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민속촌으로 돌아가야 할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바람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편백나무 향에 섞여 비릿한 피 냄새가 실려왔다.
“비켜라!”
날아오다 시피 나를 향해 돌진한 형상이 낮게 소리쳤다. 얼결에 몸을 피했다. 그의 품 속에 번쩍 하며 칼이 빛났다. 바닥에 깔린 낙엽이 그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휙 하고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저승에서 무기를 들고 날아다니는 영혼은 처음 본다. 나도 모르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남자는 빨간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뚫린 눈구멍 뒤에 기분 나쁜 눈빛이 뿜어져 나왔다. 주위를 샅샅이 훑어가던 시선이 멈췄다. 가면 뒤에서 그가 분명히 웃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표범이 사냥감을 찾은 표정일 게 틀림없다. 내 짐작에 대답하듯 그의 손에서 검은 덩어리가 날아올랐다. 그것을 따라 가느다란 쇠사슬이 쭉 뻗었다. 목표물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상당히 긴 쇠사슬 끝에 달린 쇳덩어리가 목표를 정확히 가격했다.
“악!”
짧지만 분명히 들렸다. 여자의 비명소리다. 봄바람을 견디지 못해 떨어지는 꽃처럼 여자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했다. 헝겊 인형처럼 바닥에 엎드린 여자를 향해 남자가 달려가더니 발로 여자를 걷어찼다. 여자가 저 만치 날아갔다. 낙엽이 켜켜이 쌓인 바닥에 여자가 푹 처박혔다. 기절한 듯 비명도 없다. 바닥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다. 남자는 뭔가를 찾는 짐승처럼 여자의 옷섶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 눈이 여자를 향했다. 순간 입을 떡 벌렸다.
“월하향! 설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버리고 말았다. 도깨비 가면이 바쁜 손을 멈춘 것이 그때였다. 다음 순간 나는 허공에 붕 떴다. 놈이 던진 쇳덩이에 내 가슴이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나는 10 미터 이상 날아갔다. 놈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나는 사정없는 발길질에 채여 한 바퀴를 데굴 굴렀다.
“넌 뭐냐?”
남자가 물었다.
“이 야비한 놈아. 약한 여자나 공격하는 영패 도둑놈! 창피한 줄 알아.”
“솜털도 안 벗겨진 애송이 놈이 입만 살았구나.”
악다구니 쓰는 나를 향해 남자도 대꾸했지만 이내 등을 보이고 돌아서 버린다. 나 같은 초짜는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 거만한 태도였다.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 멀어지는 그의 뒷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비참한 분노가 들끓었다. 순간 내 손에 차가운 쇳덩어리가 닿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나를 향해 던졌던 쇳덩어리를 이번에는 내 손에 쥐었다.
“이 나쁜 자식아!”
기합 대신으로 소리를 빽 지르고 그를 향해 쇳덩어리를 던졌다. 슉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르는 쇳덩어리에는 가늘고 긴 사슬이 달려있다. 사슬이 차륵 하며 풀리고 남자가 헉 하며 고통의 신음을 지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나는 싸움을 해 본 적이 없다. 제대로 격투기를 배워본 일도, 무기를 써 본 적도 없다. 놈이 제 몸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슬추도 실제로는 처음 본다. 어떻게 하면 잘 던지는지, 목표에 정확히 맞추는 지는 알지 못한다. 쇳덩이가 적당히 빗맞았다면 그놈에게 타격을 주는 대신 화만 돋궜을 게 틀림없다.
‘이제는 죽나보다.’
나는 누워있는 채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가롭게 푸른, 태연히 맑은 하늘.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놈이 다시 달려와 나를 흠씬 두들겨 패기 전에 하늘이나 싫건 보자. 오늘 같은 날, 하늘이 너무 맑은 거 아닌가? 젠장.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박 진한, 정신 차려라.”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다정한, 듣고 싶던 목소리다. 눈을 번쩍 떴다. 내 얼굴을 근심스러운 얼굴로 들여 다 보고 있는 월하향을 발견했다. 믿어지지 않는다. 꿈 속인가 싶어 눈을 다시 감았다.
“정신이 드니?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간절한 목소리로 월하향이 물었다. 이번에는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그녀를 들여다 보았다. 꿈인지 확인하는 거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렇게 죽는 건가?”
눈물이 울컥 나오려 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이미 죽었으니 또 죽지 않는다. 이렇게 쉬고 있으면 몸이 회복될 것이야. 내가 함께 있어주마. 힘을 내거라.”
