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해서 그동안 몇몇 나라를 다녀왔다. 주로 캐나다와 유럽에 있는 나라들로 매번 부모님과 함께 가다 보니 패키지여행을 이용했다. 패키지여행을 가면 몸은 참 편안하다. 고급 호텔에서 지내고 유명한 여행지를 다니며 가이드 분의 설명을 듣고 시간이 나면 쇼핑을 하면 된다. 여행 일정이 이미 짜여 있으니 어디를 가는지 모르고 가이드만 따라다녀도 된다. 유명한 관광지를 골라 보기 때문에 길 위에서 시간 낭비가 적다는, 다시 말해 실패할 위험이 적다는 이점이 있다. 호텔음식은 질이 보장되어 있으니 편안하고 안락하게 즐기기만 할 것이라면 패키지여행이 제격이다. 그러나 배낭여행은 여러모로 유동적이다. 솔직히 배낭여행을 간 것도, 지칠 때까지 골목 구석구석을 누빈 것도 나로서는 처음 이었다.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난감했다. 계획을 세운다 쳐도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식사도 가끔은 '아무것이나 아무 때나' 먹게 될 수 있다. 망설이던 나에 비해 친구는 들떠 있었다. 심지어
"배낭여행의 진수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스릴에 있다."
고 했다. 여행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순간을 해결해 가는 즐거움을 누려보자고 덧붙였다. 솔직히 나는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길을 잃지 않을까, 생각하지 못한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러나 평소 믿음직하던 친구의 설득에 점점 안심이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친구의 말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은 적이 많았지만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 가는 재미도 있었다. 덕분에 여행을 마칠 때쯤에는 내가 몇 뼘이나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맞는 또 다른 아침, 날씨도 맑고 미세먼지도 없다는 청명한 날이 시작되었다. 사흘째 숙소에서 나와 마카오 시내를 향해 걷다 보니 골목골목이 익숙해진 듯하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L은 오전에는 '기아 요새'를 보러 가고 타이판으로 이동해서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저녁에는 어제 들렀던 '더 하우스 오브 댄싱 워터 (The House of Dancing Water)' 공연을 볼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공연을 볼 거라는 말에 전날 입었던 반바지 말고 반팔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첫 목표 지점인 기아 요새(Fortaleza da Guia, Guia Fortress)는 마카오에서 제일 높은 기아 언덕에 있다(94m). 마카오 반도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중요한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아 산은 금산, 송산으로도 부르는데, 기아(Guia, 안내)라는 이름은 예전에 포르투갈 선박들이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될 위기에 있었는데, 산 정상에서 비추는 빛을 보고 무사히 항구로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살아남은 선원들이 이는 성모의 은총이라 생각하고 빛이 나온 산 언덕에 작은 성당(Capela de Nossa Senhora da Guia)을 짓고 기아 성모께 봉헌하였다고 한다.
L이 어제 무리하게 많이 걸었으니 오늘만큼은 편히 올라가자기에 기아 요새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그런데 막상 케이블카 타는 곳에 가보니 오늘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라 쉰다는 것. 하는 수 없이 길을 따라 걸어 오르기로 했다. 94미터의 산이지만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오르는 길에 땀이 날 수도 있다.
공원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운동하고 계신 어르신들이 보인다. 내가 사진을 찍었더니 아까 보다 더 멋지게 포즈를 취해주셨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기아 요새에 닿았다.
기아 등대는 1865년 중국 해안에 세워진 최초의 등대라고 한다. 마카오의 위치인 북위 22도, 동경 133도는 이 등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마카오가 섬이었던 시절, 이 등대는 거친 바다로 떠났던 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길을 밝혀주는 등불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카오 섬 주민들에게는 날씨예보를 해주었던 모양이었다. 한국에 여름마다 태풍이 다가오듯 마카오에서도 사이클론으로 피해를 본다. 사이클론과 태풍, 허리케인은 이름만 다른 열대성 저기압이다 발생 해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인데 필리핀 근해에서 발생하는 것을 한국에서 쓰이는 '태풍(Typhoon)'이라 하며, 북대서양 카리브해 멕시코만 북태평양 동부에서 발생하는 것은 '허리케인(Hurricane)', 인도양 아라비아 해 뱅골만 등에서 생기는 것은 '사이클론(Cyclone)'이다. 등대에 들어서자 작은 방 안에 사이클론 발생 시 경고를 위해 사용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이클론이 발생하면 강도나 방향 같은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반대쪽 벽면에 사용법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도구들이라고 한다.
기아 요새에서 내려와 택시를 탔다. 금세 타이판에 도착했다. L의 설명으로는 타이판에 맛집이 많다더니 과연 수많은 음식점이 우리를 맞았다. 마카오식 음식점뿐 아니라 포르투갈식 레스토랑과 일식 요릿집도 즐비하다. 우리는 포르투갈 음식점을 골라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입구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미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맛집인가 보다 기대하며 우리도 줄을 섰다. 잠시 후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하려는데 메뉴판에 사진이 없다. 한문 아래 영어로 음식에 대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완벽주의자인 L이 1층에 내려가 사진이 있는 메뉴판을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온다. 그제야 머리를 맞대고 음식을 주문했다.
쇠고기 스테이크와 해산물 스파게티, 대구 스테이크, 마늘빵에 커피까지. 이것저것 시켜 먹어보기로 했는데 나에게는 역시 스테이크와 함께 주는 담백한 빵이 제일 맛있었다.
마카오에 도착하기 전에는 이곳이 어떤 곳일까 궁금했었다. 카지노의 천국, 포르투갈 냄새나는 중국의 도시, 세계문화유산이 산재한 역사의 도시, 등등 소문이 많으니 상상할 것도 많았다. 그리고 직접 만난 마카오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순수하게 두꺼운 역사로 무장한 관광 도시였다. 관광객에 익숙한 시민들이 능숙하게 관광객을 맞아들이는, 눈만 돌리면 미녀들로 넘쳐나는, 가족단위 관광객이 삼삼오오 모여 웃음 짓는 도시.
무엇보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날씨가 부러웠던 낯설지만 독특한 매력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