>)


어차피 도착할 거라는 생각이 없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거였다.  그녀를 잃은 슬픔으로  더 이상 피폐해지는 대신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있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꽃이 가득 피어있던 나무가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꽃은 향기와 함께  땅으로  추락했다.  한 송이와  다른 한 송이,  그다음 한 송이가  그의 머리와  어깨,  손에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처럼 다정하게도.





"그런데 말입니다."

잭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저의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무가 되었든  꽃이 되었든  무엇으로 변했더라도 상관없어요.  저를 기다려 주었을까요?"

"글쎄요.  애써 기다리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만날 것들은 서로 만나게 될 거고  헤어져야 할 이들은 어떻게든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만날 수 있을까,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생각 안 해도  어차피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잭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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