월하향이 어린 아이를 안 듯 나를 일으켰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지만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이렇게 다쳤을 때 가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있어.”
월하향의 부드러운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나도 그녀를 흉내내 듯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 마신다. 그리고 내 쉰다. 따뜻한 그녀의 가슴에 안겼다. 우리는 구름이 되었다.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태양빛을 향해 달려갔다. 까무룩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면 노을 지는 것을 볼 수 있어.”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본 월하향이 말했다. 돌아누울 수 없을 만큼 작은 방 안이었다. 서쪽으로 난 창문이 바람 때문에 덜그럭거린다. 오래된 한옥을 본떠 최근에 지은 건물인 모양이었다. 창문은 고풍스러운데 반해 거기 달린 고리는 지나치게 새것이다. 어울리지 않는다. 엉망 진창이다. 비틀린 비명처럼 분노가 다시 끓어오른다. 저승이라는 곳, 질서도 법도 없었다. 대 낮에 무기를 든 놈들이 설치고 약한 여성이 몰매를 맞아도 도와주는 이가 없는 무법천지라니.
“몸은 어떠냐? 다친 곳은 나아졌니?”
월하향의 질문에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놀랍게도 아무렇지도 않다. 몸에생겼던 폭력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마음 속 부글대는 분노는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몸은 나아졌는데 생각할수록 열 받아. 도깨비 가면을 쓴 잔인한 놈에게 이유도 모른 채 마구 두들겨 맞았는데도 신고할 경찰도, 도와주는 영혼도 없다는 게.
내가 맞은 것은 둘째 치고, 그 놈이 월하향을 사냥하듯 공격하던 꼴을 생각하니 다시 증오가 치민다.
“도와주는 영혼이 없다니? 우리를 공격했던 사슬추가 저승사자에게 잡혀 소멸되는 꼴을 보고도 그러느냐?”
“정말이냐? 언제 그랬어?”
“그래, 사슬추가 당하는 꼴을 보니 어찌나 후련하던지. 아마 네가 기절했을때그랬던 모양이다. 정말 장관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지 못해 아쉽겠구나. ”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한 월하향은 그제서야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친절한 미소다. 순간 기분이 좋아졌지만 미소로 대답하는 대신 마음에 없이 퉁명스러운 질문을 해버렸다.
“아까 그곳에는 왜 왔던 거야? 깊은 산속에 혼자 다니니까 그런 놈에게 봉변을 당하는 거 아니냐.”
내 말에 월하향은 뭔가 기억해 낸 표정을 지었다.
“내 정신좀 봐, 네 어머니 소식을 알려주러 온 것인데 깜박 했구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오는 결계에서 네 어머니와 마주친 영혼을 찾아냈어. 결계까지 오신건 확실한데 저승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안계시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직 결계에 계신 것 같다.”
“내가 모시러 가면 되겠다. 결계가 어디냐?”
금방이라도 떠나려는 나를 월하향이 막았다.
“그러고 싶겠지만 어려울 게야. 결계에 갈 수 있는 것은 저승사자들 밖에 없으니. 네 어머니가 운좋게 저승사자의 눈에 띄어 저승으로 올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월하향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승사자는 주로 어떤 영혼들이 되는 거야?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건가?”
“저승사자는 저승에 있는 직업 중에도 가장 되기 힘든 것 중 하나야. 승진을 계속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될 수 있겠지만 일이 힘들어 부담감도 크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냐?”
나는 대답대신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이 이야기를 해주려고 아까 그곳으로 온거야?”
“오늘 네가 승진하게 되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무심한듯 대답한 월하향은 말끝을 흐렸다. 가슴이 먹먹하게 미안했다. 월하향이 사슬추에게 당한 봉변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었기 때문이다.
“노을 지는 걸 보니 퇴근도장을 찍을 때가 다 된 모양이다.”
월하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창문으로 비쳐 드는 노을 탓인지 그녀의 옆 얼굴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도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제 그랬냐 싶게 멀쩡해진 몸이 평소보다 가볍다.
“창문으로 내다보니까 정말 노을이 기막히게 잘 보이는 걸. 월하향! 네 말이 맞았어. 그래서 말인데 나는 앞으로 계속 승진해서 저승사자가 되어볼까 해.”
월하향을 향해 소리쳤지만 그녀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어물거리다가 퇴근 시간에 늦으면 곤란하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월하향을 뒤따라 민속촌으로 향한다. 오랜만이었다. 나도 모르게 씩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