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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Oct 07. 2019

인질의 기억

열세 번째 이야기


김 현직 과장님은 보십시오.


     


지금 이 시간이면  당신은  우리의 인질이  회사에 무단결근한 것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김 과장님과  오른쪽으로 대각선 끝자리가  비어있을 테니까요.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신입 직원  ‘한 은정’씨는  지금 우리 조직 손에 들어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김 과장님이 본인의 책상에 앉아  이름만 부르면 커피와 물을 갖다 주던  신입사원이  우리 조직에 납치되었다는 뜻입니다.  후후,  이제야  놀라는군요.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멀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조직이 한은정 씨를 납치한 것은 오늘 아침  출근길  9호선 지하철  안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인질을 납치했는지 궁금하시겠지만  그것은 우리 조직의 일급비밀이므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단서를 알려드리자면  그녀가 듣고 있던 음악에  우리가 뭔 짓을 했다 정도만 알고 있으세요.  어떤 소리를 들으면  귓구멍이 쓰리고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프게 됩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고  현기증이나  소화불량을  호소하게 되는 겁니다.  그 파장이 비슷한 소리를 찾아보면  김 과장님이나  이 부장님 목소리가 비슷하겠습니다.  우리는  한은정 씨가 듣고 있던 음악의 주파수를 조작해  스트레스 지수를 계속 올려 주었습니다.  인질이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까지 해서  인질을 납치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TTT는  급진주의 단체로   한은정 씨를 납치한 것은  김 과장님이 몸담고 있는 M 회사 업무를 마비시키려는 의도였음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한은정 씨가  우리 조직의 타깃이 된 이유는  비록 입사한 지 겨우  6개월밖에 안된  신입 사원이지만  회사 운영상 아주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 년 동안의 조사 결과  김 과장님을  비롯한  여덟 명 부서 직원들은  매일 아침 커피를 마셔야  업무 시작이 가능함이  밝혀졌습니다.  이제야  감을 잡은 모양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매일 아침  직원들 명수대로 커피를 타 나르는 인물,  바로 한은정 씨였던 겁니다.   한은정 씨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책상 위를 닦아 놓는 행위를 통해  직원들의  호흡기 질환을 예방해 왔습니다.  사무실에 놓인 9대 컴퓨터를  이틀에 한 번 꼴로 닦고  책상 위를 정리하는 것도  그녀였습니다.  자잘한 복사,  회사에 걸려온  전화에 일일이 응대하는 것도,  점심식사 메뉴를  모아  근처 식당에 주문하는 것도,  회식 자리가 끝나면  김 과장님  차를 대신 운전해서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바로 한은정 씨였다는 말입니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에  한은정 씨는  입사한 후 처음으로  반차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날 김 과장님이  인질에게 심각할 정도로  눈치를 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신입 사원 한 명이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 휴가 한 번 낸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을까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그 이유를 우리는 한은정 씨가 일찍 퇴근한  오후에 알게 된 것입니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잔업무로  회사 업무는 거의 마비 상태였지요.  김 과장님은 이런 사태를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겁니다.  한은정 씨가  사무실의 핵심 인력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인질이 겨우 4시간 비운 회사가 이렇게 타격을 받는다면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인질이 없는 회사는 마비 그 이상의 상황이 일어날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화면을 보면 알겠지만  한은정 씨는  우리가  데리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건강한 상태지만  만약 협상이 결렬된다면  인질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요구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50억 원 :  한국 돈 오만 원권 신권으로  묶어 종이가방에  담아  가져오십시오.  장소와 시간은 추후  알리겠습니다.  인질의 회사 공헌도를 고려해 볼때  50억원은 결코 과한 액수가 아닙니다.  

경찰에  알리면  인질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인질을 되찾고 싶다면  우리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직은 김 과장님과 회사 전체가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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