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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Jul 08. 2019

한여름의 기억

다섯 번째 이야기

친구는 에너지 그 자체라면  나는 생각 덩어리다.  친구는 햄버거와  피자,  파스타를 좋아하고  나는 한식을 즐긴다.  친구는 힙합을 즐기고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을 무척 싫어하는 친구에 비해  나는 비 오는 날을  아주 좋아해서  비 오는 날이면 창문을 통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아, 그렇지.  나는 커피만 마시고  친구는 커피는 마시지 못한다.   친구가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면  나는 유럽이나  영미 소설을 더 자주 읽는 편이다.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지만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우리는 운전하는 것보다  두 발로 걷는 여행을 좋아하고,  종류에 상관없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  재즈와  록음악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한다.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운 이유는 많지만  같은 일을 놓고도 서로의 관점과  해석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 좋다.  세상을 보는 눈이 두 개 더 생긴 기분이랄까.  


한동안 쓸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알고 있던 친구가  여름휴가로  이틀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부여 가본 적 있어?"

"아니."

 얼마 전 뵈었던 출판사 관련자께서  '부여'나 '공주'에 가보는 게 어떠냐고,  글 쓰는데 도움이 많이 될 거라는 조언을 해주셨던 일이 있어서  귀가 번쩍 뜨였다.  같이 갈래?  묻는 친구에게 고맙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궁남지 연꽃 축제'를  카메라에 담겠다고 했고  나는 연꽃과  향을  가슴에 담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짧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부여까지 달렸다.  책을 좀 읽고  깜박 졸다 보니  도착했다.  낯선 곳이라  네이버 지도에 의존해 걷는다.  서울보다는 훨씬 한가한 거리에  '연꽃' 무늬가  많이 눈에 띈다.  '연잎쌈밥'이  향토 음식이고  '연꽃 빵'을 특산물로  판매하고 있다.   타고난 길치가  여행 가면 그렇듯  한 눈으로는 주위를 구경하고  다른 눈으로는 친구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간다.   '연꽃 축제'로  궁남지가 북적이고  사람들이 몰려다닌다.  나는 사람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라  두리번거리며 구경에 정신이 없는데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친구는  평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표정을 지으면서.


 사비성 옛터에서  낙화암까지  걸어 오른다. 나 당 연합군이  뒤에서 쫓아올 때  궁녀들이  도망쳤을  그 길에는  막걸리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가  세 곳,  나란히 열려있고  나이 지긋한 여사장님이 지나가는  손님을 부른다.   그 한편에서는  마이크와  스피커까지 동원된  노래 공연이 한창이다.   조용하던 산 길에  노랫소리가 퍼져나간다.  살아있는 이들은  이상  흔적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비성에 낙화암까지  가파르게 도망쳤던 궁녀들을 기억하는 대신  관광객들은  마이크를 잡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한다.  산길에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막걸리를 마시거나  셀카 찍느라 바쁘다.  부소사에서  낙화암까지 가는 산길도 관광객으로 붐빈다.  가는 길이 좁아  줄을 서서 올라가야 할 형편이다.  산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으러 간  '연잎쌈밥'을 파는 식당 앞에는 대기줄이  길가까지 늘어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역사 도시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를 태우고 가던 택시 기사님 말씀으로는 '연꽃 축제 기간'이라 관광객이 많은 것이란다.  "연꽃 피는 여름 한철에만  북적인답니다.  평소에는 한가하지요."라고  그분은 덧붙이셨다. 


기사님 말씀이 맞았다.  축제가 열리는 궁남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는 매우 한산하다.   더운 날씨 탓인지  길도 텅텅 비어있다.  길을 걷다 보면 만나는 것은 사람들 대신  유적지 팻말들이다.  '부여'는  백제시대에 '사비성'으로 수도였던 탓에  남아있는 성터와  무덤, 셀 수 없는 유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라진 나라의 흔적이  강이 되어 살아있는 이들 곁을 흐르는 느낌이다.   고즈넉한  사찰의 독경소리가   배경음악이라면  구름마저 말려버린  새파란 하늘이  배경색이다.  우리는 뜨거운 태양을 요령껏 피해 가며  고즈넉한 거리를 걸었다.  산길을 돌아  사찰에 들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만나고 그 뒤에 위엄 있게 앉아있는 거대한 불상을  만났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한적한 공간에는  쏟아지는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5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불상은 화재로 얼굴이 파괴되어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한 번은 만났던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 든다.   돌탑을 쌓고  무덤을 만든 사람들이  아직 서성이는 곳을 벗어나면  자동차가 달리는 번화가가 등장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5세기 백제, 사비성에서  2019년 대한민국의 부여로 시간과 공간을 함께 뛰어넘은 기분이다.   너무도 더워 걷다가 쉬다를 반복했던 이틀은 꿈처럼 사라졌다.  

잊힌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고구려만큼이나 강했지만  나당 연합군에게 패한 패전국이었으므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므로  지워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고즈넉하고  어딘지 쓸쓸한 도시는  '예전에는 그랬었지' 하는 얼굴로  태연히 노을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하나도 슬프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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