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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Jul 28. 2019

비 오는 날의 기억

일곱 번째 이야기

요즘 친구와 만나기만 하면 하는 일이 있다.  장마가 깊어지는 밤에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말없이 하는 그것.  '루미큐브'다.  1에서 13까지 네 가지 색깔( 빨강, 주황, 파랑, 검정)의 타일 2세트와 조커 타일 2개,  총 106개의 타일을 이용해 하는 게임으로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는  루미큐브를 '가장 많이 팔린 현대 보드게임'이라고도 했다.   106개의 타일 중 랜덤으로 고른 열네 개를  데크에  얹고 자신의 패를 붙이거나 버리기를 반복해 손을 다 비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고스톱이나  포커도  할 줄 모른다.  보드게임을 할 시간도 여유도 없이 살았는데  요즘 시간이 있고  함께 즐길 친구가 있으니  배우게 되었고  푹 빠져들게 된 것이다.


친구와 나  둘만 하는 게임이지만  매번 승부가 난다.  처음에는 월등한 실력 차이 때문에 친구가 크게 이겼다.  친구의 현란한 기술을 구경하며 놀라고  감탄하다가  나도 기술이 늘어감에 따라 가물에 콩 나듯 한 번씩 이기는 경우도 생겼다. 규칙이 복잡하지 않으니 실력이 빨리 늘어서 요즘에는 승률이 거의 비슷해졌다.  상대가  아무리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라고 해도  게임을 해서 이기면 기분이 좋다.  지면 승부욕이 더 자극되기도 한다.  친구의 승부욕도 만만치 않아서 승부가 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게임이 계속될 때도 있다.  



이 게임에서 아주 특별한 기능을 하는 것은 '조커' 타일이다.  숫자 타일을 일정한 규칙대로 배열해야 내려놓을 수 있는데,  만약 타일 하나가 부족해서 배열이 불가능할 때는 조커를 부족한 타일 대신 사용할 수 있다.  상대가 내놓은 조커를 대신할 패를 내놓을 수 있다면  그 조커를 내가 사용할 수도 있다.  게임 초보일 때는 조커의 절대적 능력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조커가 내 손 안으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 일도 있었다.   경험상  조커가 손에 들어오면  그 게임을 이기는 경우가 많다.  힘겨운 삶에 불쑥 끼어드는 '행운'처럼  루미큐브 게임에서는 조커는  승리를 가져오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한다.    단순한 숫자 배열 연습게임으로 끝났을 루미큐브가  조커의 등장으로  드라마틱한 게임으로 거듭난다.   언제 불쑥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조커 덕분에  게임은 완전히 끝이 날 때까지는  그  승패를 예측하기 어렵다.   하면 할수록 이 게임은 인생의 축소판 같다.   일정한 규칙만 따라 가면 그럭저럭 풀리는 것도,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상대가 가진 조커 하나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데 게임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의외의 결과도 생겼다.  딱히 조커가 내 손안에 없더라도  승리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친구가 조커 2개를 다 가졌을 때에도  내가 이긴 일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커가 손에 있다는 안도감으로  느긋하게 게임을 하다 보니 조커를 사용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행운을 손에 쥐고 있으면 뭘 하나.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면 조커에 덜 연연하게 된다.  대신 필요한 조건들을 깨닫게 된다.  매번 내  순서가 되었을 때  가장 적절한 패를 내기 위해서는  데크 위 타일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조커를 사용할 적절한 타이밍을 붙잡아야 하고  조커가 없어도 끝까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를.


장마가 깊어지는 밤이면 나는 친구와 마주 앉아 루미큐브를 한다.  루미큐브를 하며 인생을 다시 배운다.   가끔은 양 손을 활짝 열고  내 손안에 쥐고 있던 것들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은데  손안에  '행운'이라는 이름의 조커가 숨어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  행운이 손에 있다면  잊지 말고 사용해야겠다는,  행운이.손에 없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들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조커 하나면 들고 있던 타일을 전부 내려놓고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좋은 작품을 한방에  쓸 수 있는 행운이 깃들어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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