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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Nov 14. 2020

그림자 세상

12화





그날 우리 부서원들은 모두 솔로 탈출에 성공했다.  덩치 말로는 우리 부서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엄청난 성과 덕분에 상부에서 큰 결정이 내려왔다.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있는데 뭐부터 들을 거냐?  새신랑 된 기념으로 박진한이 대답해 봐라.”

“좋은 뉴스부터 듣겠습니다.”

내 대답에 덩치는 흠흠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승진할 때 보통 영패 열 개씩 받는 법이지만 이번에는 특별 보너스로 열 두 개씩 주신다고 한다. 특히 앨런은 그 공이 인정되어 열 다섯 개를 받게 되었다.  모두 축하해 주도록!  물론 네놈들 손에 들어올 것은 기본 세금 여섯 개씩을 빼고 난 나머지가 될 것이지만 말이다.”

덩치의 말에 모두가 웅성거린다.  앨런이 긴 팔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이럴때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다.

“기본 세금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도통 이해가 안 됩니다.”

“ 너희들 그동안 먹고 돌아다닌 데 쓴 비용은  공짜인 줄 알아?”

“죽어라  일해서 승진해도 영패 열 개를 겨우 받는데   매달  세금으로 여섯 개씩이나 가져가면 우리 같은 영혼들은  어느 세월에  영패 스물 다섯개를 모아 환생하겠습니까?”


앨런이 조목조목 따지자 덩치는 말문이 막힌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희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도 살아있을 적에는 세금 내기 버거워 지리산에 들어가 산적이 되었지.  그땐 얼른 죽어서 이 지긋지긋한 세금 안 내면 소원이 없겠다 했는데 저승에 와 보니 세금을 또 내라는 거야.  그때는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그게 누구라도 저승에 온 이상은 지켜야 하는 법칙이니까 말이다.”

덩치의 말을 듣고 만 있던 월하향이 입을 연 것은 그때 였다.

“앨런, 세금으로 내는 영패 여섯개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느냐?”

조용하고 나긋한 음성이 울리자 순간 모두가 숨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일터에서는 언제나 짧은 대답만 하던 그녀였다. 이렇게 조근 조근 질문한 것은 처음이다.  앨런도 순간 당황한 듯 움찔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희들은 승진하지 못하면 소멸됩니다.  영혼을 걸고 승진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저희들에게 한 번 승진에 대한 보상이 너무 작다고 느껴집니다.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금을 줄여 주시던가 보상을 올려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앨런이 대답하자 월하향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한동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은 의견이구나.  내 윗 분께 말씀은 드려 보겠다.  허나, 저승의 법칙을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법.  이번에 네 의견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것 없다.  후에 열심히 승진해서 저승의 법을 고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간다면 네가 말 했던 대로 저승의 법칙을 바꾸도록 해라.  저승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나에게 했 듯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을 마친 그녀가 빛나는 눈빛으로 우리를 한 번 둘러본 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을 때,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부서원들 모두가 여태껏 독버섯, 투구꽃으로 불러가며 두려워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황홀한 표정으로 월하향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순간 앨런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인다.

“정신차려.  오늘 결혼한 새신랑 주제에 선임님을 그렇게 정신 놓고 보다니 새신부 제수씨한테 미안하지도 않으냐?  턱 빠지겠다. 침이나 좀 닦고 봐라.”

“내가?  에이, 그럴 리가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턱을 손으로 문질러 혹시라도 침을 흘렸는지 확인했다.   앨런은 그런 나를 보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 진 것을 본  덩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나쁜 소식이 뭔지도 알려주마. 총각귀신 부서가 오늘 부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동안에도 총각귀신 부서가 시대에 덜 떨어진 곳이라는 등, 여러가지 의견으로 문제가 있었는데 때마침 사원들이 모두 승진하게 되었으니 이번참에 부서를 아예 없애자고 결정된 모양이다.  그래서 나와 월하향님을 포함한 우리 부서원들은 모두 함께 박물관 부서로 승진하게 되었다. 박물관 부서에는 식당 뿐 아니라 기숙사도 함께 딸려 있으니 출근시간에 늦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숙사는 수 백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이었다.  모두가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는데 각 방안에는 침대와   책상과 의자가, 벽에는 세면대가 하나씩 있다. 크기는 작아도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기숙사 배정을 받자 마자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은 침대에 들러붙을 만큼 지쳐 있었지만 머리는 자꾸 맑아져만 온다.  뒤척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닫힌 유리창 밖에서 비쳐 드는 달빛으로 기숙사 방 안은 환하다. 하품할 기력도 없이 눈만 끔벅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진한, 나야.  앨런.  들어가도 돼?”

들어오라고 대답하자 문이 빠끔히 열린다.  앨런이 고개를 디밀며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네가 여기 웬 일이야?  모두 승진 기념 파티에 간 줄 알았는데.”

