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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May 09. 2019

나는 나야

해야만 해야 하는 것들을 하지 않는 자유



에게는  남자형제가 없다.  

보수적인 집안이어서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아들을 원하셨고  나만 보면

"저 기집애가 고추 하나만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하고 혀를 차셨다.  그 부담감은 고스란히 부모님에게 전해졌고  이어  나에게도 전해졌다.

"아들 필요 없어요."

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나에게는 좀 다른 말씀을 하셨었다.

"넌 다른 남자애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  공부도,  운동도, 인생도 더 잘 살아야 해."

덕분에 나는 숨이 차오를 때까지 공부해야 했고  잠드는 순간까지 나를 반성해야 했다.   왜 너는 그것밖에 못하느냐고.  

좋은 딸이 되어야 하고  남 보기 좋은 남자와 사귀어야 하고,  남들에게 말하기 좋을 만큼 돈을 모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공부 꽤 잘하던 친구가 한 명 갑자기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난 솔직히 그녀가 위대해 보였다.  

그러나 친구의 엄마가 우리 엄마에게  고민 상담을 하고

우리 집에 찾아오셔서 며칠을 눈물로 보내는 동안 우리 엄마는 나에게 그러셨다.

"나는 네가 그런 헛생각을 안 해서 참 고마워."

그런 걸까.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아는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흘겼다.

"옷이 그게 뭐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그렇게 안 입어.  그건 나이 든 사람들이나 입는 거지."

새빨간 털모자에 꽃무늬 블라우스,  7센티 굽의 키높이 운동화를 신은 그녀는 아마도

그녀와 함께 길을 걷기 민망한 내 진심을 모르겠지.  모이면 남자 친구의 연봉과 직업을 비교하는 그녀들이 싫었다.  남들 하니까 골프도 배워야 하고  여행도 가야 한다는 이들이 부담스러웠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부족한 것일까.

남들처럼 입는 것 말고

내가 편해서 입는 것,

남들 먹는 거라 먹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 먹는 것

그거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1년쯤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지치도록 열심히 했던 직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갑자기 그랬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냥 죽고 싶다,  살기 싫다, 살아 뭐하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느 날은 잠을  오래 잤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울증이라고 했다.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슬프지도 않은데,  슬플 일도 없었는데  우울증?  

그런 건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만 걸리는 병이 아닐까?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약도 먹고  운동도 시작했다.

금세 좋아지지는 않았다.  물론.

지난 1년 동안 깊이 앓았다.


나는 왜 살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서.



지금 내 나이에  돈을 벌어야 하고,   

효도도 해야 하고,  남 보기 번듯한 것들을 꽤 가져야 한다는 말들

그 말들을 위해 살아왔던 나를 멈췄다.

내내

남들의 시선을 맞춰주려 살고 있던 나에게

처음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편한 청바지에  셔츠,  카디건을 걸치고

내 눈에 예쁘고 편한 신발,

내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가벼운 가방에 담고

맘 편한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다.

부모님의 눈높이에 상관없이

내 눈에 매우 잘생기고  

내 마음에 무척이나 흡족하고 존경스러운 이를 사랑한다.

내 마음에 충분히 사랑을 표현해 주는 그 남자는

세상에 단 한 명이므로 더 특별한 거라고

매우 행복한 결론을 내린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남들의 시선일까

아니면

내내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 투성이에  싫은 말 못 하는

자신일까.




"사람들은 이제 무언가를 배우거나 알만한 틈을 가지고 있지 않아. 무엇이든 가게에서 만들어져 있는 것만을 사거든. 하지만 친구를 만들어 파는 가게는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를 가질 수 없게 되었어.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야만 해. - 어린 왕자 중에서 "


그러한 이유로 나는 나 자신을 길들이기로 했다.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보기로 한다.


'해야 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 연습.'

간단하지만 어려웠던 첫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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