“파티는 별로 안 좋아해서 퇴근하자 마자 기숙사에 와서 일찍 잠들었더니 지금 깨어 버렸어.”

앨런은 침대 옆 의자에 앉더니 불쑥 물었다.

“독버섯, 투구꽃이란 별명, 월하향이 쏜 장풍에 죽은 영혼이 팔백명이라는 둥, 후임들을 물건 취급하고 쓸모 없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린다는 말. 아니면 오늘 우리에게 보여줬던 카리스마 넘치고 자애로운 선임.  이들 중 뭐가 월하향의 진짜 모습일까?”

“내 생각에는 월하향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가 오해했던 게 아닐까? 소문은 많았지만  실제로 월하향이 저지른 일은 못 봤으니까 말이다.”

앨런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한, 나는 월하향이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  덩치 큰 아저씨 다리에  장풍을 마구 날리고 있을때  그날 그녀는   오늘 월하향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어.”

그의 말에 나도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 동생 정한을 따라 카페에 갔을 때 월하향이 어떤 남자를 공격하던 검고 텅 빈 그녀의 눈동자를.

“진한, 이 것 좀 봐. 여기 이 그림, 월하향 맞지?”

그가 내민 것은 ‘박물관 안내책자’ 였다.   나는 달빛에 의지해서   그가 펼쳐 놓은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초상화 말이야?”

초상화 사진이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했다.  배경은 달빛 가득한 정자였다.  정자 앞 호수에는 연꽃이 만발했고 정자에서 연꽃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전모를 쓴 기생이었다.  날캄한 눈매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영락없이 월하향이다.   말없이 한참 들여다만 보는 나에게 앨런이 물었다.  

“잠이 안 와서 읽을 만한 것이 없을까 기숙사 방을 뒤져 보다가 책상 서랍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  생각 없이 훑어보는데, 이 초상화가 눈에 띄는 거야.  초상화에 적힌 글자는 읽지 못하지만 아무리 봐도 월하향하고 닮았어.  네 생각은 어때?”

“글쎄, 옛날 여자들 초상화는 특히 기생들이 쓰는 전모에 한복을 입은 여자들은 구별하기 어려워.  그림 설명에도 월하향이라는 말은 없고 ‘어느 기생’ 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는걸.”

성의 없는 내 대답에도 앨런은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했다.

“초상화 설명을 한 번 읽어줄 수 있을까?  월하향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나는 안내 책자를 읽기 시작했다.

“위 그림은 1700 년대 남겨진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상선 임수인’의 작품이다.  여성의 섬세한 감정과 애틋한 사랑을 잘 표현한 수작으로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생략하고 중심 인물의 묘사에 치중하는 세련된 화법을 보여준다.  초상화의 제목은 ‘어느 기생’으로 전모와  복색에 수놓인 연꽃 무늬를 미루어 볼 때  그녀는 평양 일패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앨런은 내가 읽어주는 내용을 듣고 나서도 안내 책자의 우표만한 초상화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가경 향토 박물관이면 네가 오늘부터 출근할 박물관 아니냐?”

그렇다는 대답에 앨런은 눈을 어린애처럼 빛냈다.

“퇴근 할 때쯤 한 번 가봐도 될까?  내 눈으로 이 그림을 직접 한 번만 보고 싶어서.”




아침에 가경 향토 미술관에 출근했을 때 초상화는 그곳에 있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랬지만 책자에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그림이었다.   확실히 그림 속 여인은 월하향을 닮았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초상화를 하루 종일 바라보았다.  퇴근할 때쯤 앨런이 정말 찾아왔다.  그는 아침보다 훨씬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다.

“진한, 이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한 책인데 초상화와 관련된 부분을 읽어줄 수 있어?  한글을 못 읽으니까 어려운 점이 많아.”

나는 앨런이 알려준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상선 임 수인이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가경 고을에 들렀을 때 한 기생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게 되어 미래를 약조하였으나 임수인은 과거시험을 위해 가경을 떠나야 했다.  이에 임수인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정표로 주었다.”

“만약 이 여인이 월하향이라면 그녀는 화가 임수인 과 사랑하는 사이였겠구나.  수려한 외모의 천재 화가와 아름다운 일패 기생의 러브스토리라.  낭만적인데.  그런데 화가는 왜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 대신 ‘어느 기생’을 제목으로 했을까?”

앨런의 말에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으로 만난 날 월하향이 저승은 슬프고 외로운, 차가운 곳이라고 했었다.  그날 이후 내내 잊고 지냈는데 갑자기 그 말이 기억났다.  하루 종일 그녀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눈길은 내가 아닌, 연꽃 너머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월하향이라도,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 없었다.  엇갈리고 비껴가고 잊혀지고 사라진다.   저승은 지독히 슬프고 기분 나쁠 만큼 외로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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